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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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황제 폐하를 설득하는 건 실패했지만 결국 내가 도와줘서 해냈잖아.”

“안 돼.”

도로시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거절하자 레이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레이가 치사하다며 중얼거리자 도로시가 그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평소와 달리 무척 부드럽고, 또 망설임이 비쳐서 레이는 기대했다.
저 눈빛이라면 아마 포옹 정도는 해줄지도 몰라.
이 일을 하면서 얼마나 우애가 돈독해졌는데!
레이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내민 도로시의 손.

“고마워.”

도로시가 눈을 내리깐 채 레이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포옹은 아니고, 악수.
이번 일은 레이가 아니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테니까 이 정도는…….
도로시는 잠깐의 악수 후에 손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레이는 한번 제 손에 들어온 도로시의 손을 놓치지 않고 꽉 붙잡았다.
그리고 확 잡아당기는 힘에 도로시는 레이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레이……!”

“나도 고마워, 도로시.”

흐뭇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지 못하며 레이는 도로시를 꼬옥 끌어안았다.
도로시는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거 놔, 멍청아!”

사람들도 있는데 창피하게 무슨 짓이야……!
테온도 보고 있고, 줄리아도 있는데!
하지만 아무리 밀어내도 단단하게 잠긴 레이의 팔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레이는 원래 힘만 센 바보인 데다가, 도로시가 검술 훈련을 안 해서 약해진 탓이다.

“도로시. 네가 내 동생이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

품에 안긴 탓에 레이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도로시는 입술을 감쳐 물었다.

“네가 그러니까 바보 소리를 듣는 거야.”

“하하, 맞아. 나는 태생적으로 바보인가 봐. 바보 소리를 들어도 그냥 이게 좋아.”

사람 마음도 모르면서 레이는 참 태평하게도 웃었다.

이거였을까? 마지막에, 네가 나를 죽이지 못한 이유가.
그 마음을 내가 칼로 도려낸 걸까?
도로시는 뒤늦게 생각했다.
진짜 바보는 레이가 아니라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고.
* * *
그리고 얼마 뒤, 에피스테메 여름 방학을 바로 앞둔 어느 날, 레이와 테온이 함께 도로시를 찾아왔다.

“도로시! 이것 봐! 이것 보라고!”

레이가 도로시를 찾으며 달려왔다.
그의 손엔 에피스테메에서 치른 상반기 평가 고사 성적표가 들려 있었다.

“봐! 50등 안에 들었어! 49등이야!”

도로시는 레이가 자랑스럽게 내민 49등 성적표를 받아보았다.

“봐, 내가 해낸다고 했지?”

그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도로시에게 말했다.

‘내가 다음에 올 때는 꼭 에피스테메 평가고사 50등 안에 들어서 올게.’

오래전 별궁에서 그녀에게 했던 약속.

‘진짜 했네…….’

회귀 전엔 50등 근처에도 가본 적 없던 레이가 이번 생에서는 해냈다.

“너와 한 약속 꼭 지키려고 얼마나 열심히 했다고!”

레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약속한 지가 언젠데……. 너무 늦었잖아.”

도로시는 무심하게 대답하면서도 안도했다.
이런 레이라면 정말 괜찮은 황제가 되겠지.
따뜻하고 밝고, 뭇 백성에게 사랑받을 성군, 황제 레이먼드 밀라네어.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잘했지?”

레이는 맑은 눈동자로 도로시를 보았다.
도로시는 그 눈동자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러자 레이가 재촉하듯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래, 잘했어.”

도로시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리고 시선이 닿은 곳은 레이와 함께 온 테온이었다.

“테온, 너도 어서 자랑해.”

“레이.”

레이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테온이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쑥스러워하기는. 도로시, 테온은 몇 등 했는지 알아?”

레이가 물었다.
도로시는 테온의 등수를 알고 있었다.
1등. 테온은 에피스테메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될 것이다.

“무려 일……!”

“레이!”

레이가 테온의 등수를 공개하려는데 테온이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부끄럽다니까!”

“왜애! 자랑스러운 성적인데! 나였으면 성적표 들고 제도 한 바퀴 돌았을걸?”

두 사람은 저들끼리 티격태격하면서 싸웠는데, 그 모습이 퍽 즐거워 보였다.
도로시는 처음 보는 테온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저런 모습도 있었구나.
저렇게 밝고 장난스러운 모습도.

“이것 봐. 황녀님이 웃으시잖아.”

테온이 작게 속닥거리며 레이의 팔을 툭 때렸다.

“아니야, 웃긴 게 아니라 좋아 보여서…….”

도로시는 서둘러 테온의 부끄러움을 덜어주었다.

그냥 이런 시간이 좋았다.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평범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이가.
그러자 레이와 테온이 다시 한 차례 아웅다웅하다가 레이가 테온을 도로시 쪽으로 툭 밀었다.
그에 테온이 잠시 레이를 쳐다보았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황녀님, 혹시 괜찮으면 이번 여름에 프리디아에 놀러 오시겠어요?”

전혀 상상해 본 적 없던 제안에 도로테아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온이 나를 초대한다고?’

“에피스테메 졸업이 얼마 안 남았기도 하고 해서 레이도 오기로 했거든요.”

테온의 다정한 말에 놀랐던 도로시는 테온의 어깨 너머에 서 있는 레이를 발견했다.
레이가 두근두근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레이가 먼저 꺼낸 얘기구나.’

도로시와 함께 여행을 가고 싶은데 본인이 제안하면 들어주지 않을 테니, 테온을 이용한 것이다.
레이의 전략은 잘 들어먹혔다.
테온과의 여행이라는 소리에 도로시의 가슴이 벌써 두근거리기 시작했으니.
들뜬 가슴을 진정시키고 싶은데 감정이 이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프리디아는 놀기 좋은 곳은 아니라서……. 혹시 황녀님께서 괜한 고생을 하시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해요.”

“테온……!”

도로시를 잘 구슬리다가 갑자기 단점을 고백하는 테온에 레이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하면 도로시가 절대 넘어오지 않잖아!
레이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무언의 의미를 전했다.
도로시가 다 보고 있는데도.

“하지만 긴 여행이 될 텐데 아무 얘기도 없이 황녀님을 모실 순 없어, 레이.”

테온이 진지하게 말하자 두 사람이 다시 입을 벙긋거리며 옥신각신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로시가 입을 열었다.

“알아. 프리디아가 어떤 곳인지.”

도로시의 말에 두 사람은 무언의 언쟁을 멈추고 도로시를 보았다.

“알아?”

“책에서 읽었어. 얘기도 많이 들었고.”

프리디아. 테온의 고향. 프리드 대공가의 영지.
비가 자주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고, 호수는 고요하고, 높은 나무는 태양을 가리는 곳.
물기 어린 공기가 무겁게 깔린 습한 흙길 위로 짐승의 발자국이 찍히는 곳.
음습하기로 유명한 프리드의 땅은 휴가지로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도로시는 일전에, 그러니까 회귀 전에, 테온을 데리고 그의 고향을 가본 적이 있었다.
혹시라도 고향에 가면 그의 기분이 좋아질까 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언제나처럼 무용지물이었다.

도로시는 나아지지 않는 그의 모습에 전전긍긍했고, 그 때문에 프리디아의 풍광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내가 가도 괜찮겠어……?”

도로시가 테온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같이 갔다가 혹시라도 테온의 기분이 안 좋아져서, 즐거운 여행을 망치면 어쩌지?
레이가 졸라서 억지로 데려가는 거면, 내가 눈치 없게 끼어드는 거면…….

“황녀님께서 오신다면 환영이죠.”

걱정 가득한 도로시를 향해 테온이 웃었다. 가슴이 찌릿찌릿하도록.
그의 허락에도 도로시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리고 고민 끝에 대답했다.

“……가도 된다면, 가고 싶어.”

“와아……! 큼큼!”

도로시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이가 만세를 부르다가 재빨리 점잖은 체했다.
도로시는 괜히 가겠다고 했나 다시 걱정했다.
어쩌면 가지 않는 게 맞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또 테온을 욕심부리는 거 아닐까?
분명 프리디아 귀족인 줄리아도 함께 갈 텐데.

‘그래도 레이도 같이 가고……. 이건 그냥 여행인 거야.’

도로시는 여행을 너무 가고 싶은 나머지 자신을 설득했다.

‘이번 여행만 다녀오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직까지 테온에게 미련이 남는 건, 그와 제대로 시간을 보내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번도 허락된 적 없는 것을 향한 사랑의 찌꺼기.

‘그래. 이게 마지막이야.’

혼자만 아는 이별 여행, 그것은 기나긴 짝사랑의 끝으로 좋을 것 같았다.
* * *

“조심하셔야 해요, 황녀님!”

클라라는 조바심을 내며 도로시를 배웅했다.
그녀는 먼 길을 떠나는 도로시를 무척 걱정했다.

“걱정하지 마, 클라라. 그냥 테온네 집에 놀러 가는 거로 생각해.”

“하지만 프리디아는 무서운 늑대들이 산다고 들었어요. 혹시라도 숲을 지나다가 늑대를 만나면……!”

“슈테판도 같이 가잖아.”

“그러니까 기사님 옆에 꼭 붙어 계셔야 해요. 떨어지지 마시고요.”

“알았어, 클라라.”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걱정이 참 많았다.
도로시가 정말로 작별하고 마차에 오르려는데 클라라가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황녀님!”

또 뭐가 걱정인가 싶어 돌아보자 클라라가 마차에 타려고 준비 중인 테온 쪽을 쳐다보더니 도로시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른 늑대도 조심하세요.”

클라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테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도로시의 나이 열여섯.
클라라는 완연한 숙녀의 모습이 되어가는 도로시를 떠나보내는 게 걱정이었다.
게다가 외간 남자의 성으로 가다니!
클라라의 예민한 반응에 도로시가 웃었다.

“그럴 리 없어, 클라라.”

“남자들 속은 모르는 거예요! 봐요. 황녀님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레이디를 누가 가만히 놔두겠어요!”

클라라는 그동안 도로시가 사교 활동을 너무 안 해서 남자들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황녀님은 아직 순수하시단 말이야!’

만약 도로시가 무도회나 젊은 귀족들이 모이는 사교 클럽에 드나들었다면 분명 그녀의 주위로 남자들이 날파리 떼처럼 몰려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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