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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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도로테아가 열여덟 살이 되는 겨울, 레이먼드는 에피스테메를 졸업했다.

“내 졸업을 축하해 주러 온 거야, 도로시?”

갓 스무 살이 된 레이먼드가 추위에 붉어진 뺨으로 해맑게 웃었다.
그의 입가에서 새하얀 입김이 번졌다.
도로테아는 대답 대신 시큰둥한 얼굴로 그의 품에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이렇게 추운 날에 꽃이라니! 도로시, 너 꽃 꺾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

레이먼드는 꽃을 품에 안으며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코를 꽃에 파묻고 힘껏 향을 들이켜더니 활짝 웃었다.

“고마워, 도로시.”

레이먼드는 도로테아가 에피스테메까지 직접 와서 졸업을 축하해 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퉁명스러운 투가 있기는 하지만 몇 년 새, 그와 도로테아는 가까워졌다.

“드디어 이 감옥 같은 곳을 탈출하는구나. 맞다, 알고 있어, 도로시? 나 졸업생 중 32등이야!”

레이먼드가 뿌듯해하며 말했다.
도로테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적이었다.
그는 졸업 직전까지 성적이 쭉쭉 올라 졸업생 중 32등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회귀 전에는 50등 내에 단 한 번도 들지 못했고, 졸업 땐 등수를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는데.

“뭐, 테온에 비하면 내 성적은 하찮지만.”

레이먼드는 웃으면서 단상에 나가 있는 테온을 보았다.
그는 수석졸업생으로서 졸업장 대표 수여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로테아도 테온을 바라보았다.
지적이고 진중한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되어 그의 흰 피부가 도드라졌다.

‘키가 저렇게 컸었지…….’

스무 살의 테온은 오랜만이라 그의 큰 키가 낯설었다.
그는 어느새 교수들보다도 키가 커져 있었다.
한참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테온의 눈이 도로시와 마주쳤다.
도로테아가 움찔하자 테온이 싱긋 웃었다.
프리디아에 다녀온 후, 도로시는 테온이 서먹해진 반면 테온은 오히려 도로테아에게 다정해졌다.
좋은 걸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적당한 거리의 친구로 남은 것은.

‘행운…… 이겠지.’

도로테아가 테온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데,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런데 저쪽 되게 소란스럽다. 다들 데뷔탕트 파트너를 구하고 있나 봐.”

레이먼드의 시선은 어느새 도로테아 뒤쪽에 모여 있는 사람 무리로 향해 있었다.
빵가루에 들러붙은 개미들처럼 바글바글 모인 젊은 귀족 자제들은 꽤 소란스러웠다.
에피스테메 졸업식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제국 우베라에서 열리는 가장 큰 데뷔탕트는 늘 에피스테메 졸업식이 끝나고 봄이 오면 진행됐다.

사교계에 정식 데뷔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에피스테메를 졸업하고 난 이들도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이 관례다.
데뷔탕트 무도회는 그 해 데뷔하는 이들만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다.
데뷔탕트는 연중 열리는 무도회 중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다.

내로라하는 귀족과 유명인사들이 주목하고, 젊은 귀족들은 좋은 배우자감을 물색하거나 새로운 인맥을 만들 수 있다.
젊은 귀족들에게는 1년 중 가장 큰 행사로 꼽히는 이벤트인 것이다.
때문에 에피스테메 졸업식은 데뷔탕트 파트너를 구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데뷔탕트 전에 젊은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큰 행사는 이 졸업식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도로시, 너도 올해 데뷔잖아.”

레이먼드는 다시 도로테아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도로테아도 올해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제국 우베라의 귀족들은 보통 열여섯에서 열여덟 살쯤에 데뷔한다.
회귀 전, 도로테아는 파트너를 구하지 못해 평균보다 조금 늦은 열여덟에 데뷔해야만 했다.

‘그때 내 별명이 사교계의 광견, 악동 따위였으니, 파트너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도로테아는 회귀 전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 속 데뷔탕트는 썩 유쾌한 행사는 아니었다. 데뷔탕트에서 좋았던 건 오직 테온과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는 것뿐.
그것만 빼면 전부 별로여서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도로시, 데뷔 파트너는 정했어?”

레이먼드가 묻자 도로테아의 시선이 무의식중에 테온에게로 향했다.
테온은 이미 줄리아의 데뷔 파트너가 되어주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회귀 전, 데뷔탕트에서 함께 파트너로 섰던 테온이 줄리아의 곁에 있다는 게.

‘하지만 이게 옳은 거겠지.’

이전 생이 틀린 거고.
그녀는 회귀 전에 마주했던 사람들의 시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로테아 옆에 있는 테온을 측은하게 보았다.
어쩌다 그런 궂은일을 떠맡게 되었냐는 듯한 눈빛.
그리고.

‘솔직히 도로테아 황녀가 성격만 얌전했어 봐. 좋아하는 사람이 한둘이었겠어? 황제 폐하가 아무리 버려놨어도 황녀에다 저 얼굴인데.’

‘그게 문제지. 얼굴만 보고 첩이나 정부로 삼기에는 너무 거만하고 콧대가 높잖아. 정치적으로 봐도 너무 위험해.’

도로테아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귀족들이 테온에게 하던 말을 들었다.
귀족들은 도로테아를 두고 무엇 하나 걸리지 않는 게 없다고 했다.
그들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당시 도로테아는 적을 만들고 다닌다고 할 만큼 인간관계가 좋지 못했다.
그런 도로테아와 가까이 지낸다는 건, 도로테아와 사이가 안 좋은 대부분의 귀족, 그리고 황태자 레이먼드까지 적으로 돌리는 셈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도로테아는 화가 났다.
그녀는 성마른 숨을 씩씩 뱉으며 그들에게 욕을 퍼부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내 파트너를 욕하고 싶은 거면 그만둬.’

도로테아가 나서려는 순간 귀족들과 함께 있던 테온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도로테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내 파트너……?

‘이야, 그래도 자기 파트너라고 감싸는 거냐? 항상 생각하지만 넌 진짜 매너가 좋아. 타고난 성인이다.’

‘그러게, 레이먼드랑 친해서 네가 고생이다. 그나마 오늘 좀 얌전하셔서 다행이지. 와인 탑이라도 깨부술까 봐 얼마나 걱정했다고.’

귀족들은 웃으며 테온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순간 도로테아는 가슴이 욱신거렸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사람. 악취가 나서 아무도 곁에 두지 않으려는 쓰레기.
그리고 테온은 남들을 대신해 그 쓰레기를 치우는, 착한 청소부.
정말 아무도, 날 원하지 않나?
도로테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악착같이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때.

‘고생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

테온이 그들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먼드와 친구인 그는 아마도 도로테아를 두둔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 파트너를 욕하는데 가만히 있을 만큼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도로테아는 멍청했다.
내가 원해서. 나를 원해서.

그런 말이 너무 간절해서, 가슴이 뛰어버렸다. 마음이 저릿저릿해졌고, 참던 눈물이 터져서 소매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그게 파트너를 위해 차린 최소한의 예의인 줄도 모르고 사랑에 빠졌다.
테온은 그날, 끝까지 상냥했다.
도로시와 억지로 파트너를 한 티를 단 한 번도 내지 않았고, 도로테아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다정한 사람은. 도로테아 밀라네어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어주는 사람은.

하지만 도로테아는 그렇게 따뜻했던 사람을 차갑게 식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파트너 없어도 괜찮아.”

도로테아는 건조하게 말했다.
그러자 레이먼드가 마치 자기 일인 양 화를 냈다.

“무슨 소리야! 데뷔에 어떻게 파트너가 빠질 수가 있어? 파트너 신청 아직 못 받았어?”

“응.”

“믿을 수가 없어! 다들 네가 올해 데뷔한다는 걸 모르는 거 아니야?”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

“그래도, 첫날부터 네 파트너가 되려고 신청서가 몰려들어야 정상이라고.”

명색이 제국의 황녀다.
아무리 힘없고 소외된 황녀라고 해도 밀라네어 가문은 결코 무시할 만한 가문이 아니다.
도로테아는 멸시당해도, 밀라네어는 강하니까.
만약 이번 무도회에서 도로테아와 연이 잘 닿아 혼인까지 하게 되면 장차 황실의 일원이 될 수도 있는 법.

“이렇게 예쁜 널 가만히 두다니, 내가 가족만 아니었으면 당장 네게 파트너 신청을 했을 텐데!”

“진정해, 레이먼드.”

도로테아는 호들갑 떠는 레이먼드를 차분하게 말렸다.
그때였다.

“아직 파트너를 구하지 못하셨나요, 도로테아 황녀님?”

도로테아의 뒤에서 들려오는 오만한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네레우스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엔 오늘 받은 것으로 보이는 두툼한 파트너 신청서가 들려 있었다.
대놓고 ‘나 파트너 신청 많이 받았다’라고 자랑하는 모양새.

“오랜만이네요. 네레우스 왕자.”

도로테아는 수년 만에 만나는 그에게 인사했다.
그는 여전히 재수가 없었다.

“만약 아직 파트너를 구하지 못하셨으면 제가 파트너가 되어드릴까요, 황녀님?”

네레우스는 콧대를 높이고 물었다.
도로테아가 자신의 제안에 감지덕지하며 매달리기를 기대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도로테아는 도도한 그의 얼굴을 여상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파트너를 이렇게 막 결정하는 건 좋지 않죠.”

“하하, ‘막’이라니요. 그래도 황녀인데, 자신감을 가지세요.”

네레우스가 웃었다.
수많은 영애로부터 파트너 신청을 받은 그였다.
정령도 못 다루는 도로테아에게 과분한 급이기는 했지만…….

“아니요, 제가 네레우스 당신과 하기 싫다고요.”

도로테아는 으스대는 그를 보며 살짝 미간을 구겼다.
물론 네레우스를 파트너로 데려간다면 데뷔탕트에서 무시당하진 않을 것이다.
여러모로 짜증 나는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귀족들 가운데 평판이 좋은, 훌륭한 파트너였다.
일국의 왕자며, 성적도 우수하고, 외모도 그럭저럭 준수하고, 게다가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는 정령까지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듯한 파트너 하나 얻자고 데뷔탕트 내내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화려하게 데뷔해 봤자 어디다 쓴다고.
도로테아의 거절에 네레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보다 좋은 파트너는 구할 수 없을 텐데요?”

네레우스가 비뚜름하게 입술을 비틀며 되물었다.
불쾌함, 그럼에도 잃지 않는 우월감, 고집스러운 자존심.

“그렇게 잘나셨으면 다른 좋은 분이랑 파트너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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