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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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테아는 그의 손에 들린 편지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네레우스가 피식 웃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에피스테메에선 이런 덕목을 가르치죠. 가장 어려운 자를 도와라.”

네레우스가 푸른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파트너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분께 따스한 손길을 건네는 것이야말로 고결한 일 아니겠습니까?”

네레우스가 나긋한 목소리로 도로테아를 욕보였다.
도로테아의 주먹이 꽉 말려 들어갔다.
그때.

“이런, 우리 황녀님께서도 가장 어려운 자를 돕고 싶으시겠지만, 파트너는 이미 정해져 있으셔서요.”

도로테아의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그리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백합 향기.

“그러니 따뜻한 적선은 다른 곳에서 구걸하심이 어떨까요, 네레우스 왕자님?”

도로테아가 그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금빛 눈동자를 품은 눈매가 생긋 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도로테아는 가슴이 쿵 떨어졌다.
길게 내려뜨린 아름다운 은발, 곱게 그린 눈썹과 유려한 콧날. 큰 키에 맞는 긴 코트와 코가 날렵한 구두, 부드러운 패턴의 조끼와 검은 가죽장갑, 반듯하게 다림질된 바지까지.
누구나 시선을 빼앗길 만한.

“에단……?”

도로테아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굳었다.
사방에서 그를 보며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황녀님.”

에단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에 도로테아는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를 보았다.

“에단, 네가 여긴 어떻게……!”

도로테아는 머리가 하얘졌다.
여기는 제도 람파스고 에단이 이 시기에 올라올 일은 없었다. 아니, 공작 부부가 그를 일찍 사교계에 내놨으니 올라올 수 있으려나?
놀란 그녀와 달리 에단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어렸다.

“보고 싶었어요, 황녀님.”

에단이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눈빛으로 눈을 맞추며 나긋하게 속삭여오자, 도로테아는 찬 바람 사이에서 더위를 느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다시 다정하게 묻는 그의 목소리.
그사이 변성기가 지난 것인지, 곱디고왔던 미성이 농익어 관능적인 성숙함을 갖추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분명하게 귓가에 들려올 텐데도, 에단은 그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양 도로테아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네레우스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불청객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넌 뭐지?”

에피스테메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만약 저토록 잘생긴 학생이 있었다면 네레우스가, 아니, 에피스테메 누구든 그를 모를 리 없다.
네레우스가 날이 선 목소리로 묻자 에단이 도로테아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며 자기 쪽으로 가까이 잡아당겼다.

“도로테아 황녀님의 데뷔 파트너죠.”

에단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선언했다.

“도로시의…… 데뷔 파트너?”

그 말을 들은 레이먼드의 미간 또한 찌푸려졌다.
도로테아는 뒤늦게 오래전 에단과 한 약속을 떠올렸다.

‘황녀님께서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날, 그때 제가 황녀님을 에스코트할 수 있게 해주세요.’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약속이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에단은 당황하는 도로테아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을 맞췄다.

“절 잊으셨던 건 아니죠?”

도로테아의 눈에 눈도장을 찍듯이, 그는 도로시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내가 널 잊을 리가…….”

도로테아가 고개를 젓자 에단이 짐짓 안도의 미소를 띠었다.

“편지 한 통 없으셔서, 혹시 저를 잊으신 건 아닌가 걱정했어요.”

편지 한번 보내지 않은 도로테아를 타박하는 간사한 말이었다.
도로테아는 괜히 가슴 한구석이 찔렸다.
그래도 에단은 아나스타스 궁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가까이 지내며 자주 만났던, 친구라면 친구였다.

“너도 편지 보내지 않았잖아…….”

“황녀님이 편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요.”

에단의 시선이 레이먼드를 향했다가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그녀가 레이먼드의 편지를 모조리 무시하고 버리던 모습을 기억한 탓이다.

“혹시 약속도…… 잊으셨던 건 아니죠?”

“아, 안 잊었어.”

도로테아가 황급히 고개를 젓자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이라도 기억나셨다니 다행이네요.”

“아니야……. 기억하고 있었어.”

도로테아의 서툰 변명에 에단이 픽 가볍게 웃었다.

“거짓말.”

에단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레이먼드가 두 사람 사이를 뚝 끊어놓았다. 에단이 잡고 있던 손이 레이의 힘에 의해 떨어져 나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도로테아는 자신이 에단에게 반쯤 안겨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 브론테였나?”

레이먼드가 도로테아를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며 에단에게 물었다.
레이먼드는 에단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지독하게 아름다운 얼굴을 잊기란 쉽지 않았다.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레이먼드 밀라네어 황태자 전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브론테가의 차남, 에단 브론테입니다.”

에단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에단의 인사는 레이먼드에게만이 아니라 주위에 모여든 귀족들을 향한 인사이기도 했다.
그의 존재를 뇌리에 똑똑히 각인시키는 인사.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그의 붉은 입꼬리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을 홀리는 힘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사방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 브론테 가문 서자! 소문대로 엄청 잘생겼잖아!”

“저런 사람이 에피스테메에 들어왔었으면 좋았을걸.”

귀족들은 에단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미모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제국 전역에 퍼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네가 도로시의 파트너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비록 황녀님이 절 잠시 잊으셨지만.”

레이먼드의 물음에 에단이 사근사근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먼드가 맞느냐는 눈빛으로 도로테아를 보았다.

“응, 맞아…….”

약속도 약속이고, 네레우스와 파트너를 하느니 에단과 하는 편이 좋았다.
그때, 잠깐 무시당하던 네레우스가 보란 듯이 끼어들었다.

“너,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무시하는 거야?”

네레우스가 버럭 목청을 높이고서야, 에단은 그에게 다시 눈길을 주었다.
에단은 꽤 귀찮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압니다. 네레우스 폰스 왕자님.”

분명 예의 바른데 가시가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네레우스도 그걸 느꼈는지 미간이 구겨졌다.
도로테아는 아차 싶어졌다. 에단과 네레우스는 상극이라 만나면 안 됐는데!

“근데 지금 내가 도로테아 황녀한테 파트너를 해달라고 구걸이라도 했다는 거야? 이 네레우스 폰스가?”

“그럼 황녀님께서 왕자님께 구걸을 했겠습니까? 이미 제가 파트너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에단은 여상하게 웃으며 답하자 네레우스는 분노가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레우스는 에단에게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에 이를 빠득 갈았다.

“건방진……! 에피스테메 학생도 아닌데 어떻게 졸업식에 들어온 거지?”

네레우스의 질문에 에단은 별것 아니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제 형님께서 이번에 졸업하시거든요. 오랜 졸업시험 낙제 끝에 드디어.”

에단은 멀리 있는 조나단 브론테를 눈으로 가리켰다.
사이가 좋지 않아서인지 조나단은 에단과 엮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에피스테메는 입학이 힘든 만큼 졸업도 쉽지 않다. 그렇기에 졸업시험에서 한두 해 낙제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조나단도 낙제 끝에 뒤늦게 졸업하는 학생 중 하나였다.

“형은 입학을 했는데, 너는 에피스테메에 입학하지 못했나 보군?”

네레우스의 목소리는 비꼬는 투가 다분했다.
에단은 그런 네레우스를 보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답했다.

“에피스테메에서 배울 게 딱히 없어서요. 여기, 황녀님이 그러셨듯이.”

곱게 휜 그의 눈웃음 안쪽으로 금안이 싸늘하게 빛났다.
에단은 몇 년 전 에피스테메 입학을 앞둔 네레우스가 도로테아에게 한번 크게 깨진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에피스테메 학생들이 모인 졸업식에서 에피스테메를 무시하는 발언이 튀어나오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에단을 향한 시선들이 일제히 호의에서 분노로 바뀌자, 네레우스는 에피스테메 학생들의 시선을 등에 업고 입을 열었다.

“반반하게 생겨서 자존심도 세네. 하긴, 그래야 또 늙은 부인들이 좋아하시지.”

네레우스의 모욕적인 말에 에피스테메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에단이 싸늘하게 그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아, 아쉽게도 이런 건 못 배웠네요. 비에피스테메 출신 무시하기, 할 말 없을 때 인신공격하기, 자기 콧대 높이려고 남 깎아내리기…… 그런 거?”

에단이 쿡쿡 웃자 비아냥대던 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도로테아는 그 틈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에단과 네레우스의 사이가 나쁜 건 알았지만 에단이 대놓고 공격적인 태도로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는 에단은 아무리 고까워도 사근사근 비위를 맞춰주며 대하다가, 상대가 모르게 뒤에서 괴롭히는 전략을 썼다.
그 덕에 에피스테메 출신 귀족과도 잘 지냈고 사람들을 제 손에 꽁꽁 묶어 휘두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귀족들과 대립하다니?

“웃기는군!”

네레우스는 감히 에피스테메 입학도 못 한 서자에게 무시당하는 게 화가 나는지 이를 갈았다.

“유머러스하다는 칭찬으로 듣죠. 그나저나, 황녀님. 데뷔탕트 날 제가 황녀님을 직접 모시러 가도 될까요?”

네레우스가 한참 말싸움을 걸려는데 에단이 그를 무시하고 도로테아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마치 도로테아 외에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그러자.
퍽!
네레우스가 에단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그의 얼굴에 주먹을 갈겨 넣었다.

“에단!”

도로테아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에단은 주먹질에 고개가 돌아간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서자 출신 주제에 어딜 기어올라.”

네레우스가 에단을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흘겨보았다.

“네레우스, 그만둬!”

결국 레이먼드가 나서서 네레우스를 제재했다.
에단은 조용히 턱을 문지르더니 싸늘하게 네레우스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먹잇감의 숨통을 조이려는 뱀의 눈빛.
도로테아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했다.

“에단,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그녀는 에단의 손을 잡고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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