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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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테아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진 걸까?’

그와 도로테아의 관계를 두고 좋지 않은 소문이 퍼져서, 그걸 무마하려는 쇼일지도 모른다.
황실의 위신을 챙기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든가…….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훨씬 현실적으로 납득할 수 있었다.
카르넌이 진심으로 심경에 변화가 있을 리는 없으니.

‘무슨 소문인진 몰라도 불편하게 돼버렸네.’

* * *
도로테아는 한껏 가기 싫은 티를 내며 천천히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갔다.

“따라오시죠.”

기다리고 있던 로버트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하지만 그의 뒤를 따르는 도로테아의 걸음은 달팽이처럼 느리기만 했다.
카르넌과 마주하는 건 늘 껄끄럽다.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갑갑한 공기, 가시방석에 앉은 듯 편치 못한 마음, 무의미하게 오가는 대화.

그 속에서 ‘예, 예’ 대답하며 고개만 끄덕이고 나오겠지.
도로테아는 시간을 최대한 끌고 싶었으나, 결국 황제의 궁인 네세시타 궁에 다다랐다.
황제의 응접실 앞에 멈춰 서자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져서, 도로테아는 크게 심호흡했다.

“폐하, 도로테아 밀라네어 황녀님이십니다.”

“들어와.”

로버트의 보고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커다란 문이 열렸다.
도로테아는 모래주머니를 묶은 양 무거운 발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섰다.
카르넌은 넓은 테이블 앞에 앉은 채 그녀를 맞았다.

“앉아라.”

카르넌이 그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괜찮습니다, 폐하.”

앉는다는 건 시간이 길어지는 것. 도로테아는 카르넌과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앉아.”

카르넌이 두 번 명령하게 하지 말라는 듯 그녀를 보고 말했다.
황명 앞에 무기력한 도로테아는 결국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종이 그녀 앞에 술잔을 놓아 주었다. 차도 아니고 술이라니.
카르넌과 함께 술을 마셔본 적 없는 그녀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 위해 눈을 굴렸다.

그와 차를 마시는 것보다 더 불길한데.

아니나 다를까, 술잔 앞으로 카나페와 올리브, 치즈가 놓였다.
다소 본격적인 안주상에 도로테아는 하인들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시종이 카르넌과 도로테아의 잔에 레드와인을 따라주었다.
짙은 자줏빛의 액체가 빛을 받아 붉은색으로 변하며 와인 잔 안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시종은 와인 라벨이 도로테아 쪽으로 보이도록 와인병을 내려놓았다.
도로테아는 생소한 와인 라벨을 바라보았다.
<도로테아 밀라네어 12년산>
멋들어진 필기체로 쓰인 라벨의 이름에 잔을 들던 손이 멈칫했다.

‘내 이름이 왜…….’

도로테아가 놀란 표정을 짓자 카르넌이 입을 열었다.

“데뷔탕트를 앞뒀으니 이제 성인이라 해도 되겠지.”

성인?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어릴 때 와인을 빚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도로테아는 카르넌의 말에 뒤늦게 제 이름을 딴 와인의 정체를 깨달았다.

‘제 이름으로 최상급 와인을 빚어주세요.’

‘뭐……?’

‘잘 숙성시키면 제가 큰 다음에 먹을 만해질 것 같아서요.’

아주 오래전, 정원 앨리스의 고향에서 카르넌과 한 약속.
그 약속이 12년 만에 테이블 위로 올라온 것이다.

‘정말 그때 와인을 빚었단 말이야……?’

소원 같은 게 없어서 아무 이야기나 지껄인, 여섯 살의 허무맹랑한 약속이었다. 게다가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도로테아와의 약속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약속은 지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네 이름을 딴 술이니 네가 가장 먼저 맛을 봐야겠지.”

카르넌이 잔을 들자 도로테아도 예에 따라 잔을 들었다.
와인이 살짝 찰랑거리자 오일링과 함께 달콤쌉싸름한 향이 번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술에 잔을 가져다 댔다. 둥근 잔 안에 고여 있던 향기가 달콤한 파도처럼 코끝으로 밀려왔다.
그리고 곧 벨벳처럼 부드럽고도 묵직하게 스며드는 와인이 입안을 감돌며 흘러들어 왔다.
잘 숙성된 와인 특유의 기분 좋은 떫은맛과 깊이 있는 단맛이 느껴졌다.
운 좋게도 그해 포도 농사가 풍작이었는지, 와인의 품질은 퍽 훌륭한 편이었다.

‘괜찮은 와인이네.’

도로테아는 무덤덤하게 생각했다.

“오직 너를 위해 담근 와인이다. 십만 병의 와인이 네 이름을 달게 될 것이다.”

그렇구나.
그에 도로테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이 붙은 와인이 십만 병이나 되다니, 조금 끔찍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날 유모와 하인, 시종들이 다 보는 앞에서 약속을 했으니 황제로서 위신을 세우려면 약속을 지켜야 했겠지.’

그러게 그런 쓸데없는 약속은 왜 해서.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는데 카르넌이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물었다.

“기쁘지 않나?”

‘대체 어느 부분에서 기뻐해야 하는 거지?’ 카르넌이 그녀와의 약속을 지킨 건 좀 놀랍긴 했지만 그렇다고 감흥이 있는 건 아니었다.
황제로서 위신을 지키려고 약속을 지킨 것뿐인데 무슨 기쁨을 느낀단 말인가.
그가 진정 도로테아를 생각해서, 그녀를 위해 담근 것도 아닐 텐데.

도로테아는 카르넌에게 다정함을 기대할 만큼 멍청하지 않다. 이는 그녀가 평생 쌓아온 경험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형식적인 대답은 해줘야 했다.

“……기쁩니다, 폐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도로테아는 눈을 내리깐 채 예를 갖춰 말했다.

“말과 달리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군.”

“아닙니다, 폐하.”

“생각보다 와인이 입에 맞지 않나?”

“아니요, 훌륭한 와인입니다.”

“……그런데도 한 번을 웃지 않는구나.”

카르넌의 말에 도로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트집일까?
그가 형식적으로 약속을 지킨 만큼 그녀 또한 형식적으로 호응해 줬다. 그녀가 할 몫은 다 했다는 뜻이다.

“꼭 웃어야만 기쁜 것은 아니지요.”

도로테아는 단조로운 억양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 그녀가 웃든 말든 관심도 없는 게 카르넌 아니던가?

“……와인 ‘도로테아 밀라네어’는 전부 네 것이다.”

카르넌은 십만 병이나 되는 와인을 도로테아에게 전부 주겠다고 했다.

“제가 모두 갖기엔 너무 많은 양입니다, 폐하.”

십만 병이나 되는 와인을 받아 어디에 쓰겠는가.
콘베르타 궁 사람들이 배 터져라 마셔도 와인 맛이 상할 때까지 다 먹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널 위해 만든 와인이니 그 와인을 어떻게 쓸지는 네가 정하도록 해라.”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쓴 얼굴로 와인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도로테아는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와인 십만 병을 처리하라니.
선물이라기보단 일을 떠맡는 느낌에 도로테아는 그가 하사하는 와인을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쓰시지요.”

“그럼 강물에 흘려보내거나 태워버리라 하겠다.”

미쳤어?
도로테아는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폭군이던 그녀도 와인 십만 병을 그냥 버린 적은 없었다.

“그건 지나친 낭비입니다, 폐하.”

“……그러니 네가 가지란 뜻이다.”

대체 카르넌이 왜 이러는 걸까?

“저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와인을 어떻게 현명하게 처리하는지?
도로테아가 심각한 얼굴로 묻자 카르넌이 와인잔을 들던 손을 멈칫하더니 그녀를 빤히 보았다.

“하아. 넌 내가 널 시험하는 사람으로 보이느냐?”

“…….”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첫 만남에 황실의 가계도를 외워보라고 했고, 요양을 다녀오니 에피스테메 시험을 보라고 했다.
그가 도로테아 밀라네어를 찾아 무언가를 시킬 땐 늘 시험이었다.

그녀가 부정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자 카르넌이 미간을 짚었다.

“네게 주는 선물이란 뜻이다.”

“……왜죠?”

“곧 데뷔탕트가 아니냐?”

도로테아는 늦게서야 그 뜻을 알아들었다.
데뷔 축하 선물.

‘카르넌이 내 데뷔를 왜……?’

그녀는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오늘 카르넌에게 불려온 것만으로도 바짝 긴장한 탓인지 과부하가 걸린 머리는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십만 병의 와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아니나 다를까, 카르넌은 그 표정을 또 읽어내고는 말했다.

“선물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아닙니다, 폐하. 만족합니다.”

도로테아는 보란 듯이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마음에 안 들지만 안 든다고 말하면 분명 말싸움이 벌어지겠지.
도로테아는 언쟁으로 그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 * *
도로테아는 수척해진 얼굴로 돌아왔다.
카르넌과 한 시간이나 함께 있었다. 무려 한 시간!
와인 한 병을 다 비웠고, 새 병을 뜯으려는 걸 도로테아가 간신히 에둘러 저지해 사수한 마지노선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와인을 마시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엔 침묵과 대화가 반복됐다.
한 시간 동안 함께 와인을 마셨다고 해도, 실상 대화한 시간은 그 절반도 안 될 것이다.
카르넌은 별로 할 말도 없으면서 시간을 끌다가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물어댔다.
데뷔 파트너는 정했는지, 에단 브론테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래서 와인 십만 병은 어떻게 할 계획인지, 친한 귀족들은 있는지, 정령을 정말 불러내지 못하는지.

하지만 그 질문들은 전부 그의 훈계로 끝났다.
에단 브론테는 서출이다, 와인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네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 귀족들과 가까이 지내라, 정령을 부르려면 이렇게 해봐라.
도로테아는 그 앞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에게 참견 말라고 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면서.

“황녀님, 오셨어요?”

클라라는 축 늘어진 도로테아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었길래 이렇게 피곤해 보이세요?”

“별일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는 도로테아의 말끝에 힘없는 한숨이 꼬리처럼 붙었다.

“별일이 아닌데 이렇게 녹초가 되어 돌아오셔요?”

클라라의 질문에 도로테아는 카르넌과 있었던 일을 토로했다.

“와인 십만 병이요?”

“그렇다니까.”

“너무 잘된 일이잖아요? 게다가 품질도 훌륭하다면서요? 마침 데뷔탕트를 앞두고 제도에 귀족들도 많이 모였으니 한 박스씩 선물해도 황녀님께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클라라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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