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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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지금은 쇠약해졌지만, 그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그가 에단을 찾아가 봤자 에단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로테아를 찾아간다면, 에단은 천공에서 추락하는 기분이 들겠지.

“넌 지금껏 사람들을 네 마음대로 해왔지. 이미 귀족들도 많이들 널 따르더군.”

이야기하던 테온은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그의 손수건에 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하지만 테온은 이제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어둠의 정령에 관한 건 도로테아에게 밝히지 않을 생각이야.”

그는 흐릿한 미소를 띠었다.
테온은 에단이 지금껏 도로테아에게 어둠의 정령과 테온의 건강 상태를 치밀하게 숨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매일같이 말라가는 테온을 걱정했지만 에단은 온갖 방법으로 테온의 병명을 숨겼다.

‘줄리아 델레바인 영애를 향한 상사병이라고 합니다.’

도로테아는 테온이 나날이 쇠하는 까닭이 줄리아를 향한 상사병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너는 내가 죽은 뒤에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지?”

테온이 희미하게 웃으며 에단에게 물었다.
그 미소가 에단을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에단이 대답하기도 전에 사위가 어두워졌다.
어둠의 정령이었다.
테온 프리드가 정령의 힘을 견디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그를 농락하려는 것인가?
에단은 테온을 찾으려 새카만 어둠을 더듬거렸다.

“테온 프리드……!”

어둠에 갇힌 에단은 불안감에 빠르게 박동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어둠 속의 싸늘한 침묵이 그를 점점 더 공포로 몰아넣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죽을 날을 받아 뒀으니, 길동무라도 하나 만들겠다는 건가?
에단은 어둠 속에서 칼이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둠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걷혔다.
에단은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눈을 감았다. 그는 서서히 빛에 적응한 후에야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리고 테온이 보이지 않았다.
에단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분명 죽어가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텐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 * *
그는 다른 일을 제쳐둔 채 초조하게 궁전을 돌아다니며 테온을 찾았다.
그가 자주 산책하고 낮잠을 자던 정원, 레이먼드가 쓰던 궁전, 그가 정령의 힘을 통제하지 못해 망가트린 유리온실.

그러나 테온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테온을 찾은 것은…….

“바, 방금 황제 폐하께서……!”

그는 다급히 달려온 한 신료의 말에 도로테아의 방으로 급하게 달려 올라갔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은 쓰러진 도로테아. 그리고 그 옆 바닥엔…… 테온의 시신이 있었다.
에단은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가 다시 수많은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테온 프리드가 죽었다. 그것도 스스로 목을 매달아.

‘그래야 네가 더 괴로울 테니까.’

테온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는 죽음의 장소를 도로테아의 침실로 선택했다.
도로테아가 아무리 불러도 단 한 번도 걸음 하지 않던 그곳을. 매일 밤 도로테아가 외로움에 파묻혀 눈물로 밤을 새우던 그곳을.
에단은 쓰러진 도로테아의 창백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려 사라질 듯 위태로웠다.
테온 프리드. 그는 완벽히 복수에 성공했다.
에단은 더 이상 도로테아와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검조차 제대로 들지 못할 것 같은 가느다란 팔목. 깨무는 것이 버릇이 되었는지 멍과 피딱지가 남은 채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 살이 없어 푹 팬 눈두덩이.

그는 도로테아의 옆에 주저앉아 울었다.
전장을 거침없이 누비며 빛나던 도로테아는 더 이상 없었다.
에단은 도로테아의 옛 모습을 결코 찾아줄 수 없을 것이다.
힘차게 검을 휘두르던 팔도, 촉촉하고 매끈하던 입술도, 미래를 꿈꾸며 피우던 미소도.

“왜 당신은…….”

왜 당신은 하필 테온 프리드를 사랑했나.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었다면 나는 당신을 절대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 텐데.
세상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완벽한 황제로 만들었을 텐데.
왜 나에겐 단 한 번에 기회조차 오지 않는가. 왜 단 하나의 사랑에 눈이 멀어 다른 것은 보지 못했나.

그는 도로테아를 원망하며 울었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것은 도로테아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얼마 뒤, 도로테아가 깨어났을 때도 에단은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폐하…….”

그는 눈을 뜬 그녀를 간신히 불러내었다.

그녀가 눈을 뜨길 간절히 빌었는데, 막상 그녀를 마주하니 불안감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몰려왔다.
혹시라도 그녀가 죽겠다고 하면 어쩌지? 나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지?
방금까지의 원망은 완전히 잊은 채 그는 또다시 바보처럼 도로테아만을 생각했다.
눈을 뜬 도로테아는 몽롱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이내 현실을 인지한 듯 입술을 떨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빈속을 게워냈다.

“의사……! 의사!”

에단은 일어나자마자 구토하는 도로테아에 다급히 의사를 불렀다.
하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의사는 도로테아를 고칠 방도를 알지 못했다.
도로테아는 음식은 입에 대지도 못했다. 조금이라도 뭘 먹으면 다시 금방 게워내기 일쑤였다.
에단이 무언가 물어보아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잔인한 침묵은 칼날 위를 걷는 듯 아슬아슬해서 도로테아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폐하,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지요.”

에단이 간청해도 도로테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는 몇 날 며칠을 자지 않다가 힘이 빠져 탈진하거나 쓰러지듯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다시 비명을 지르며 깨면, 에단은 떨리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울었다.

“폐하,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 제발 그만. 다 내가 부족한 탓. 다 내가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한 탓. 당신을 욕심낸 나의 탓.

“폐하께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으신 황제입니다. 무얼 두려워하십니까?”

그는 애원하듯 도로테아를 안고 물었다.
자신의 뛰어난 가치를 잊은 그녀에게 몇 번이나 상기해 주고 싶었다.
찬란히 빛나던 당신은 이 자리를 그토록 갖고 싶어 했잖아. 그 사람이 당신 인생 그 자체인 것처럼 울지 마. 돌아와, 테온 프리드가 아니라 도로테아 밀라네어로.

그러나 에단은 도로테아를 다시 쌓아 올릴 재능만큼은 타고나지 못했다.
도로테아는 죽은 테온 프리드에게 영원히 머물러 있었다.
* * *
한편 에단은 도로테아를 대신해서 국정을 돌보아야 했다.
도로테아가 언제 마음을 다잡을지 모르겠지만, 그전까지 그녀의 황위를 수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그는 도로테아 대신 황제의 직인을 찍고, 국가 중대사를 결정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미봉책일 뿐. 제국 우베라는 당장 난 구멍을 수습하며 간신히 유지되어가고 있었다.
에단은 그 가운데서 절망을 느꼈다. 도로테아와 만들고 싶은 나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었다.

국정은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계획과 반대로 흘러갔고,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른 귀족과 신료들도 쇠락해가는 우베라의 국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황제 폐하를 몰아냅시다.”

고관 회의에서 그 안건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몰아내다니요?”

도로테아를? 나의 유일한 황제를?
에단은 그 말이 나오자마자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고관 대신들을 쳐다보았다.

“폭군을 이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세 제국을 새워야지요.”

“폭군이라니……!”

“재상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신들은 부정하지 말라는 듯 창밖을 가리켰다.
이미 백성들의 원성이 황궁 안쪽까지 밀려 들어오는 상태.
저 불만을 잠재우고 위기 타파하려면 결단이 필요했다.

“폭정의 책임은 황제에 있습니다.”

“오직 황제에게만 있다?”

에단이 가소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도로테아에게 죄가 있다면 저들에게도 있는 것을. 도로테아가 사치를 부릴 때 그 옆에서 즐거워하던 이들이 누구였던가.
도로테아의 결정에 내내 반대하다가, 저들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 가져가던 도둑놈이 누구던가.
그러고선 이제 도로테아가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주지 못하니 버리겠다?
처음부터 충심으로 따른 게 아닌 만큼 그들은 배신도 빨랐다.

“현 상황의 책임이 저 지경이 된 황제에게 있지 않으면 누구에게 있단 말입니까?”

제물은 하나로 족하다.
폭군 하나를 제물로 던져주면 다른 이들은 최소한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현 황제 폐하를 몰아내면, 그다음은요?”

에단은 건조하게 물었다.
이제 밀라네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줄리아의 뒤를 캐던 때, 그가 먼 밀라네어 핏줄까지 싹 다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때를 걱정해서이기도 했다.
폭군이라고 불리는 도로테아를 몰아내고, 얌체 같은 귀족 새끼들이 다른 밀라네어를 끌어다 앉힐 생각을 할까 봐.
그런데.

“황제가 되십시오, 재상.”

예상치 못한 헛소리가 고관 회의를 더럽혔다.
나더러 황제가 돼라?

“지금 모든 국정을 결정하는 건 재상이 아닙니까?.”

황제 도로테아의 인장, 서명, 결정권까지 전부 에단의 손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에단에게 차기 황제의 자리를 명목상으로라도 넘겨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군.’

에단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를 추대하겠다는 건 구색을 갖추기 위함이다.
어차피 저들은 다시 황위를 갖기 위해 내전을 불사하리라.

“당신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게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에단은 치를 떨며 그들에게 물었다.
지금 제국 고관에 오른 자들은 모두 레이먼드를 몰아내고 도로테아로부터 힘입어 올라온 자들이었다.
그들의 정치적 뿌리는 도로테아였다.
하지만.

“저희의 뿌리가 저희를 지탱해 줄 수 없다는 게 문제지요.”

그들은 헛소리만 지껄일 수 있는 병에 걸린 듯 더러운 말을 가감 없이 뱉어냈다.
도로테아가 힘들 때 충심을 다해 보필해 주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입바른 말을 하는 자를 모두 숙청하고 나니 남은 것은 박쥐의 심장을 타고난 이들뿐이었다.

“제게 황제는 오직 도로테아 밀라네어 폐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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