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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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쁜 황녀님을 누가 가만히 두겠어!’

그중 경계 대상 1호는 바로 저 테온 프리드였다!
황태자 전하의 벗을 핑계 삼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저 도련님!
침착하고 얌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황녀님한테 관심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늘 도로시를 자상하고도 면밀하게 살피는 그 눈빛이 그 증거였다.

‘만약 아무 마음이 없었다면 프리디아로 초대도 하지 않았을걸!’

클라라의 눈이 이글거리자 도로시는 웃음을 터뜨렸다.
프리디아로 초대한 건 테온이 아니라 레이의 작전인데.

“걱정하지 마, 클라라. 테온은 내게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까. 내게 잘 대해주는 건 그냥 레이의 동생이라서 오빠처럼 생각해 주는 거야.”

도로시는 그렇게 말하고 스스로 놀랐다.

‘테온이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렇게 편하게 내뱉을 수 있게 되다니.’

시간이 약이라던 옛말이 옳았던 걸까?
한편 도로시의 말에 클라라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아휴, 우리 황녀님 이렇게 순진하셔서 제가 마음이 놓이겠느냐고요!”

클라라는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가는 법이라며 열변을 토하더니 이번엔 타깃을 슈테판으로 바꾸었다.

“슈테판 기사님! 황녀님을 남자랑 단둘이 있게 해선 안 돼요! 절대 사수하셔야 한다고요!”

클라라의 불타는 눈빛에 슈테판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이, 너도!”

“넵!”

클라라는 슈테판의 옆에 종자로 붙은 조이에게도 당부했다.
조이는 슈테판 덕분에 그를 모시고 보조하는 종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아직 정식 기사는 아니지만 시동 교육을 오래 받지 못한 평민이 벌써 종자 자리를 얻은 건 엄청난 일이었다.

“클라라는 걱정이 너무 많아.”

“세상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열여섯 살짜리 자기 딸이 다른 남자 집에 며칠씩이나 놀러 간다고 하면 걱정이 되나 안 되나!”

클라라는 허리춤에 손을 떡하니 얹고는 도로시에게 화를 내듯 말했다.
그러자 슈테판과 조이도 옆에서 고개를 격렬히 끄덕였다.

“그냥 다른 영지 둘러보러 간다고 생각해.”

“휴, 그래도 레이먼드 전하와 함께 가시니까 저도 이렇게 보내 드리는 거예요.”

그제야 클라라가 도로시를 놔주었다.
슈테판과 조이가 짐을 실었고, 레이가 도로시를 불렀다.

“정말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클라라도 걱정하지 말고 나 없는 동안 좀 쉬고 있어.”

도로시는 클라라에게 인사한 뒤 마차에 올랐다.
슈테판도 능숙하게 말 위에 올랐고, 조이는 짐마차 뒤쪽에 재빠르게 탑승했다.

“다녀올게!”

도로시의 인사와 함께 마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프리디아, 테온의 고향으로 향했다.
* * *
마차는 점점 더 짙은 안개 속으로 향해 갔다.
등불에 겨우 의존해서 나아가야 할 만큼 짙은 안개는 마치 구름 속을 헤엄쳐 나가는 기분이 들게 했다.
드문드문 벌레 우는 소리와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스산했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새하얀 백지 같은 땅.

“멋있다.”

안개밖에 보이지 않는 풍경을 보며 레이가 말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윤곽을 지운 흐릿함이 경이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가 안개를 만져보려 밖으로 손을 내밀려 하자 테온이 그를 말렸다.

“손 내밀면 위험해.”

빠르게 달리는 마차 밖으로 손을 내밀면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나뭇가지나 장애물에 손을 다칠 수도 있었다.

“거의 다 왔어.”

테온은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을 손님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자욱한 안개 너머로 흐릿한 검은 윤곽이 드러났다.
낮게 깔린 안개 때문에 검은 성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차가 가까이 가자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성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사방이 탁 트임과 동시에 걷힌 안개와 구름 사이로 내리쬔 빛이 높은 탑을 비췄다.
평지에 여러 건물로 넓게 지어진 황궁과 달리, 프리디아의 성은 여러 개의 탑이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하얀 지붕, 성을 타고 오른 푸른 담쟁이덩굴, 그리고 구름 사이로 뜬 무지개.

뒤쪽으로 펼쳐진 산세와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아서, 도로시는 햇빛에 물든 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지난 생에 만났던 프리디아의 성은 잿빛의 어둡고 우울한 곳이었다.
희뿌연 안개는 도로테아의 불확실성만 더해주었고, 축축한 흙은 발을 땅 밑으로 끌어내릴 듯 불쾌했고, 테온이 굳게 걸어 잠근 문은 소외감만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의 프리디아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그동안의 안개가 마치 아름다운 미술품을 보여주기 위해 쳐둔 장막이었던 것처럼.
마차가 성 앞에 멈추고 테온이 먼저 내렸다.
레이가 내리고, 도로시가 뒤를 따라 내리려 하자 테온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로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을 잡고 마차의 계단을 내려왔다.
촉촉한 프리디아의 땅이 폭신하게 발에 닿았다.
그리고 테온이 다정하게 미소했다.

“프리디아에 온 걸 환영해요, 황녀님.”

* * *

“두 분이 날이 좋을 때 오셨군요. 프리디아가 이렇게 맑게 개는 날은 1년에 많지 않거든요. 역시 빛은 늘 밀라네어를 반기는 모양입니다.”

테온의 어머니인 프리드 대공은 두 사람에게 프리디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며 기뻐했다.
대공은 프리드 성을 직접 소개해 주고 레이와 도로시가 지낼 방을 안내해 주었다.

레이의 방이 한 층 위, 도로시의 방이 그 아래였다.

“높은 성이라 오르내리기가 불편하시겠지만, 그만큼 전망은 훌륭할 겁니다.”

이곳 성에서는 더 높은 곳에 있는 방일수록 더 높은 사람을 모신다고 했다.
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맑은 만큼 멀리 안개가 깔린 땅과 높은 산맥과 마을과 숲과 호수가 보였다.
과연 황궁에서는 느낄 수 없던 풍광이었다.
탁 트인 풍경은 도로시의 가슴까지 트이게 했고, 눈앞으로 보이는 무지개는 경이로웠다.
도로시는 삶을 두 번째 사는데도, 아직 새로운 게 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황실의 미래인 두 분을 모시는 건 제 영광이죠. 그럼 식사 전까지 편히 쉬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종을 울리면 됩니다.”

대공은 침대 옆에 붙어 있는 끈을 가리켰다.
도로시가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대공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대공이 나가기가 무섭게 짐을 들고 있던 조이가 후다닥 창가 쪽으로 달려갔다.

“와아!”

프리디아의 풍경을 보며 조이가 소리쳤다.
평소엔 늘 도로시를 살피는 슈테판의 눈동자도 지금만큼은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엄청 멋져요!”

“그러게.”

도로시도 조이의 말에 수긍했다.

“황녀님을 모시는 거, 정말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조이의 말에 도로시는 생각에 잠겼다.
이전에 나를 모시던 하인들과 신하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늘 눈치를 보며 아첨만 일삼던 자들이나, 아니면 그녀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비판을 하던 자들이나.
황제 도로테아 밀라네어를 모시는 걸 좋다고 생각한 이가 하나라도 있었을까?
몇 번을 생각해 보아도 도로테아를 모시는 걸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궁의 하인들도 그녀를 모실 때면 손을 덜덜 떨곤 했는걸.

‘다행이야…….’

내 곁에서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건 감사한 일이었다.
이번 생은 그래도 조금, 잘하고 있나 봐.
도로시는 조이를 보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 날도 날이 맑았다.

테온은 레이와 도로시에게 호수를 보러 가자고 했다.

“낚시! 낚시도 할 수 있어? 나 낚시해 보고 싶은데.”

“물론. 개울 쪽에서는 그물도 칠 수 있어.”

“갈래! 나 갈래!”

“넌 좋아할 줄 알았어, 레이.”

테온이 웃었다.
숲이든 들이든 바닷가든 레이는 한번 풀어놓으면 하루 종일 놀 수도 있을 것이다.
테온의 시선은 다시 도로시에게 흘러왔다.

“황녀님은 어떠세요?”

테온은 도로시가 낚시를 좋아할지 모르겠어서 조심스레 물었다.

“……나도 갈래.”

도로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사실 낚싯대를 넉넉히 준비해 두었거든요.”

테온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가볍게 준비를 마친 그들은 마차에 올라 호수로 향했다.
성에서도 훤히 내려다보이던 호수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에는 호숫가에 자란 나무와 그 뒤로 펼쳐진 산맥의 굴곡이 그대로 비쳐 마치 두 개의 세계가 마주 보는 듯했다.
물고기를 잡으려는 어부들의 낚싯배가 지나가면 수면이 흔들리며 나무와 산맥이 일렁였다.
하인들이 낚싯대를 준비해 주자 레이가 가장 먼저 받아 들었다.

“미끼는 내가 직접 끼울게.”

레이는 설레는 듯 낚싯대를 들더니 날카로운 낚싯바늘 끝에 하인들이 준비한 지렁이를 꿰었다.
지렁이가 꿈틀대는데도 텃밭을 가꾸는 취미가 있던 그는 전혀 징그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인들이 낚시를 던지는 법을 알려주자 레이는 금세 능숙하게 따라 했다.
퐁당, 낚시찌가 빠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낚싯대를 드리웠을 뿐인데 레이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황녀님도 해보시겠어요?”

즐거워하는 레이를 보며 테온이 도로시에게 여분의 낚싯대를 들어 보였다.
테온의 자상한 제안에 도로시는 고개를 젓지 못하고 끄덕였다.
테온의 손에서 건너온 낚싯대를 받아 든 도로시는 긴장한 탓에 어쩔 줄 모르며 얼어붙었다.

“미끼는 제가 끼워 드릴까요?”

“응? 으응…….”

지렁이를 만지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도로시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응’이라는 말밖에 못 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테온은 그런 도로시를 보고 웃으며 능숙하게 미끼를 끼워주었다.

“이리 오세요. 제가 알려 드릴게요.”

테온이 그녀를 호숫가로 이끌었다.
도로시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이끌리듯 그의 손길에 이끌려 레이 옆쪽에 섰다.
눈이 빠지도록 찌를 바라보고 있는 레이를 옆에 두고 도로시의 온 신경은 테온에게로 향해 있었다.

“이렇게 뒤로 빼셨다가, 손에 힘을 풀면서 던지고 잡으면 돼요.”

도로시는 그가 가르쳐 준 대로 낚싯대를 뒤로 젖혔다.

“아악! 황녀님!”

긴장한 도로시가 어찌나 힘껏 뒤로 젖혔는지 미끼로 낀 지렁이가 튕겨 나가 뒤에 있던 조이에게로 날아갔다.

“미안,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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