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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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형 답안도 에피스테메 교수들 사이에서 상당히 논란이 인 모양입니다.”

로버트가 도로시의 답안을 카르넌에게 보여주었다.
문제에서 요구하는 분량과 형식을 완벽하게 맞춘 답안지는 점수가 매겨져 있지 않았다.
차마 점수를 매기지 못한 것이다.
그 내용을 훑어보던 카르넌의 미간이 점점 더 구겨졌다.
진리를 묻는 질문에 에피스테메를 우물 안 개구리로 비유하며 비판했고, 소설 속 인물의 고뇌를 묻는 질문에는 현실 인물의 고뇌에 이토록 절박하게 함께 고민한 적 있느냐고 물었다.

글 자체의 수준은 뛰어나지만 채점 기준이 될 항목들을 빗겨 나간 데다가 내용 면에서도 에피스테메 교수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을 리 없었다.
감출 것 없는 반항이었다.

“도로테아를 불러와.”

카르넌이 신경질적으로 도로시의 답안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잠시 뒤, 도로시가 그의 방으로 불려 왔다.

“부르셨어요.”

도로시는 이미 자신이 왜 여기 불려 왔는지 아는 얼굴이었다.

“에피스테메 시험,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보겠나?”

“시험을 치르라 하셔서 최선을 다해 치렀습니다.”

“최선?”

“예, 폐하.”

태연한 도로시의 대답이 카르넌을 화나게 만들었다.

“이게 네 최선이냐! 모든 문제를 틀려 에피스테메 역사에 없던 0점을 만든 게!”

카르넌이 그녀의 답안지를 바닥에 던지듯 뿌리며 소리쳤다.
하얀 종이가 거칠게 펄럭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로시는 떨어지는 자신의 답안지를 여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잘된 일 아닙니까? 대단한 에피스테메에 종전에 없던 새 기록을 세웠는데.”

카르넌이 화를 내는데도 도로시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차분했다.

“내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는 척하지 마라, 도로테아. 황실의 위신을 생각하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저는 에피스테메 시험을 치는 동안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다만 그 노력의 방향이 폐하의 지향점과 달랐던 모양이죠.”

도로시는 쓰레기처럼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시험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로시는 저 답안지가 나름대로 ‘도로테아답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했다. 다만 최선을 다해 고른 것이 오답일 뿐.
전에 없던 악명으로 에피스테메 역사에 길이 남겠지. 우베라 역사에 악명을 떨친 폭군처럼.
카르넌은 무상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깐 채 서 있는 도로시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어떤 감정도 없어 보였다.

“넌 대체 날 뭘로 생각하느냐?”

“위대하신 제국 우베라의 황제 폐하십니다.”

“또한 네 아비이기도 하지.”

카르넌이 미간을 구기며 덧붙이자 도로시의 표정이 움찔했다.
하마터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을 뻔했다.

“아버지…… 라고요?”

“뭐라고?”

“폐하께선 진정 제 아버지이길 바란 적이 있으신가요?”

도로시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였다.
한 번도 카르넌을 아버지라고 느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으니까.

“폐하께선 정령을 불러내지도 못하는 절 애물단지처럼 생각하시지 않았습니까?”

“뚫린 입으로 함부로 지껄인다고 말이 되는 건 아니다, 도로테아.”

“제 생일은 아십니까?”

도로시가 물었다.
그러자 카르넌의 표정이 쓰게 굳어졌다.

“……안다. 똑똑히 기억해.”

“아…… 제 생일이 황후 폐하의 기일이기도 했죠.”

도로시가 웃었다.
도로시의 생일, 그리고 황후 앨리스의 기일.

그래서 도로시는 생일을 단 한 번도 축하받지 못했다.
죽음과 함께 태어난 아이였기 때문에.
어머니를 죽이고 그 피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아이였기 때문에.
도로시는 세상에 나온 첫날부터 어미와 아비 손에 단 한 번도 안기지 못했다.

카르넌에게는 딸의 탄생보다 부인의 죽음이 더 중요했다.
회귀 전에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레이먼드의 생일날에는 저토록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고 선물을 쌓고 웃어대면서, 왜 나의 생일엔 모두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가.
왜 아버지는 내게 작은 꽃 한 송이조차도 주시지 않는가.
유모는 도로시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어머니인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신 날이라 그래요.’

얼굴 하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의 죽음.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그녀의 탄생을 애도했다.
하지만 도로시가 나쁜 사람이라서 그랬을까?
그녀는 자신의 생일을 채운 어두운 비탄이 싫었다.
도무지 어머니의 죽음을 다른 이들만큼 슬퍼할 수 없었다.
아니, 어머니가 죽은 게 슬픈 것보다, 나를 축하해 주고 신경 써주는 사람이 없는 게 더 슬펐다.

초상화로만 만나본 어머니한테 느끼는 감정이라곤 유모들보다 못한걸.
차라리 사랑보다는 원망이 더 큰걸.
도로시는 어린 마음에 그 죽음보다 자신의 탄생을 더 기뻐해 주길 바랐다.
슬프겠지만 그래도 나를 한번 봐주면 안 돼? 나는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데.
그렇게 떼를 쓰고 투정을 부리면 도로시에게는 분노와 비난의 화살이 돌아왔다.
철없고, 못된, 무정한, 이기적인 아이.
그게 도로테아였다.

“그날 폐하께서는 제가 죽고 어머니가 살기를 바라셨을 거예요.”

도로시는 카르넌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이 태어나던 황후의 기일. 당신은 나를 제물로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황후를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카르넌은 부정하지 못했다.
의사가 사랑하는 여인과 배 속의 아이 중 누구를 살리고 싶냐고 묻는다면 단연 아이를 죽이고 부인을 택하리라.

카르넌이 나쁜 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선택을 했다.
어쩌면 도로시도 그런 선택을 할지 몰랐다.
회귀 전, 테온의 목숨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아이의 목숨 중 하나만 살리라고 묻는다면 자신도 테온을 선택할 것 같았으니까.
그러므로 도로시는 수긍했다.
모든 건 카르넌의 잘못이 아니었다. 자신이 탄생의 순간부터 잘못 태어났을 뿐이다.
비탄의 땅에서 눈물로 피어난 싹. 잘못 뿌리 내린 씨앗.

“지금도 절 보며 가끔 그런 생각을 하시죠? 제가 죽고 어머니가 살아 돌아왔으면 좋았을 거라고.”

그에 카르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솔직하게도.
뭐,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카르넌과 마주하고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느껴졌으니까.

“너, 어디서 그런 말을…….”

“수년 전 제가 납치당했을 때, 차라리 죽기를 바라셨나요?”

찰싹!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가 돌아갔다.

“어디 말을 함부로 하는 거냐……!”

카르넌의 목소리가 떨렸다.
속이 끓는 듯, 그리고 자신이 상처를 받은 듯한 얼굴.
도로시는 그런 카르넌의 눈빛에 심장이 칼에 그이는 듯했다.
차라리 끝까지 남처럼 무정하게 굴지, 왜…….
붉어진 뺨보다 다른 곳이 더 아팠다.

“……저는 그때 폐하께서 쉬셨던 한숨 소리가 아직도 들리듯 생생해요.”

마치 자신은 그런 적 없다는 듯이 결백한 눈을 하고서는, 도로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그가 미웠다.

“폐하께서는 제가 납치당했던 일을 없던 일처럼 입단속하셨죠. 황실 체면에 부끄러워서.”

처리할 일이 하나 늘었다는 듯한 그 한숨과 표정이 아직도 선명해.
분명 너무 지치고 아파서 정신이 흐렸는데, 그것만큼은 지나치게 또렷하게 기억이 나.

“그건……!”

도로시는 카르넌이 내뱉은 말의 뒷말을 기다렸다.
제 손으로 때린 딸의 붉어진 뺨을 내려다보면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하지만 그 뒤의 말은 더 나오지 않았다.

“저를 한 번 안아준 적은 있으신가요?”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아홉 살짜리 딸에게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준 적 없잖아.
머리를 한 번 쓸어주거나 포옹을 한 번 해주는 일도 없었잖아.

“도로테아 밀라네어.”

“그렇게 부르시지 않아도 돼요. 밀라네어라는 이름이 축복처럼 느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차라리 평범하게 태어났다면 황제가 되겠다는 꿈, 레이를 향한 열등감, 아버지의 무관심 따위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밀라네어라서, 더러운 혈관에 어울리지 않는 고귀한 피가 흘러버려서…… 그래서 맞지도 않는 꿈을 꿨잖아.
밀라네어의 자격도 없으면서 진짜 밀라네어라고 착각했었잖아.

“그러니까 이제 밀라네어라고 억지로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원치도 않으면서 겉치레하느라 주요 행사나 예식에 부르실 필요도 없고요.”

분명 찔리는 것 하나 없는데, 너무 당연해서 무뎌진 이야기인데, 어째서인지 도로시의 목소리가 떨렸다.
도로시는 새삼 목소리가 떨리는 게 싫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도로시는 빨개진 뺨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고, 카르넌의 허락이 떨어지기를 잠시 기다리다가 그냥 그 자리를 나와 버렸다.
카르넌의 방문이 닫혔고, 도로시는 고개를 숙인 채 성큼성큼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었다.
후련했다. 카르넌에게 하고 싶던 말을 다 쏟아부어서.
‘착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지만, 카르넌은 이제 어쭙잖게 밀라네어를 들먹이며 그녀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조금이나마 붙어 있던 정도 다 떨어졌겠지.

‘잘됐어.’

도로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땅으로 떨어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카르넌에게 맞은 뺨이 너무 아픈 탓이다.
칼에 베인 것보다 더 아파서…….
그녀는 빨갛게 물든 뺨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도로시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문밖에서 도로시를 기다리고 있던 슈테판이었다.

“슈테판……!”

그를 본 도로시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감췄다.
지금 모습은 너무 창피해.
슈테판은 입을 꾹 다문 채 도로시를 바라보더니 그녀를 안았다.
그의 너른 품에 파묻히자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가슴까지 파고드는 온도에 도로시는 참고 있던 감정이 터지고 말았다.

“슈테판…… 나 별궁으로 돌아가고 싶어. 더는 여기 있고 싶지 않아.”

도로시는 눈물을 참으려 애쓰며 울먹였다.
그녀는 슈테판이 자신을 여기서 데리고 나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그러자 슈테판이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어.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전부 그만두고 싶어.”

결국 도로시는 완전히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슈테판의 가슴을 축축한 눈물로 더럽히면서, 도로시는 어린애처럼 펑펑 울었다.
슈테판은 그런 도로시를 꽉 안은 채 등을 토닥였다.
그녀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늘 그랬듯이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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