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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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도로테아를 이끌고 무도회장의 중앙으로 향했다.
발 빠른 데뷔자들은 이미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며 환한 데뷔 서클 주위를 돌고 있었다.
데뷔 서클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집중력이 흐려져 데뷔 서클에 올라도 주목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금 뒤늦게 춤을 추는 무리에 뛰어든 두 사람은 데뷔 서클에서 조금 물러나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에단은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함께 한 곡 추시겠습니까?”

그는 다소 작위적인 짓궂음으로, 그러나 매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도로테아가 조심스레 손을 얹자 에단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황녀님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예의를 갖춘 그는 다소 풀어진 웃음으로 그녀의 손을 살짝 당겼다.

“춤 잘 추세요?”

에단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잡으며 물었다.
춤을 추기 위해 마주한 그와 가슴께가 맞닿았고 가까운 곳에서 숨결이 느껴졌다.
도로테아는 급히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아마도.”

예전엔 춤 또한 악착같이 배워서 꽤 추는 편에 속했지만 회귀 후에는 춤을 추지 않은 지 꽤 됐다.
무도회 전에 다시 기억해 내기 위해 한두 달 배우기는 했지만, 실력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에단은 도로테아의 모호한 대답에 웃으며 부드럽게 손을 맞잡았다.

“저는 잘 춰요.”

자신의 실력에 의구심 하나 없는 말끔한 대답.
알아. 너와 춤을 추면 다들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고 말했으니까.
어느 무도회에서는 에단과 춤추려고 기다리던 영애들이 싸움을 벌인 일도 있었다.

“어려우면 저를 믿고 따라오세요.”

에단이 부드럽게 도로테아를 리드하며 첫발을 뗐다.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사람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에단은 도로테아에게 몸으로 말을 걸듯 부드럽게 춤을 이끌어주었다.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도로테아는 그가 어떤 동작을 하고 싶은 건지 들은 것처럼 알 수 있었다.

에단이 춤을 잘 춘다는 것은 이런 부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함께 추는 사람마저도 편하고 즐겁게 만들어 준다.

마치 그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정중하면서도 상냥한 몸짓으로 상대방을 매료시킨다.

“아마도라고 대답하신 것치곤 잘 추시는걸요?”

에단이 잘 끌어준 덕이지만, 그는 상대의 실력을 높여주는 센스도 있다.
그러니 사교계를 단숨에 휩쓸었지.
이런 그에게 그 누가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 넌 못하는 게 없구나.”

그의 춤을 느끼며 도로테아가 말했다.

“못하는 거 많아요. 예를 들면 황녀님의 마음을 얻는 거라든가.”

에단이 그렇게 말하며 도로테아를 훅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그의 텐션에 끌려간 도로테아는 그와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에단……!”

“춤에 집중하세요, 황녀님.”

에단은 발이 꼬이려는 도로테아를 살짝 붙잡아주며 피식 웃었다.
도로테아는 그의 손에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분명 같이 추고 있는데, 그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가 가는 쪽으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여서 도로테아는 주변에서 자신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무도회는 점점 절정으로 치달았다.
데뷔 서클엔 수많은 커플이 올라갔다 내려왔고,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은 거울처럼 샹들리에의 빛과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반사했다.
그리고 그 커다란 무도회 가운데에 도로테아와 에단이 있었다.

“황녀님이랑 에단 브론테, 정말 멋있다.”

잠시 한 곡을 쉬며 두 사람을 구경하던 줄리아는 도로테아와 에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비단 줄리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줄곧 도로테아를 욕하느라 바빴던 네레우스마저도 지금만큼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두 사람의 춤에 눈을 빼앗겼다.
데뷔 서클에 사람이 올라서는데도 그를 향한 축하와 박수가 예년보다 적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도로테아와 에단은 굳이 서클 안에 서지 않아도 가장 환한 조명을 받은 듯 주의를 집중시켰다.
멍하니 그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줄리아는 자신의 파트너인 테온을 다시 살폈다. 테온은 도로테아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테온, 괜찮아?”

“조금…….”

“이만 들어갈까? 레이가 오기 전까지 좀 쉬는 게 좋겠어.”

“……그럼 황녀님 차례까지만 보고 잠깐 쉬자, 줄리.”

테온의 말에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뷔자들은 음악이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데뷔 서클에 오르고 내렸다.

“저희도 이제 곧 오르실까요?”

에단은 가까워진 데뷔 서클을 보며 물었다.
대리석 바닥 위에 놓인 붉은 카펫, 그리고 축복처럼 떨어지는 밝은 조명. 무도회의 한 가운데, 모두의 시선을 받을 수 있는 데뷔 서클.
도로테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에 일어났던 갑작스러운 소등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같은 건 기억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소등이 된다면……. 그건 내 운명이겠지.’

도로테아는 에단과 함께 천천히 데뷔 서클과 가까운 자리로 향했다.
데뷔 서클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도로테아는 줄곧 외면하고 있던 카르넌을 슬쩍 보았다.

찰나의 순간, 그녀는 카르넌과 눈을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도로테아는 흠칫 놀라며 시선을 떨궜다.

‘날…… 지켜 보고 있었나?’

다시 시선을 들었지만 카르넌은 무심한 얼굴로 데뷔 서클을 보고 있었다.
착각이었던가?
데뷔 서클에선 마침 네레우스가 그의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그래, 내가 아니라 네레우스를 보고 있었겠지.’

도로테아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했다.

“네레우스 다음으로 올라가실까요?”

“그래.”

도로테아와 에단은 데뷔 서클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네레우스의 순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네레우스는 서클에서 내려올 차례가 되었는데도 내려오지 않았다.
보통 데뷔 서클에 올라간 경우, 연주되는 음악이 최대 서너 악절이 지나면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데뷔자가 많은 만큼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네레우스는 다섯 번째 악절에 들어가는데도 내려올 기색이 없었다.
그때, 도로테아는 네레우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자기 다음 순서로 도로테아와 에단이 올라오는 걸 방해하고 싶은 듯했다.
다른 사람이 그의 다음 차례로 들어오기를 눈치 주는 느낌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로테아와 에단을 대신해 자리를 차지하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네레우스는 더 버티지 못하고 데뷔 서클을 도로테아에게 물려줘야만 했다.
대신 그는 서클에서 내려갈 때 일부러 발을 짓이기듯 굴러 데뷔 서클의 카펫이 접힐 정도로 구겨놓았다.

춤을 출 때 카펫은 불편한 장애물 중 하나였다. 때문에 데뷔 서클에 까는 카펫은 최대한 반질반질하고 빳빳한 직물에 매끄러운 코팅을 한다.
하지만 카펫은 카펫인지라 구김이 생기면 그 구김이 구두에 걸리거나 감겨서 매우 불편했고 넘어지는 일도 많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별로 띄지 않으면서 도로테아를 괴롭히는 유치한 수였다.
하지만 에단은 망설임 없이 구겨진 카펫 위로 도로테아를 끌고 올라갔다.

“카펫 위에선 스위블이나 턴이 힘드니 조심하세요.”

그는 도로테아에게 친절히 주의를 주면서도,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구겨진 카펫을 반듯하게 펴버렸다.
에단은 네레우스의 유치한 계략을 치워버린 자리에서 유려하게 걸음을 뗐다.
두 사람이 데뷔 서클에 오르자 그렇지 않아도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더욱 몰렸다.
에단은 도로테아의 손을 잡고 흘끔 주변을 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저희를 보고 있어요.”

에단이 웃으며 속삭였다.

그의 말대로 사방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테온, 줄리아도, 네레우스도, 그리고 카르넌도 두 사람에 집중하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사람들의 이목 속에 에단과 함께 움직이는 가벼운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감각을 선사했다.

“아, 마침 레이먼드 황태자 전하께서도 도착하셨군요.”

에단은 도로테아와 춤을 추면서도 레이먼드가 무도회장에 뒤늦게 입장하는 걸 용케 발견했다.
그의 말을 따라 카르넌 쪽을 보니 허겁지겁 달려온 레이먼드가 난간 근처에 자리 잡고 숨을 고르며 도로테아를 확인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듯 활짝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타이밍이 좋네요.”

에단 또한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타이밍이 좋다니?

“황녀님, 마지막으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에단의 금빛 눈동자가 다시 도로테아를 향하며 물었다.

“빛의 정령을 다루고 싶다고, 생각하신 적 있나요?”

그의 물음이 사뭇 진지했다.
그 차분하게 내리깔린 목소리와, 부드러운 음악과,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 춤에 이끌려 도로테아는 입을 열었다.

“언제나.”

도로테아는 가슴 깊은 곳에 묻어왔던 진심을 꺼냈다.
그러자 에단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 대답을 바랐어요.”

그 순간.

“꺄악!”

사방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건……!’

회귀 전에도 덮쳐왔던 어둠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도로테아의 데뷔 서클에 벌어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도로테아가 레이먼드를 부르려던 그때.

“이제 황녀님을 위한 시간이에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달콤한 속삭임.
그와 동시에 눈이 멀 듯 눈 부신 빛이 도로테아를 감싸왔다.
그리고 사방으로 폭발하듯 퍼져나가는 빛이 무도회장을 덮은 어둠을 순식간에 몰아냈다.
샹들리에의 불빛마저도 집어삼킬 정도로 밝은 빛에 드넓은 무도회장이 태양이 뜬 듯 밝아졌다.

‘빛의 정령……?’

도로테아는 커다래진 눈으로 밝아진 무도회장을 보았다.
그녀만이 아니라 무도회장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란 듯 입을 벌리고 무도회장을 둘러보더니 이내 그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도로테아는 자신의 주위를 환하게 맴도는 빛의 정령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빛은 그녀의 의지와 전혀 별개로 그녀를 휘감으며 무도회장을 뒤덮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압도적이고 화려하고 극적인 빛의 힘.

‘아니야,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야.’

당혹감에 휩싸여 고개를 들었을 때, 카르넌과 레이먼드는 놀란 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카르넌의 푸른 눈동자가 떨렸고, 레이먼드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때, 곱고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그녀를 일깨웠다.

“황녀님께선 정당한 황제가 되실 거예요.”

빛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곱게 접힌 금빛 눈동자.
그가 도로테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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