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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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테아는 에단의 손목을 붙잡고 도망치듯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시끄러운 사람들을 간신히 따돌려 외진 방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도로테아는 에단을 다시 마주 보았다.

“방금…… 네가 한 짓이야?”

도로테아의 떨리는 물음에 에단은 부정하지 않았다.

“정령, 황녀님께 부족한 건 오직 그것뿐이에요.”

혼란스러워하는 도로테아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네가 어떻게…….”

빛의 정령은 밀라네어만이 다룰 수 있다.
심지어 회귀 전에도 그에겐 이런 능력이 없었다.

“어떻게 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제 누구도 황녀님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중요하죠.”

에단은 떨리는 도로테아의 손끝을 달래듯 붙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기쁘지 않으세요?”

기쁘지 않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어둠 속에서 빛의 정령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을 때, 그녀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 번 살아봤으면서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설마 내가 정령을 다루게 되었나, 하는 희망에 부풀었었다.
하지만 그 힘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 네게 그 힘이 있는 거야, 왜?”

도로테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밀라네어인 자신에겐 없는 힘이 왜 에단 브론테에겐 있는 걸까?

“이건 제 힘이 아니에요. 황녀님의 것이죠.”

“거짓말하지 마!”

남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할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지금도, 그녀가 아무리 불러도 정령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에단이 도로테아의 떨리는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저를 이용하세요, 황녀님.”

도로테아는 자신의 주먹에 들어온, 조약돌만 한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엔 은은한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보석이 들려 있었다.
도로테아는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네가 이걸 어떻게……?”

오래전 잃어버린 빛의 정령석.
그녀는 이 돌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 보았기 때문에.
회귀 전, 그녀가 죽음을 기다리던 그때. 그리고 그때도 정령석은…… 에단의 손에 있었다.

“……이제 아시겠어요?”

에단이 흔들리는 도로테아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도로테아는 온몸에 한기가 스치듯 소름이 돋았다.

“그럼 너도 회귀한 거야……?”

도로테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세리티안에서부터 에단부터 보아왔다. 그는 거의 매주 한 번씩 그녀를 찾아왔고, 자연스럽게 그녀와 시간을 보내다 갔다.
가끔 에단이 지나치게 성숙해 보일 때가 있긴 했다. 때로는 너무 영악하고 똑똑해서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 연기였다니.

“회귀한 것도 맞지만, 정확히는 회귀를 시킨 거죠.”

에단은 뒷걸음질 치는 도로테아를 따라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쿵쿵 뛰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에단이 회귀를 시켰다고? 그와 나의 시간을?

“대체 왜……?”

툭, 도로테아의 등이 벽에 닿았다.

그녀는 에단으로부터 더 물러날 수 없었다.
에단이 다가오자 그 특유의 은은한 백합향이 그녀를 덮쳐왔다.
에단의 눈빛은 선악과를 건네는 뱀처럼 유혹적이면서도 위험해 보였다.
도로테아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당신을 위해서요.”

에단의 붉은 입술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로테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를 위해서?

“거짓말.”

도로테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사람을 쉽게 가지고 노는 사람이다. 지금까지도 회귀한 사실을 숨기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니 그녀를 위해 회귀했다는 말은 결코 믿을 게 못 됐다.
하지만 에단은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는 그녀를 응시하며 쓰게 웃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 답을?”

노랗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 위에 어린 뜨거운 갈망이 도로테아를 응시했다.

‘내게 왜 이렇게까지 내게 관심을 갖는 거야, 에단?’

에피스테메 졸업식에서 도로테아가 물었던 질문의 답은, 지금의 답과 같았다.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아주 쉽고 간단한 답.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그녀가 부정하고 외면한 답.
굳게 다물린 도로테아의 입술에, 에단의 인내심은 결국 한계에 이르렀다.

“아직도 모른 척하신다면, 제가 알려드리죠.”

그리고 도로테아의 입술 위로 뜨거운 감촉이 밀려 들어왔다.
도로테아는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그의 감정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휩쓸려갔다.
에단에게서 나던 은은한 꽃향기와 함께, 짭조름한 눈물이 혀끝으로 스몄다.
그는 사람들을 자신의 것으로 꾀어내는 그 달콤한 혀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너무 오랫동안 참아왔다고. 지난 생부터, 지금 당신을 다시 마주할 때까지.
* * *
에단 브론테.
그의 첫 번째 삶은 불필요한 시행착오가 너무 많았다. 조금 더 일찍 강해졌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의 첫 번째 생은 사람 다루는 법을 모르고 태어났다.

조나단이 뺨을 때리면 맞았고, 아끼는 옷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소중한 신발을 연못에 던져버리면 홀로 울었다.

너무 오랫동안 순수했고, 한없이 어리석었다.
그는 ‘금빛 눈의 천사’라고 불리기 전까지, 아주 오랜 세월을 브론테 가문의 유령으로 살았다.
있으나 없는 존재.

‘서출치고는 호사를 누리는 거지. 저 반반한 얼굴 때문에.’

사람들은 브론테 가문에 숨어 사는 유령을 두고 그렇게 수군거렸다.
브론테 공작이 공작가에 흔쾌히 술집 여자의 아들을 데려와 공작저에서 기른 것도, 친아들이 아닌 그에게 예쁜 옷을 입혀주는 공작 부인도, 그들 눈엔 충분해 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단 브론테는 슬프게도 유령으로 살기엔 지독하게 인간적이었다.

그는 인간 삶에 초연하지 못했으며, 욕망 하나에 울고 웃었다.
그는 밤을 지새우며 자신을 유령으로 살게 한 신을 저주하기도 했다.
나는 유령이 아니라 인간이다. 저들이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보는 것은 그림이나 조각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다.
꺾이지 않은 오랜 부정은 나약한 소년을 점점 단단하게 만들었다.

조나단이 뺨을 때릴 때도, 아끼는 바이올린을 부쉈을 때도, 그의 친구들 앞에 개처럼 기며 놀잇감으로 삼았을 때도 그는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않았다.
조나단에게 당하며 지내던 에단은 점차 생존 방법을 터득했고, 자신의 무기를 예리하게 파악해갔다.
그리고 신이 그에게 내려준 유일한 기회의 날.

평소처럼 조나단 브론테를 ‘도련님’으로 모시고 숲으로 사냥을 나갔던 그 날.
조나단은 사고로 말에서 떨어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졌다.
그 뒤를 따르던 에단만이 유일한 사고의 목격자였다.
* * *

“으윽, 에단……!”

에단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 그를 확인했다.
조나단은 간신히 중턱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은 채 에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다급히 에단을 부르며 작은 나무에 생명을 맡기고 있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닥치고, 밧줄……! 밧줄 있지?”

조나단이 끙끙대며 에단에게 물었다.
에단에게는 사냥용 올가미를 위해 들고 다니던 밧줄이 있었다.
에단은 빤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빨리 내려줘. 빨리!”

그는 에단에게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하지만 에단은 밧줄을 가지러 가지 않고 가만히 그를 보았다. 늘 거만하던 그가 에단에게 생존을 구걸하고 있었다. 구걸마저 오만했지만.

“…….”

“빨리 안 가져와?!”

조나단의 거친 재촉에 에단은 잠시 나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밧줄을 꺼냈다.
그리고 낭떠러지 근처 나무에 밧줄 한쪽이 풀어지지 않게 매었다.

“새끼야! 빨리 안 가져와!?”

최대한 빨리 묶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도 어김없이 날아오는 욕에 에단은 밧줄을 설게 묶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나무 기둥에 밧줄을 묶어놓고 절벽 아래로 줄을 던졌다.
그런데.

“멍청한 새끼! 안 닿잖아!”

밧줄은 아슬아슬하게 조나단에게 닿지 않았다.

“네가 직접 던져야지, 멍청아!”

낭떠러지 끝에서 직접 던져 내렸으면 닿았을 거리.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했다.
흙이 바스러져 가는 낭떠러지 끝에서 저 바둥대는 조나단의 몸뚱어리를 버티라고?
계산이 빠른 에단은 검술 실력도 형편없는 자신이 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같이 떨어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를 위해 목숨 걸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새끼야! 줄 빨리 내리라고!”

“도련님.”

그를 살리기 위해 고민하고 있던 에단은 조나단을 다시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는 끝까지 에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거지 같은 놈을 주워다 우리 가문에서 길러줬더니, 머리만 나빠선, 하등 쓸모없는 놈!”

“…….”

조나단의 욕설에 에단은 자리에서 일어서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야! 에단! 이리 안 와! 죽고 싶어?! 빨리! 아버지가 널 가만히 놔둘 것 같아?”

“사람을 불러올게요.”

에단은 그에게서 돌아서며 자신의 안쪽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이상한 감정을 음미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 기분을.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느껴지는 이 희열을.
조나단이 빵에 유리 조각을 넣어 그의 입안을 다치게 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래서 그때 실실 웃으며 혀를 찼을까?
에단은 처음으로 조나단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젠장, 빨리 갔다 와! 너 같은 놈에게 내 목숨을 맡기는 것보단 그게 낫겠어!”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부르러 달려갔다.
……아마도 달려갔을 것이다.
왠지 발걸음이 무겁고 천천히 움직여져서 평소보다 느리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는 근처에 있는 다른 귀족들을 찾아 불렀다.
꽤 가까운 곳에 사람들이 있었고, 조나단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아쉽게도.
그리고 마침내 장정 서너 명이 밧줄을 붙잡고 급히 조나단에게 줄을 내려주었다.

“하, 젠장! 팔에 힘이 없어…….”

조나단은 나무를 붙들고 간신히 버티던 팔을 뻗어 밧줄을 잡았다.
그러나 잠깐의 안도감은 방심을 불렀다.

“으아악!”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조나단은 밧줄을 잡은 손을 놓치고 말았다.
절벽에 울리는 외마디 비명에 사람들은 놀라 아래를 쳐다보았다.
에단도 사람들과 함께 절벽 아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조나단의 마지막을 목도했다.
가족이 죽었으니 슬퍼야 한다는데, 에단은 어째선지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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