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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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는 도로시의 똑똑함을 깨닫고 대단하다고 했지만, 테온은 도로시가 다른 면에서 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에피스테메 시험에서 어떻게 0점을 받을 생각을 할까?
설령 0점을 받는 발칙한 상상까지는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걸 실제로 실천하다니.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다 일부러 틀린 건데 왜 그랬지?”

“글쎄…….”

“설마 나랑 같이 다니기 싫어서 그런 걸까?”

레이가 픽 바람이 빠진 것처럼 의기소침해졌다.

“그럴 리는 없어.”

“하지만 도로시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레이는 도로시와 관련된 일이라면 자신이 없어졌다.
늘 밝고 쾌활하고 걱정 없어 보이는 레이가 도로시 앞에서는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볼품없이 축 처졌다.

“아마…… 다른 이유에서일 거야. 그리고 황녀님이 네 꽃다발도 받아줬다면서. 싫었으면 받지도 않았을걸.”

“정말 그럴까?”

“응.”

“그럼 테온, 이따가 정령 일 끝나고 같이 도로시 보러 갈래?”

레이는 0점을 받은 도로시를 축하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테온은 도로시의 붉은 눈두덩이와 충혈된 눈, 그리고 빨갛던 뺨을 떠올렸다.

“아니, 오늘은 도로시 황녀님을 혼자 두는 게 좋겠어, 레이.”

도로시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내게 정령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테온은 도로시에게서 주제를 돌려냈다.
오늘 그가 레이를 만나러 이곳까지 방문한 이유였다.

“아, 맞아! 그래서, 최근엔 어때? 정령들이 예전처럼 말썽을 부리지는 않는 것 같던데.”

“……일단 억제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테온이 답했다.
프리디아에서 온 편지 덕분에 갑작스럽게 정령이 발현하는 일까지는 막을 수 있었다.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두려워하는 일은 사라졌다.
이젠 날아가던 나비가 갑자기 떨어지거나, 쥐의 사체가 발견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어둠의 정령을 계속 억누르면 네 몸만 상하게 되잖아.”

강제로 정령의 발현을 억누르면 정령의 힘은 테온의 안에 고이기만 한다.
문제는 어둠의 정령의 힘이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그의 생명력을 깎아먹는다는 것.

“내가 고서에서 도움이 될 만한 걸 읽었거든. 이리 와.”

레이는 테온을 데리고 자신이 황실 도서관 구석에서 발견한 책을 펼쳤다.
묵은 먼지 냄새가 나는 그 책을 펼치니 햇살 사이로 뿌연 먼지가 번졌다.

“내가 요즘 에피스테메 시험 기간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다니까.”

레이는 자랑스럽게 말하며 책의 앞부분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금세 그가 찾던 부분을 발견해 테온에게 내밀었다.

“초대 밀라네어와 프리드에 관한 내용이야. 두 사람이 정령 왕과 피의 계약을 맺은 부분.”

테온은 그가 가리킨 부분을 읽어보았다.
밀라네어가 빛의 정령 왕과 피의 계약을 맺고 소원을 하나 빌어 태양을 창조했고, 프리드가 어둠의 정령 왕과 피의 계약을 맺고 소원을 하나 빌어 지나치게 뜨거운 태양을 벗어날 밤의 장막을 드리웠다는 이야기.
테온이 이게 대체 무슨 큰 발견이냐는 듯이 레이를 보자 그가 그 아랫줄을 가리켰다.

“그게 아니라 여기, 빛과 어둠은 태초에 하나였고, 밀라네어와 프리드는 서로의 힘을 억제하며 균형을 맞췄다고 되어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널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

“네가?”

“어쩌면 빛의 정령이 그 힘을 상쇄시켜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가 힘의 균형을 잡는 거야.”

레이가 테온을 보며 눈을 빛냈다.
* * *
클라라와 조이, 포가 도착한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조이와 포가 황궁에 들어오는 재가 절차를 거치고 이것저것 처리를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탓이었다.
도로시는 아직 뺨의 부기가 빠지지 않은 상태로 그들을 맞았다.

“아니, 황녀님! 얼굴이 왜 그래요?”

클라라는 오랜만에 도로시를 보자마자 놀라 달려왔다.

“가벼운 사고가 좀 있었어.”

도로시가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라 클라라는 슈테판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말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휴, 저 기사님께 뭘 기대하겠어. 입을 단단히 꿰매둔 사람인걸.’

클라라는 포기했다.
별궁인 아나스타스궁보다 더 큰 궁전을 보고 놀라던 조이와 포도 도로시의 뺨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황녀님도 맞을 수 있어……?”

포가 충격적인 표정으로 조이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 같기만 했던 도로시가 뺨을 맞다니.
대체 누가 황녀의 뺨을 때리지?

“장난치다가 실수로 다친 거야, 포.”

도로시가 포에게 웃으며 설명했다.
아아, 그럴 수는 있지. 그런데 완벽해 보이는 황녀님도 실수를 하시는구나.
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두 사람은 내 궁에서 지낼 거야. 공간만 바뀌었다 뿐이지 별궁에서 지낼 때처럼 지내면 돼. 단 여긴 넓으니까 함부로 다른 궁전으로 나가지 말고.”

“네!”

“황실 예법도…… 좀 더 배워야겠다.”

“더요?”

조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훨씬 더 엄격해. 자칫 실수하면 목이 달아날 수 있어.”

도로시가 봐주었던 별궁과 달리 여기는 황제가 있는 궁이다.

“특히나 콘베르타궁 밖에서는 책잡히는 일이 없어야 해.”

도로시의 궁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로시가 처리할 수 있지만, 그 외의 장소에서 문제가 생기면 도로시가 보호해 주기 어려웠다.
도로시의 경고에 두 사람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시는 조이와 포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이곳에 내 사람들이 있다는 느낌이었다.

“일단 피곤할 테니까 가서 씻고 쉬어. 클라라도.”

도로시의 궁전은 바쁠 필요가 없었다.
* * *
그 이후로 도로시는 몇 번 별궁에 내려가려고 기회를 보았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대신 콘베르타궁에 지급되는 예산이 이전보다 늘었다.

‘도망칠 생각 말고 여기 있으라는 뜻인가?’

예산 따위로 바뀔 마음이 아닌데.
카르넌의 속은 알 수가 없었다.
도로시는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카르넌과 마주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전과 달리 카르넌은 도로시에게 더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쓸데없는 사담을 나누거나, 티타임에 초대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도로시를 챙기거나, 생일날이 되면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분명 날 더 멀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왜 신경도 쓰지 말라고 말하니까 관심을 갖는 거지?
청개구리 같은 카르넌의 행동에 도로시는 그가 그녀를 괴롭히려고 이러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때문에 도로시는 그를 마주치면 재빨리 그의 시야 밖으로 도망갔다.
예전과 달라진 눈빛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도로시는 대부분의 시간을 없는 사람처럼 지냈다.
딱 자신의 영역 안에 틀어박힌 채 큰일이 있지 않는 한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슈테판과 클라라가 있었고, 조이와 포가 있었다.
도로시는 자신만의 성벽을 높게 쌓고 문을 걸어 잠근 채 그 안에서 지내는 것에 만족했다.

이따금 레이가 도로시를 찾아오기도 했다.
몇 번의 부딪침 끝에 레이는 점차 눈치가 생겼다.
도로시 앞에서 에피스테메 이야기를 꺼내거나, 도로시의 재능을 펼치지 않는 이유를 묻거나, 어디 나가자고 조르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레이는 도로시의 기분이 괜찮을 때 가끔 테온과 함께 놀러 오기도 했다.

두 사람은 무척 절친해서 에피스테메에서도 찰싹 붙어 다니기로 유명했다.
회귀 전,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략적인 결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이였던 테온이 도로시에게 등을 돌린 시발점도 레이였다.
도로시가 그의 친우인 레이를 살해했기 때문에.
도로시가 레이를 죽이고 황제가 된 후 테온은 그녀를 원수 보듯이 했다.
증오, 경멸, 무시와 분노.
도로시가 이번 생에서 레이를 꼭 살리고 싶은 이유 중 하나가 그 때문이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도로시를 만나면 테온은 늘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왔다.
아마 카르넌에게 뺨을 맞았던 걸 기억하기 때문이리라.

그녀의 안부를 살피는 테온의 차분한 시선은 도로시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의 골격은 거의 성인의 것과 같았고 키는 어른들 틈에서도 큰 편에 속했다.
어린 시절부터 진중했던 그의 붉은 눈동자는 마치 잘 숙성된 적포도주처럼 뭇 숙녀들을 매료시킬 빛을 띠었다.

“요즘은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그는 한없이 다정해서 거리 두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테온을 거절하는 건 도로시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예전처럼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온 세상이 흔들리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를 보면 들뜨고 설레는 건 여전하지만 동시에 적당히 체념하는 데 익숙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은 날들이 줄어들고. 그의 죽음을 떠올리는 날이 드물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 그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채워졌다.
그래. 이렇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도로시는 점차 여유가 생기고, 과거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중이었다.

“그래도 도로시가 있으니까 정말 좋다. 황궁에 혼자여서 조금 심심했거든.”

도로시가 머무는 콘베르타궁에 놀러 오는 게 익숙해진 레이는 새삼스레 말했다.

“심심하기는. 바쁘면서.”

“바쁜 거랑 그 심심한 거랑은 달라.”

레이는 도로시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그 탓에 도로시는 레이가 찾아와도 매몰차게 쫓아내지는 않았다.
레이가 찾아오는 걸 가만히 두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면, 조이와 포가 레이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별궁에서 도로시랑 친하게 지냈다고?”

“화, 화, 황태자님!”

“황태자 저하야, 포……!”

“조이, 너도 틀렸어. 저하가 아니라 전하야.”

조이와 포는 복잡한 황실 예법을 가끔 헷갈려서 도로시가 바로잡아 줘야 할 때가 있었다.
조이와 포는 마치 레이를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존재로 여겼다.
사람 좋고 착한 레이는 그 두 사람을 티 타임에 끼우는 걸 거리끼지 않았다.

“이리 와. 내게 아나스타스궁에서의 얘기를 들려줘.”

예전부터 레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황태자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위엄도 없고 벽도 없고 카리스마도 없는 사람.
그래서 사회적인 장벽까지도 허물어서 사람을 흐물흐물 풀어지게 하는 사람.
도로시는 그걸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기질이 황태자, 그리고 장차 황제의 역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조금은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도로시는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레이의 저 밝음을 질투했던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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