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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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단은 조나단의 사망 소식에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지만 울었다.

“사고였어요, 아버지……. 저는, 저는 너무 놀라서…….”

에단은 브론테 부부 앞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이건 살해일까?
사람들을 늦게 데려온 그의 죄일까? 만약 그가 사람을 조금만 더 빨리 불러왔다면, 그는 살았을까?
뭐, 에단은 조나단의 죽음이 그의 탓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결론적으로 그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조나단 브론테는 죽었으니까.
이제 브론테 가문의 적장자는 없다.

“에단을 후계로 삼읍시다.”

브론테 공작과 공작 부인은 기나긴 논의와 싸움 끝에 에단을 후계자로 삼았다.
그는 마침내 공작가의 유령은 ‘에단 브론테’라는 인간의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 덕분에 도로테아 밀라네어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 * *
에단은 공작가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뒤 조금 늦은 나이에 제도 람파스의 데뷔탕트에 참석했다.
처음으로 무도회에 선 그는 긴장과 두려움보다는 기쁨과 성취감이 먼저였다.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그의 존재에 관심을 쏟았고, 그는 그것을 즐길 줄 알았다.

조나단의 죽음 후, 많은 걸 배운 그는 귀족들에게 겸손한 말과 상냥한 말투로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고고하던 귀족들은 그의 웃음 하나에 홀려 곁으로 왔고, 말을 걸어보고 싶어 했으며, 손을 잡고 춤추고 싶어 했다.
그렇게 콧대 높던 분들이 그의 관심을 끌려는 모습을 보며 은근한 즐거움을 느꼈다. 재미있었다. 귀족을 가지고 노는 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콧대 높은 도련님이 계시면 수줍은 투로 그에게 접근했다.

“제 실력이 워낙 좋지 않아서…….”

“오오, 바이올린도 켤 줄 알아?”

서자 출신에 데뷔도 늦은 그를 무시하는 이를 보며 에단은 생긋 웃었다.

“한번 제 연주를 듣고 감상평을 들려주시겠어요?”

“좋지. 내가 이래 봬도 바이올리니스트들한테도 인정받는다, 이 말이야.”

그렇게 하나가 으스대면 그는 겸양을 떨며 바이올린을 켜 보였다.
그의 선율이 퍼지면 이내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쏠렸고 감탄을 쏟아냈다.

“저…… 들어줄 만한가요?”

바이올린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물으면 사람들은 그의 승리에 박수를 쳐주었다.

“아니, 이렇게 잘 켜면서 그렇게 눈치를 봤단 말이야?”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한테 들려준 적이 없어서…….”

“브론테 공작이 천재를 숨겨왔군!”

에단이 이렇게 칭찬을 받으면 아까까지 으스대던 대단한 귀족 도련님은 열등감과 모욕감으로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무도회에 몇 번 얼굴을 비친 후론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무리도 생겼다.
그가 떨어트린 손수건을 줍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영애들이라든가…….

“풋.”

평소처럼 귀족들을 가지고 노는데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에단이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도로테아 밀라네어가 있었다.

“아, 웃어서 미안. 재밌게 노는 거 같아서.”

도로테아는 그를 보고 계속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에단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나와 동류인 사람.’

두 사람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닮은 점이 많았다.
놀라우리만치 똑 닮은 두 사람의 삶.
에단은 그 순간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로테아 밀라네어는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도로테아의 아름다운 백금발과 푸른 눈동자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되었다.

검술에는 문외한이었던 그는 도로테아의 검에 빠져 몇 날 며칠 탐닉했다.
도로테아는 어디서든 스스로 빛이 났다. 무엇이든 제힘으로 쟁취했고, 어떤 성과든 제힘으로 이룩했다.
비현실적인 사람. 그래서 더 아름다운 사람.
에단의 눈에 도로테아는 무엇 하나 결여된 것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밀라네어임에도 정령을 다루지 못한다고 불량품 취급했지만, 에단의 눈에는 그것마저 그녀를 완벽하게 만드는 구성 요소일 뿐이었다.
정령을 다루지 못하는데도 저토록 완벽하다니.
지나치게 아름다워 꺾여버린 꽃. 억눌린 재능. 그래서 자라난 가시.
에단의 눈엔 그것만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알아봤듯, 도로테아도 그를 알아봤다.

“내 궁전에서 일해, 에단 브론테.”

그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도로테아는 명령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도로테아 밀라네어다워서.
에단은 저울질도 하지 않고 기꺼이 그녀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황궁 생활을 하며 그는 깨달았다. 고작 정령 하나 때문에 도로테아는 황제가 될 수 없음을.
그는 그 사실을 도로테아만큼이나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가 인정할 수 있는 황제는 오직 도로테아뿐이었다. 레이먼드 따위와 비견되지 않을, 신이 내린 천재.
빛의 정령이 대체 뭐라고.
도로테아는 그 자체로 태양이자 달이자 하늘을 수놓은 별인 것을.
그러므로 에단은 도로테아를 위해 그의 전부를 바쳤다. 그리고 그의 지지를 힘입어 도로테아의 영향력이 조금씩 넓어지던 때.

“세리티안으로 내려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에단 브론테 공.”

레이먼드가 그에게 제안했다.

정중한 요청을 가장한 음흉한 의도.
에단은 레이먼드의 제안을 비웃으며 오히려 그의 말을 좋은 신호로 받아들였다.
레이먼드가 경계할 만큼 도로테아의 힘이 커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당신은 도로테아에게 독이 될 뿐이야.”

테온 또한 그렇게 말했다.
아, 테온 프리드. 그는 비열하게도 도로테아의 약혼자 자리를 차지하고는 레이먼드를 열렬히 지지했다.
오랜 레이먼드의 벗으로서, 그는 오히려 도로테아의 발목을 붙잡았다.
도로테아는 테온과 관련된 일이라면 꿈쩍도 하지 못했다.
에단은 도로테아의 약점이 되는 테온 프리드가 끔찍이 싫었다.

어떻게 하면 도로테아가 저 비겁한 레이먼드의 지지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에단은 테온에 대한 모든 것을 알기 위해 뒤를 캐기 시작했다. 테온에 대한 것이라면 뭐든 낱낱이 파헤쳤다.
심지어 도로테아조차 모르던 테온 프리드의 은밀한 비밀까지.
* * *
그리고 얼마 뒤.
건방진 네레우스의 목을 자르고 돌아오던 그 날.

“그러니까…… 선황의 유언이 뭐라고?”

“황태자 레이먼드를 황녀 도로테아로부터 지켜라…… 였습니다.”

카르넌은 예전부터 걱정이 많았다.
도로테아의 재능과 욕망은 레이먼드에게 위협이 될 수준이었고, 확실히 레이먼드는 도로테아를 막아내기에 너무 약하고 순했다.
어쩌면 에단이 도로테아를 황제로 올리기 위해 차곡차곡 준비해 왔던 일들을 눈치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단은 조금 이르지만 준비하고 있던 운명의 날이 다가왔음을 확신했다.

“황녀님.”

그는 혼란에 빠진 도로테아를 붙잡았다.

“황녀님께서야 말로 진정한 황제의 자질을 갖추셨습니다.”

도로테아에게는 황제 자리에 오를 용기를 점화할 발단이 필요했다.
어설프고 못난 친족을 감싸는 어쭙잖은 양심을 깨부숴야 했다.

“빛의 정령이 황제를 정하는 시대는 막을 내려야 합니다.”

얼마나 불공평하고 구시대적인가.
어차피 언젠가는 정령을 다루지 못하는 자가 황제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문을 도로테아가 열면 되는 것이다.
그녀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

“제도로 돌아가면 귀족들은 분명 황녀님의 군대를 빼앗고 팔다리를 자르려 할 겁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습니다, 황녀님.”

그는 망설이는 도로테아의 손을 붙잡았다. 나를 믿어. 당신은 이런 데서 꺾여서는 안 돼.

“황제가 되십시오.”

나의 태양, 나의 달, 나의 별, 나의 전부.
그는 그의 황제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 * *
그는 도로테아와 함께 군을 몰고 제도 람파스로 올라갔다.
그의 계획은 딱딱 맞아들어갔고, 장례 와중에 무방비했던 레이먼드 파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아니, 방비를 했어도 도로테아 앞에 무릎을 꿇었으리라.
그가 경외하는 도로테아는 훌륭한 지휘관이었고, 또한 람파스와 레이먼드의 허점을 꿰고 있었다.

“서둘러야 합니다, 폐하.”

“테온.”

마지막 가는 길, 도로테아는 계단을 오르다가 멈춰 섰다.
빌어먹을 테온 프리드가 또다시 위대한 황제의 길을 가로막았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테온 프리드 공은 제가 안전한 곳으로 모셔두었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앞만 보고 나아가시면 됩니다.”

에단은 새 황제의 발목을 잡는 덫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망설이는 도로테아를 위해 직접 궁전의 문을 열었다.

“프리드 공은 일이 잘 마무리되는 대로 제가 모셔오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로테아를 위해 기꺼이 테온 프리드를 맡기로 했다.
* * *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테온 프리드 공.”

테온은 붉은 대리석 기둥에 묶인 채 제 앞에 선 아름다운 사내를 보았다.
피비린내가 나야 할 내전의 현장에서, 그는 유독 진한 꽃향기를 풍겼다.
도로테아의 군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나갈 채비를 하던 테온의 방에 희뿌연 연기가 흘러들어 왔고, 테온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이 상태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에단?”

테온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그러나 에단의 얼굴에선 여유로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새 폐하를 모실 생각입니다.”

에단은 멀리 피어오르는 궁전의 연기를 감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내전으로 오르는 잿빛 연기, 그것은 새 시대를 알리는 봉화였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레이먼드의 목을 베는 것인가.
에단은 먼 훗날 ‘황녀의 난’이라고 불릴 이 역사적 사건 위에서 희열을 느꼈다.
그는 도로테아의 승리를 확신했다. 레이먼드는 도로테아를 죽일 수 없을 테니까.

“왜 날 죽이지 않고 묶어 두는 거지?”

한편, 테온은 태연하게 그의 앞에 서서 바깥을 구경하는 에단에게 물었다.
테온은 레이먼드의 강력한 지지자다. 그러니 설령 도로테아의 약혼자라 할지라도, 후환을 대비해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에단은 테온의 질문에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저도 마음 같아선 하루라도 일찍 죽여드리고 싶군요.”

늘 상냥하던 에단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진심을 속삭였다.
에단 브론테의 진짜 얼굴에 테온은 뼛속이 저릿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제가 프리드 공을 위해 이토록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걸 부디 폐하께서 알아주셔야 할 텐데 말이죠.”

에단은 다시 가면을 쓰며 생긋이 웃었다.
급박한 와중에도 테온 하나에 이렇게 공을 들이는 것은 모두 도로테아 때문이다.
그의 황제 도로테아 밀라네어께서 이 어둠의 피를 이은 자를 지극히도 아끼시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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