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9화

Background color
Font
Font size
Line height

내 나이 아홉 살. 성인 남자를 상대하기엔 신체 조건이 비루했다.
게다가 나는 검술을 갈고닦거나 하지도 않았다.
회귀 전엔 꽤 검 좀 쓰던 나였지만 회귀 후에는 일부러 검을 멀리했다.
혹시라도 검을 나쁜 일에 쓸까 봐 두려웠다.
때문에 지금의 나는 백면서생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비실비실한 여자애였다.

‘일찍 죽어도 상관은 없지만, 적어도 이런 놈들한테 죽고 싶진 않단 말이야.’

불로장생의 꿈은 없으나, 그렇다고 두 번째 인생을 유괴범에게 잡혀 죽는 마무리는 원치 않았다.
설령 사랑스럽지 못한 삶이더라도 두 번째니까 곱고 평범하게 죽고 싶은데.
나는 머리가 조금 더 맑아지기를 기다리며 머리를 굴렸다.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 여자가 간 지 이제 사흘이 지났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

“준비하고 붉은 우물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사흘? 내가 사흘이나 잠들어 있었다고?
어쩐지 너무 힘이 없고 갈증이 나더라니.
중간중간 깨었을 때 물을 찾았고, 저들이 물을 먹여줬던 것 같은 기억도 난다.
그게 약을 탄 물이었을까?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나는 이렇게 누워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단 플랜 A는 내가 평범하고 약한 여자애임을 어필해서 그들이 방심하게 하는 것.
똑똑한 걸 티 내봤자 내 무덤을 파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우웅…….”

나는 눈을 가린 안대 위로 눈을 비비려다 안대가 귀찮아 벗으려고 하는 척 애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손발이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사흘이나 굶은 내가 성인 남자들을 이기고 도망칠 확률은 제로에 가까우니, 저들도 굳이 묶어두진 않은 모양이었다.

“깨어났나 봐.”

“꼬마야, 일어났니?”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우웅, 이거 안 보여…….”

“풀어줘.”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눈을 가린 안대를 풀어주었다.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떴는데도 눈부신 감이 없는, 어둡고 허름한 방 안.
창문조차 없는 탓에 여기가 어딘지도, 밤인지 낮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일단 유괴범은…… 보이는 건 두 명인가?’

나는 부스스하게 눈을 뜨는 척하면서 상황을 확인했다.
한 사람은 한쪽에서 혼자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고, 한 사람은 내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내 옆의 의자에 앉은 사람은 이마에 긴 흉터가 나 있었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었다.
보아하니 대단한 조직 같진 않고 어디 거리에서 굴러먹다 온 시정잡배처럼 생긴 녀석들이었다.

‘……겨우 이런 놈들한테 당한 거야?’

진짜 자존감 떨어진다.

“안녕, 꼬마야.”

옆에 앉아 있던 놈이 나와 눈을 마주치곤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다정하기보다는 아둔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나는 해맑게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무섭지도 않을뿐더러, 일단은 그들을 파악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니 호감을 사는 수밖에.
유모를 보냈다고 하니 어떻게든 일이 진행될 것 같았지만 걱정되는 게 있다면.

‘……카르넌이 나를 포기할지도 몰라.’

돈을 주느니 나 같은 걸 버리는 패로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잘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카르넌만 믿고 있을 수는 없어.’

벌써 사흘이 지났다고 했다.
황실에서 이런 좀도둑 같은 유괴범을 사흘째 못 찾고 있다는 말이다.
일주일이라는 기한이 지나 버리면, 그들이 내게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카르넌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뚫고 지하 암반수와 용암 아래에 썩어가고 있을 지경이었으니 마냥 그의 구원을 믿고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나의 몸 상태였다.
며칠을 굶은 데다가 약을 먹은 탓인지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무력한 나는 일단 순수한 아이를 가장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바보 레이 같은.
내가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묻자 그는 잠시 나를 지켜만 보다가 웃었다.

“귀여운 꼬마 아가씨로구나. 나는 투투야.”

“투투 아저씨는 새로운 유모인가요?”

“유모? 아니. 유모는 아니지.”

“그럼 아빠 친구?”

나는 부러 해맑게 웃었다. 눈치 없이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바보처럼.

‘도로테아 밀라네어가 이러는 꼴을 봤다면 누구나 배꼽을 잡고 웃을 텐데.’

성격에 맞지도 않는 미소를 띠어서까지 저들의 환심을 사야 하는 내 처지에 화가 났지만 참아야 했다.

“그래, 나는 아빠 친구란다.”

내 미소 때문인지 투투의 얼굴이 어느새 풀어지면서 내 천진한 연기에 응했다.

“그럼 투투 삼촌이라고 불러도 돼요?”

“투투 삼촌? 허헛, 그래, 투투 삼촌.”

삼촌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투투는 해죽이 웃었다.

“귀족이라 그런지 인형처럼 예쁘게도 생겼네.”

투투는 나를 빤히 들여다보면서 중얼거리자, 나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예전에 어떤 입바른 말을 즐기는 놈이 거의 매일같이 내게 하던 말이 있었지.

‘폐하께서 웃으실 수만 있다면 전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 한 번만이라도 웃어주세요.’

그 말의 신뢰도는 차치하고서라도, 사람들은 내가 황제가 되기 전부터 아름답다고 말했었다.
레이의 책봉식 때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내가 황후 앨리스를 쏙 빼닮았다고 했다.

이미 돌아가신 내 어머니 앨리스는 황태자 카르넌이 한눈에 반할 정도의 엄청난 미인이었다.

나아가 황제 카르넌이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마음을 앗아간 여인이었다.
어머니의 사후에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따금 그녀의 미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내 눈엔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지만 그래도 남들 눈에 끔찍하진 않은 모양이다.

“근데 여기는 어디예요?”

나는 상념을 털어내며 물었다.

“여기는 삼촌네 집이야.”

거짓말.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고 해도 사람이 산 흔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속아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상황을 파악할 때까진 시간을 벌어야 했다.

“와, 근데 삼촌 얼굴에 그거 뭐예요? 멋있다!”

나는 그의 이마에 있는 흉터를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화내거나 협박할 타이밍도 없이 칭찬이 들어가자 투투는 좋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허헛, 그래? 이건 말이야. 이 삼촌이 옛날에 무서운 사람들이랑 17 대 1로 싸웠는데…….”

“17 대 1? 삼촌 혼자서 열일곱 명이랑 싸운 거예요?”

허세도 적당히 칠 것이지.

“맞아. 삼촌 혼자서 열일곱 명이랑 싸웠지!”

“우와! 삼촌이 세상에서 제일 세겠다!”

나는 같잖은 허풍에 호응해 주며 작은 손으로 박수를 짝짝 쳐주었다.
너 같은 몸으로 17 대 1이면 아마 개미랑 싸운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서.

“그 싸움은 원래 맨주먹으로 싸우기로 약속한 싸움이었거든. 근데 어떤 비열한 놈이 옷 안쪽에서 칼을 꺼내 든 거야.”

아, 그러시구나. 그럴 거 같더라고요.

“그 녀석은 나의 심장을 노렸지. 그걸 피하다가 생긴 상처란다.”

심장을 노리는 칼을 피하다가 왜 이마에 그런 상처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요란하게 피하셨나 보네요.

“아팠겠어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는 어느새 나를 유괴했다는 사실을 까먹고 조카에게 왕년의 영웅담을 들려주는 삼촌이 되어 있었다.

“삼촌은 강하네요.”

“그리고 빠르지.”

투투가 ‘슉슉’ 소리를 입으로 내며 요란하게 몸을 움직였다.
아, 좀. 적당히 해.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지.

“대. 다. 나. 다.”

나는 억지 박수를 치며 투투의 허세에 어울려 주었다.
투투는 신이 나서 내게 더 바짝 다가와 앉더니 허풍을 이어나갔다.
듣고 있자니 그의 상상력이 무척 뛰어남을 알 수 있었다.
숲에서 곰을 만났는데 맨손 격투로 이겨서 그 곰 가죽이 집에 걸려 있다든가, 산사태에 깔렸는데 손으로 흙을 파서 뚫고 나와 살아남았다든가.

‘그럴 거면 차라리 소설 작가 해보는 건 어때? 그 정도 상상력이면 다작해서라도 먹고살 텐데.’

나는 기계적인 감탄사를 연발하며 생각했다.
그의 허풍을 들어주는 건 카르넌이랑 마주 보고 있는 것만큼이나 고역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몰래 주위를 살펴볼 시간을 벌었다.
유감스럽게도 무기나 출구 위치, 환경 등 뭐 하나 내게 유리한 것이 없었지만.
대충 상황을 파악한 나는 투투의 말을 더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삼촌…… 나 배고파요.”

투투의 허풍을 들어주기 지쳐서 나는 그의 이야기에 틈이 나기가 무섭게 끼어들었다.
더 들어줬다가는 성질이 나와 버리겠어.

게다가 한계치에 다다른 허기에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이쿠! 우리 꼬마 아가씨가 배고프구나!”

투투는 벌써 내 편이 되어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사내에게 갔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는 언짢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대니, 애가 배고프대.”

“그래서?”

대니가 투투를 노려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대니가 투투보다 서열상 위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게, 우리도 먹을 시간이 됐고 애도 많이 굶었잖아…….”

대니는 아니꼬운 듯 나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확실히 식사 시간이 되기는 했는지 투투에게 식사를 내오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카드놀이를 하던 테이블을 치우고 식사할 준비를 했다.
차려진 음식은 꽤 그럴싸했다.

‘나를 납치하고 받을 돈을 생각하며 만찬을 즐기시는군.’

잘 익은 닭 한 마리에 치즈가 듬뿍 얹어진 빵에.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르고 나서야 외면하고 있던 허기가 다시 몰려들었다.
이렇게 극심한 허기는 오랜만이었다.
정말 자칫하면 사람 비굴하게 만들 만한, 무릎을 꿇어서라도 빵 한 조각 달라고 하고 싶은 허기.
나는 유괴범들에게 구걸하는 수준까지 떨어지고 싶진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벌리고 있다간 나도 몰래 침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투투는 자연스럽게 나를 안아 들고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 앞에 앉혔다.

“어딜 앉아. 내려가.”

대니가 험상궂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와의 겸상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
내가 나서서 앉은 것도 아닌데 죄인 취급하는 게 꼭 누구 같네.
빵 한 조각만 주면 안 되겠냐는 구차한 말이 거미줄 칠 것 같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겨우 삼켜졌다.

“하지만 애가…….”

“너 정신 제대로 안 차려? 놀러 왔어?”

대니가 미간을 구겼고, 투투가 금방 꼬리를 말았다.
나는 순순히 의자에서 내려갔다. 겨우 몇 걸음 걸은 건데도 머리가 핑 돌았다.
사흘 굶은 것 맞아? 그 이상 굶은 기분인데.


You are reading the story above: TeenFic.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