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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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황녀님이라면 분명…….”

테온은 말을 잇다가 내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레이와 달리 그는 꽤 눈치가 빠르고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직 어린데도 ‘침묵’이라는 프리드의 가풍이 벌써 몸에 밴 모양이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테온과 대화하고 싶었는데, 하필 에피스테메 이야기가 나와서…….
나는 그와 함께 있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다른 주제를 찾으려 애썼다.

“오늘 날씨가…….”

“테온, 대공 전하가 부르셔!”

하지만 미처 주제를 찾기도 전에 줄리아가 그를 불렀다.

“아, 죄송해요. 황녀님. 대공 전하께서 부르셔서. 이따가 다시 봬요.”

테온은 프리드 대공의 부름으로 서둘러 줄리아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래.”

나는 멀어지는 테온의 등에 대답했다. 그에겐 들리지도 않을 소리로.
테온이 곁을 떠나자 어쩐지 더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 없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사람.
원래부터 그랬지만.

‘그냥 들어가야겠어.’

나는 먼저 들어가겠다고 얘기하려고 카르넌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몰래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곳의 예의란 것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폐하.”

내가 카르넌을 부르자 카르넌의 곁에 있던 귀족 하나가 뒤를 돌아보다 나의 팔을 쳤다.
그 바람에 테온이 건네준 석류 주스가 내 옷에 쏟아지고 말았다.
붉은 물이 내 하얀 드레스를 흥건히 적셨다.

“오, 황녀님!”

“……도로테아.”

기분이 기분인지라 짜증이 나려는데 카르넌이 차갑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도로테아. 사과드려라.”

“예?”

설마 내 잘못이라는 거야?
나는 황제에게 되묻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조차 잊고 말대꾸를 해버렸다.
다른 사람이 내 주스 잔을 쳐서 내 옷이 더러워졌다.
나는 가만히 있었고, 뒤로 돌아보던 상대가 나를 치는 바람에 테온이 준 주스가 쏟아졌다.
그런데 어디다가 사과를 하라는 거야? 더러워진 내 옷한테? 아니면 하필 그 자리에 있던 내 존재한테? 아니면 예의 차리겠다고 원치도 않는 인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던 과거의 나에게?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카르넌이 이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를 친 사람은 브론테 공작이었다. 브론테 공작은 카르넌에게 중요한 손님이었다.
내가 에피스테메에 돌을 던졌다가 일주일간 금식을 당한 것도 브론테의 장남이 맞았기 때문이다.

대단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살면서 몇 번 볼까 말까 하는 황녀보다는 공작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신다는 뜻.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카르넌의 판단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에 이해했다.

“폐하, 도로시는…….”

“죄송합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레이가 옆에서 끼어들려고 했지만, 나는 기꺼이 사과했다.
그까짓 사과가 뭐가 어렵다고. 착하게 살기로 했잖아.
옛날 같았으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항변했겠으나, 이젠 무의미한 싸움이 질리기까지 했다.
카르넌이 이러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까.
속상하고 억울하고 서운하게 생각해 봤자 다치는 건 나뿐이다.
그냥 이건……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야.

“황녀님, 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대화 중에 함부로 끼어든 제 실수죠.”

분수도 모르곤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던 위대한 황제 폐하와 공작 각하 사이에 끼어든 내 잘못이에요.
내가 나빴어요. 나는…… 나쁜 사람이니까.

“로버트. 황녀의 옷이 더러워졌으니 유모에게 들여보내.”

카르넌이 보좌관 로버트를 불렀고, 이곳에서 내보내라고 시켰다.
꼭 더러운 쓰레기를 고결한 장소에서 치워내듯이 휙 한 번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
나는 비어 있는 주스 잔을 꽉 쥐었다.
테온이 줬던 주스가 쏟아져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 정말 익숙한데 오랜만에 당하니까 좀 힘드네.
로버트는 나의 등을 토닥이며 연회장 밖으로 안내했다.

‘차라리 잘됐어. 들어갈 구실이 생겨서.’

나는 그렇게 스스로 되뇌며 로버트를 따라 덤덤히 돌아섰다.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연회장 한쪽에 함께 서 있던 테온과 줄리아와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걱정과 동정 어린 그들의 시선.
그 순간 얼굴에 뜨겁게 피가 쏠렸다.
분명 닳고 닳은 감정으로 담담하게 넘길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 두 사람이 보고 있었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한없이 부끄러워져서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어졌다.
나는 바로 방으로 도망쳐 올라왔다.
보좌관이나 유모도 필요 없이 방에 홀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테온의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테온.’

나의 추한 모습을 보지 마.
내 부끄러운 모습을 보지 마.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를 걱정하지도 마.
주스 한 잔이 붉은 사랑을 가득 채웠다가, 다시 나를 더럽히는 감정으로 엎질러졌다.
문을 걸어 잠근 나는 주스에 젖은 드레스를 끌어안고 웅크려 앉았다.
주스를 옷에 엎지른 것도, 카르넌한테 그런 취급을 당한 것도, 자존심을 굽히고 사과한 것도 그전까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테온의 눈빛 한 번에 뒤집혔다.
나는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에 옷자락을 꽉 쥐었다.

‘내가 싫어.’

테온과 안 될 거란 것을 알면서도, 그를 이미 한 번 불행에 빠뜨렸으면서도 그의 눈빛 하나에 몸도 마음도 흔들리는 내가 너무 싫어.
우습게도 그의 앞에서만큼은 완벽한, 아름다운,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카르넌에게 인정받고, 파티장에서 근사한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는 황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싫었다.
그에게 아직도 그런 모습만 보이고 싶어 하는 내 감정이.
게다가, 그의 곁에 선 줄리아를 깊이 질투하는 나의 나쁜 마음이.

‘테온이 날 사랑하는 일은 없다는 걸 알잖아.’

그에겐 여전히 줄리아가 있고, 나는 여전히 도로테아였다.
테온을 위해 역사에 길이 남을 화려한 궁전을 지어주고, 가장 향기로운 정원을 만들어주고, 어디서도 본 적 없던 진귀하고 아름다운 새를 선물하고,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옷과 보석을 선물해 주고도 얻지 못했던 사랑.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으로도 돌릴 수 없던 마음.

‘그런데 뭘 기대하고 있는 거야?’

답은 이미 나와 있는데 미련한 미련이 모르는 척 자꾸 억지를 부렸다.
놓아야 해. 테온을 놓아야.
하지만 그가 건넨 주스가 남긴 얼룩은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때.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

“도로시, 괜찮아?”

그리고 정말 바라지 않던 목소리.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걱정되어서 왔어. 있잖아, 폐하께서는…….”

“날 좀 내버려 둬, 레이!”

나는 귀를 틀어막으며 문을 향해 소리쳤다.

오늘의 주인공인 그가 왜 연회장을 빠져나와 내 방까지 올라온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레이는 포기하지 않고 문에 대고 큰 소리로 물었다.

“파티는 재미없어. 그러니까 도로시, 우리 같이 놀까?”

그의 말에 결국 간신히 참고 있던 감정이 폭발했다.
나는 쾅쾅 소리가 나도록 걸어가 거칠게 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다.

“재미없다고 이렇게 빠져나와도 되는 자리가 아니야! 황태자면 황태자답게 행동해! 놀 생각만 하지 말고 해야 하는 일이나 제대로 하란 말이야!”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레이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입술을 떨었다.

“나는 그러니까…… 도로시가 걱정돼서…….”

“네 걱정 따위 필요 없어!”

그러니까 내게 관심 끄고 제발 사라져.

“황녀님…….”

그때, 한쪽에서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고개를 돌리니 복도에 테온과 줄리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순간 심장이 시커먼 무저갱으로 떨어졌다.
테온과 줄리아가 여기 왜…….

“테온이랑 줄리도 같이 놀려고 왔는데…….”

레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을 열자마자 레이에게 쏘아붙이느라 미처 그들이 있는 걸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놀란 표정의 두 사람을 보며 다시 문 안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아니야. 네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이런 것들이 아니야.
그러나 나는 그들 앞에 어떤 변명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들로부터 도망치듯 다시 문을 쾅 닫고 걸어 잠갔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리가 어지러워 문 앞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테온은 이제 날 뭐라고 생각할까?’

제 아버지인 황제에게도 멸시받고, 황태자에게도 감히 신경질을 부리는 무례하고 성격 나쁜 사람. 그 외에 다른 게 있을까?
나는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몸을 웅크렸다.
이런 주제에 감히 사랑받을 생각을 하다니.
나조차도 내가 이렇게 미운데, 누가 날 좋아하겠어.

자신이 잘못해 놓고 눈물이 터졌다. 우는 내가 더 미워져서 나는 더 몸을 작게 웅크리고 세상으로부터 나를 숨겼다.
* * *
나는 그날 이후 며칠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감기는 아닌데 열이 나고 몸이 아팠다.

“원래 건강하신 분인데…….”

“그날 일이 황녀님께 충격이 컸나 봅니다.”

진찰을 온 의사가 말하며 ‘워낙 똑똑하신 분이니까요’ 하고 작게 덧붙였다.

“푹 쉬시면 며칠 내로 나을 겁니다.”

의사는 내게 해열제를 처방하고 떠났다.
겨우 그런 일로 앓아눕다니. 너무 한심하고 나약해서 또 내가 싫어지려 했다.

“황녀님, 심심하시면 제가 책을 가져다드릴까요?”

유모는 그런 내 기분을 좋게 하려고 애썼다. 나 같은 애를 돌보려고 애쓰는 유모에게 미안해졌다.

“유모, 유모도 다른 궁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때?”

“예?”

“여기 일은 힘들잖아. 다른 하인들도 잠깐만 왔다가 가고, 나머지는 전부 유모 몫이고.”

“힘들다니요? 이곳처럼 편한 자리는 없어요. 황녀님처럼 똑똑한 분을 모시는 게 얼마나 행운인데요.”

유모는 내가 물건을 어지르지도 않고 투정을 부리지도 않아서 할 일이 너무 없다고 웃었다.

“그러니까 좀 어지르고 투정도 부리세요, 황녀님. 황녀님은 너무 어른스럽고 모든 걸 다 혼자 하려고 하세요.”

유모가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여덟 살이면 이제 제법 컸다고 생각했는데도 유모의 손이 퍽 크게 느껴졌다.

“어지르고 투정 부리면 유모가 귀찮아지잖아.”

“그런 일을 하려고 제가 여기 있는걸요.”

“짜증 날걸.”

말은 저렇게 해도, 내가 투정 부리고 어지르고 귀찮게 굴면 곧 화를 낼 것임을 나는 잘 알았다.
사고 안 치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 내 유모를 하고 있는 거겠지.
사람도 없고 쓸쓸한 이 콘베르타궁에서 혼자 애를 보며 잡다한 일까지 해내기란 쉽지 않을 텐데 굳이 그 위에 힘듦을 더해주고 싶진 않았다.

“난 착하게 살 거야.”

굳이 나쁜 어린이를 자처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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