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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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지만 황녀님께서는 충분히 도움을 주셨는걸요……!”

이미 장례에 관해서 도로시에게 큰 도움을 받은 터라 클라라는 더 도움을 받기가 미안했다.

“황녀님께서 클라라의 가족은 자신의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족. 그 말에 결국 클라라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고작 하녀였다.
게다가 도로시는 또래에 비해 지나치게 성숙하고 범접하기 힘든 벽이 있어서, 클라라는 도로시가 자신을 아직까지 멀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언젠가 내게 마음을 열어주시겠지. 활짝 웃으시겠지.

그런 마음으로 도로시를 정성껏 모셨다.
나아가 엄마나 큰언니가 된 마음으로 아꼈다.
클라라에게 ‘하녀’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렇지만 도로시가 이렇게까지 해줄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리 내가 황녀님을 아껴도, 황녀님께 나는 하녀니까.

보통 귀족 가운데서도, 하녀의 가정사를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일은 드물었다.
휴가를 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클라라는 도로시를 돌봐야 하는 자신이 되레 돌봄을 받는 것 같았다.
* * *
우베라의 풍습상 장례는 일주일에 걸쳐 치러졌다.
멀리서 오는 손님들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클라라는 깊은 상심과 피로 속에서 손님들을 맞았다.
장례식을 찾아온 손님들은 한결같이 입구에 놓인 화환을 보고 놀라며 멈춰 섰다.
까막눈이 보기에도 화려한 화환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이들은 그보다 한층 더 놀랐다.
화환에 적힌 황족의 이름, 도로테아 밀라네어.

“황실에서 일하더니 출세했네.”

“황녀님을 직접 모신다잖아.”

“자식을 잘 두니까 죽어서도 호사로군.”

장례식을 찾은 이들은 클라라의 부친이 딸의 덕을 본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장례식 둘째 날.

아버지의 곁을 지키던 클라라는 바깥이 소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
조문객이 드문 늦은 시간에 떠들썩해지는 게 이상해서 클라라는 잠시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목격한 것은 황실의 마차였다.
마차에서 내린 도로시와 그 뒤를 따르는 슈테판, 그리고 조이와 포 등 도로시가 머무는 콘베르타궁의 사람들.
클라라는 너무 놀라 밖으로 달려 나갔다.

“황녀님!”

“너무 늦은 시간에 와서 미안해, 클라라. 사람 많은 시간에 오면 민폐일 것 같아서.”

도로시는 장식이 없는 검은 원피스와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늘 기사복을 입고 있던 슈테판도 검은 정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클라라는 또 목이 메어서 눈가가 시큰거렸다.

“왜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정말……!”

클라라는 고마운 조문객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도로시를 타박했다.
고마운데 너무 지나치게 고마워서 감당하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이걸 대체 어떻게 갚으라고.
마를 줄 모르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도로시가 조용히 그녀를 안았다.
도로시의 키는 어느새 커져서 클라라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러자 클라라는 도로시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귀한 손님을 밖에 세워두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 * *
간신히 눈물을 정리한 클라라는 뒤늦게 도로시 일행을 안으로 들였다.
헌화와 기도를 마친 후 클라라는 도로시 일행을 조문객을 위해 마련한 방으로 데려갔다.

“황녀님 덕분에 준비가 수월했어요.”

클라라는 쉰 목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즐거운 웃음은 아니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편해 보였다.

“그런데 다른 가족들은 없이 혼자야?”

도로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클라라가 망설이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입술을 떼었다.

“아니요, 오빠가 하나 있어요. 그런데 손님을 맞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아버지의 장례식인데 장남이 손님을 맞기 어렵다니.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자 클라라가 어렵사리 다시 사정을 말했다.

“다리가 불편하거든요. 시간이 늦었으니 지금은 아마 잠들었을 거예요.”

클라라는 굳게 닫힌 어느 방을 가리켰다.

클라라는 아버지가 거동이 불편한 오빠의 수발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도로시와 함께 별궁에서 제도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의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다.
그 후 오빠와 아버지는 서로가 서로를 수발드는 상황에 이르렀다.

몸이 성하지 않은 두 가족 때문에 클라라가 집안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병자만 둘. 돈을 벌어오는 건 딸 하나.
클라라의 임금이 결코 적은 게 아닌데도 살림이 빡빡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도로시는 늘 밝던 클라라에게 이런 사정이 있는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의 가정사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는 남의 가정사를 캐묻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클라라의 집안이 어떤지, 슈테판의 집안이 어떤지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도로시는 자신의 무심함이 후회됐다.

“얘기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어떤 식으로라도 클라라가 집안일에 집중할 수 있게 배려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아니에요. 제가 좀 못돼서…… 집에 들어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클라라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농담을 가장한 그녀의 말투가 되레 처연했다.
황궁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다시 병자를 수발들어야 했다.
그것도 성인 남성 둘을 여자 혼자서.
지저분한 집구석을 내내 청소하다가 내일 먹을 식사를 준비해 놓고 처리하지 못한 용변이 묻은 옷을 빨아놓고.

그런 집이 싫어서 도피하듯 황궁에 더 오래 남아 있었다.
차라리 도로시와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즐겁고 행복했다.
집에 들어가기를 지독히 싫어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돈을 벌지 못했으면 다 같이 굶어 죽었을걸. 약도 못 지어 먹었을 거야.
하지만 이제 와서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다.

아버지도 오빠도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때, 두 사람이 아픈 걸 알면서도 그득히 쌓인 집안일에 짜증을 부렸던 때, 아픈 두 사람을 곁에 두고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때.
그 순간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라 괴로웠다.

그렇게 고개를 툭 떨구고 있는데, 클라라의 어깨에 묵직하게 위로를 전하는 손길이 얹어졌다.

슈테판이었다.
그는 도로시를 토닥였던 것처럼 클라라의 어깨를 몇 번 더 토닥이며 말없이 그녀를 위로했다.
충분히 잘해왔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클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황녀님 덕에 아버지의 마지막은 남부럽지 않게 모셔서 좋은 딸이라는 소리를 듣네요.”

클라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거두려 애쓰며 말했다.

“클라라는 좋은 딸 맞아.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도로시의 말에 클라라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지만 다행히 눈물은 참아냈다.
그때 삐그덕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방 안쪽에서 한 사람이 다리를 끌며 바닥을 기어 나오고 있었다.

“오빠!”

“클라라……. 손님이 오신 거 같아서.”

클라라의 오빠는 나름대로 예의를 갖춘다고 구겨진 검은 재킷을 헐렁하게 걸치고 있었다.
누워 있다가 일어난 듯한 부스스한 더벅머리는 눈을 가릴 정도였고, 턱에는 오랫동안 정리하지 못한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클라라는 당황한 눈으로 도로시와 슈테판을 살폈다.

“오빠, 그냥 자지 왜 나왔어!”

클라라는 오빠를 타박했다.
사실 그녀는 오빠를 일부러 소개하지 않으려고 했다.
오빠를 남들 앞에 보이는 게, 특히 황녀님 앞에 보이는 게 싫어서였다.
적어도 클라라가 아는 한 장애인을 환대하는 이는 없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으면 부모의 부덕함을 욕했고, 장애인을 이웃으로 둘 수 없다며 나가라고 성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는 그는 나이를 먹도록 돈도 벌지 못하고 가정을 꾸리지도 못했다.
그에게 ‘자립’이라는 것은 평생 허락되지 않았다.
클라라는 그런 오빠를 황녀님 앞에 내보이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슈테판.”

도로시가 부르자 슈테판이 그녀의 눈빛을 냉큼 알아듣고 달려가 클라라의 오빠를 부축해 자리로 데리고 왔다.

“아, 손님께 실례를……!”

클라라의 오빠는 초면에 도움을 주는 슈테판에게 주눅이 들어 사과했다.
클라라는 오빠를 외면하려고 애썼다.
평소에는 오빠와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이런 순간이 오면 클라라는 고개를 숙이곤 했다.
지금껏 오빠와 함께 있을 때면 고개를 숙여 버릇해 왔으니까.

“오빠, 예를 갖춰서 인사드려. 이분은 황녀님이시란 말이야.”

클라라는 얼결에 도로시와 마주 앉게 된 오빠를 타박했다.
그제야 그는 도로시의 정체를 알고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화, 황녀님이신 줄 몰라뵈었습니다! 클라라의 오빠 되는 안톤입니다.”

“그러지 말고 일어나요. 나는 문상을 온 거지 황녀 대접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에요.”

도로시의 말에 안톤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상심이 크겠어요.”

“황녀님께서 이렇게 친히 조문을 와주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도로시의 심심한 위로에 안톤이 놀라며 말했다.
화환을 보내준 것만으로도 믿기지 않았는데 황녀가 직접 오다니!

“클라라의 일인걸요.”

“크, 클라라를 이렇게 챙겨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황녀님에 대해서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똑똑하고 아름답고 뭐 하나 부족함 없이 완벽하신 분이라고…….”

“그건 아니지만…….”

도로시는 안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칭찬에 어색하게 웃었다.

“클라라는 제게 더없이 소중한 사람예요. 가족이기도 하고요.”

도로시는 안톤과 클라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클라라가 얼마나 좋은 하녀였는지, 도로시가 클라라를 얼마나 가족처럼 생각하는지 얘기했다.
일부러 아버지에 대해서나, 앞으로 삶은 어찌할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클라라 덕분에 제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어요.”

“황녀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우리 클라라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안톤은 집 안에 있는 동안은 듣지 못한 클라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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