빙의자는 이런 엔딩이 싫습니다! 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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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새하얀 머리, 그 아래 시퍼런 눈을 형형하게 뜬 라타가 가장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양옆으로는 디자이너들이 주르륵 서 있었다.

“제국의 고귀하신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라타가 고개를 숙이자 긴장한 표정의 디자이너들이 허리를 숙이며 깍듯한 예를 갖췄다.

종종 이런 식으로 백이강이 모두에게 경외받는 황태자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곤 하는데, 그때마다 낯설었다.

사실 내가 보기에 백이강은 그냥 이기적이고 배은망덕한, 하지만 간혹 인간미가 있는 평범한… 아니, 평범하진 않지. 아무튼 내게 그는 그리 무섭지 않은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백이강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내가 소설 속에 빙의 중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인사를 받은 백이강이 별안간 나를 다소 무뚝뚝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의 손가락 끝이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 뭔데…. 저 손가락은 무슨 의민데? 설마 또 라타가 나를…?

“전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엄습하는 불안감에 본능적으로 움찔하던 그때, 라타가 백이강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행히 오늘은 백이강이 있어서 라타가 내게 붙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에 안심할 틈도 없이 다른 디자이너들이 금세 내게 다가왔다.

그래도 라타에 비하면 다들 순해 보이는 인상이니까 괜찮을지도?

“자, 시작하지.”

“옙.”

걱정을 떨치기 무섭게 선두에 선 디자이너가 비장한 얼굴로 묘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기 시작했다.

뾰족한 옷핀과 더불어 얼룩덜룩, 불그스름한 자국들이 묻어 있는 줄자들이 한두 개씩 손에 들려 있었다.

어, 근데 줄자에 피가 묻은 것 같은데…? 잘못 본 게 아닌 것 같은데?

“잠시만요, 선생님들. 뭐 하시려고 그런 위험한 걸…?”

당황한 내가 주춤하자 가장 앞에 있던 디자이너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늘 마법사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에 어찌나 옷발이 잘 받으시던지, 저희 모두 마법사님께서 다시 방문하실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상냥한 웃음과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그들의 손에 자연스럽게 붙잡힌 나는 그때와 같이 마네킹이 되어 이것저것 치장당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 옷이 그리 화려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국무회의에 맞춘, 적당히 격식 있고 깔끔한 제복이었다.

다만 딱 하나…….

“근데 망토는 좀 덥지 않을까요?”

양털이 달린 검붉은 망토를 걸쳐야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본디 마법사들이 관습적으로 가운이나 망토 같은 것을 어깨에 주로 걸치는 건 맞지만, 이건 좀 과한 것 같은데….

그러자 조금 전과 같이 친절한 얼굴을 한 디자이너가 해사한 미소를 보였다.

“하하. 청도운 님께선 마법사시잖아요?”

“네? 네….”

느닷없이 저 소리는 왜 하는 거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여전히 다정한 낯을 한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체온쯤은 마법으로 유지할 수 있으실 테죠. 능력 있는 마법사시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그렇죠?”

“그, 그거야 그렇지만.”

“문제가 해결되었네요.”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게 이런 걸까? 심지어 주변에 있던 다른 선생님들이 ‘역시 마법사님!’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바람에 결국 얼렁뚱땅 넘어가 버렸다.

그래… 좀 덥다고 죽진 않으니까….

이후에는 여러 명이 붙어서 머리를 만져주기 시작했다.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위쪽으로 단정히 올라섰다.

“저기, 선생님들. 저는 그냥 호위로서 회의에 들어가는 것뿐인데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만….”

보다 못한 내가 슬쩍 의견을 뱉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회의니까 더욱 신경 쓰셔야죠.”

“맞습니다. 저희 의상실의 화려한 프라이드가 마법사님과 태자 전하께 달려 있다고요.”

…아, 이 모든 게 너네 자긍심을 지키기 위함이었냐고요.

“마법사님, 잠시 눈을 좀 감아보시겠어요?”

반박할 기력도 없는지라 순순히 눈을 감았다. 머지않아 눈썹을 칠하는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하다 하다 이젠 화장까지 하네. 하아….

착잡하지만 별수 없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예고도 없이 조용하고 적막한 분위기가 훅 찾아오자 왠지 모르게 섬찟해졌다.

게다가 눈썹을 칠하던 손길도 어느 순간부터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선생님?”

아무리 불러보아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뭐지, 벌써 다 끝난 건가?

“저, 눈 뜹니다…?”

“뜨지 마.”

조심스레 눈을 뜨려는데, 별안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기도 잠시, 더없이 익숙한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챈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뒤편에서 백이강이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블랙 다이아몬드가 총총 박혀 있는 까만 제복을 입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더 단정하게 가르마를 타서 그런지 제법 고고한 티가 났다.

음. 뭘 입혀놔도 잘 어울리네. 라타가 환장할 만하네.

절로 감탄하여 고개가 끄덕여지는 백이강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제국의 황태자였다.

그런데 홀린 듯 그를 보는 나를 마주한 보랏빛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비뚜름히 기울어 있었다.

“쌤들은 다 어디 가고 네가 있어? 나 다 끝난 거야?”

그 많던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어서 묻자, 가만히 나를 직시하던 백이강이 내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데, 너는 아직.”

그러더니 내 목께로 손을 뻗었다. 이윽고 셔츠 상단의 풀린 단추 두 개를 여미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것까지 다 끼우면 답답한데.”

하필이면 한 치수 작은 셔츠를 입은 참이었다. 그래야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보인다는 개소리가 그 이유였다. 대체 왜 터져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한 백이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추를 마저 여몄다. 그래, 애초에 말이 통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저녁에 황녀가 오기 때문에 회의는 금방 끝날 거다. 조금 답답해도 참아.”

준비가 다 끝났다는 걸 깨달은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그냥 네 옆에 있으면 되는 거지?”

“그래. 이제 가지.”

우리는 곧장 의상실을 나와 회의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이 꽤 익숙하다 했더니, 그때 백이강과 아르테 황녀의 약혼 건이 오가던 회의를 몰래 엿들었던 바로 그 회의장이었다.

으음, 괜히 긴장되네.

사실 지금까지 빙의 생활 중에 이런 데를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메인 주인공이 전개대로 잘되는 모습이나 구경하면서 흥청망청 놀았으니까….

기사들이 문을 여는 순간, 백이강이 나를 돌아보았다.

“쓸데없이 눈 굴리지 말고 나만 봐.”

“어, 응.”

깊게 생각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 나갔다. 그것이 퍽 흡족했는지 백이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기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안쪽에 있던 귀족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일어나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그나저나 상석에 황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하긴, 지금쯤 몸이 안 좋으려나? 외부 활동은 최대한 피하려고 하겠지.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는 아니지만, 황제는 원작 초반부에서부터 건강이 안 좋았다. 병환을 앓다가 끝내 목숨을 잃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제 권위가 흔들릴 것을 우려한 황제는 병이 있다는 사실을 꼭꼭 숨긴다. 결국 더는 손을 쓸 수 없을 때가 되고 나서야 이 사실이 밝혀진다.

그게 슬슬 때가 됐다. 아마 지금 시기를 보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물론 백이강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모른 척하겠지. 황제의 병환에 대해 아는 체하는 건 조금도 도움 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

느긋하게 안쪽으로 들어선 백이강은 자연스레 상석에 앉았다.

그가 앉자 귀족들도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맨 앞에서 귀족들을 둘러보고 있자니 익숙한 얼굴들이 몇 보였다.

호오, 저기. 원작 중반부에서 이안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망신을 받고 퇴장당하는 조연도 있네.

나는 그들을 구경하며 백이강의 뒤편에 섰다. 회의는 백이강의 군더더기 없는 진행과 함께 깔끔하고 빠르게 이어졌다.

그런데 왠지… 시선들이 하나같이 백이강이 아니라 내게 쏠리는 것 같은데?

착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다들 곁눈질로 나를 흘끔흘끔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 딴에는 개인별로 몰래 쳐다보는 거겠지만, 여러 명이 동시에 그러다 보니 앞에 있는 나로서는 그들의 시선이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아무래도 아셀이 아닌 내가 있으니 신기한 모양인데.

데구루루 눈알을 굴리며 귀족들의 뜨거운 눈빛을 애써 피하던 그때였다.

“….”

찰나, 갑작스레 백이강의 말이 끊겼다.

그러자 여러 사람의 말소리로 왁자지껄하던 회의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어지는 침묵 속, 귀족들은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며 백이강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하.”

백이강의 입에서 짤막하고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웃음의 의미를 깨달았다.

‘저건 분명히 뭔가가 거슬린다는 뜻이다!’

애당초 웃을 일이 없는데 웃는 것부터 이상하지 않나.

백이강의 뒤에 선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새하얗게 질린 귀족들의 얼굴을 보니 대충 알 것 같기도 했다.

뭔진 몰라도, 지금 백이강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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