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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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넌의 알현이 끝난 뒤, 도로시는 보좌관을 따라 몇 년 전 그녀가 머물던 궁전으로 향했다.
이 황궁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몫이었던 작은 궁전, 콘베르타궁.
황궁에서도 가장 외지고 낡은 콘베르타궁은 도로시에겐 애증의 장소였다.
그녀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곳이었지만, 동시에 감옥 같았다.
도로시는 그 낡은 건물을 바라보았다.
분명 집으로 돌아온 것인데도 숨이 막혔다.

“도로시!”

감옥 앞에 다다랐을 때, 감옥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해사한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

레이는 도로시를 보자마자 단번에 달려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도로시는 레이의 품에 쏙 들어 안겼다.

“이거 놔.”

도로시가 레이를 힘껏 밀어내자 그가 해죽이 웃었다.

“팔도 다 나았네!”

“언제 적인데.”

그날 이후로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하는 걸까?

“키는 좀 작아진 거 같은데?”

“네가 큰 거야.”

도로시가 부루퉁하게 답했다.
나름 쑥쑥 컸다고 생각했는데 레이가 더 빨리 크는 모양이었다.
에단도 그렇고 레이도 그렇고 다들 어쩜 그리 자라나는 새싹이신지.
나중에 성년이 되어서도 도로시는 키로 그들을 이기진 못했다.
미워하는 오빠를 평생 올려다봐야 하는 건 꽤 불쾌한 일이어서 도로시는 레이보다 키가 커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지금은…… 다행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지만.

“그리고 이거!”

도로시가 레이를 보며 생각하는데 레이가 준비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환영 선물이야.”

도로시는 얼결에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노란 장미와 흰 장미가 섞인 밝은색의 꽃다발은 레이와 잘 어울렸다.
도로시는 자신이 꽃다발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레이가 꽃다발을 들고 있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거 굳이 준비할 필요 없어.”

“장미 싫어해?”

“날 위해서 꽃을 꺾을 필요 없단 뜻이야.”

“아아……. 꽃을 꺾는 걸 싫어하는구나! 멋있다! 그럼 다음엔 다른 걸 고민해 봐야겠다.”

레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음에 무슨 선물을 받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뭐 갖고 싶은 것 없어?”

“아무것도.”

도로시는 그를 무시하고 지나쳐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도로시의 무심한 반응에도 레이는 마치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도로시의 뒤를 따라왔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나 들었어. 폐하께서 네게 에피스테메 편입 시험을 보게 하실 거라고.”

“…….”

“도로시도 에피스테메에 들어오면 진짜 좋겠다! 같이 갔다가, 같이 궁으로 돌아오는 거야. 내가 내 친구들도 소개해 주고……. 도로시라면 분명 붙을걸? 에피스테메 애들 중에서도 너만큼 똑똑한 애는 없거든.”

“레이.”

“응?”

“바쁘지 않아?”

도로시가 걸음을 멈추며 그를 돌아보았다.

에피스테메에 다니는 황태자 전하께서 이렇게 한가하게 여동생 마중이나 해줄 시간이 있어?
도로시가 빤히 올려다보자 레이는 눈을 끔뻑이며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웃었다.

“괜찮아. 나 안 바빠!”

“바빠야 할 텐데.”

“오랜만에 동생이 돌아왔는데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어?”

레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미소했다.

“많지.”

“내가 아는 한은 없는데.”

없기는. 지금 하나를 더 알아두고 배워두면 황제가 되어서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
그에 비하면 도로시를 마중 나오는 건 하등 쓸모없는 일이다.
홀대받는 동생을 마중 나오는 게 무슨 도움이나 된다고.
도로시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레이한테 잔소리해 봤자 피곤하고 지루한 입씨름만 될 거라는 걸 알아서였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

도로시의 경고에 레이는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 대 후회 안 해, 절대.”

슈테판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줄곧 레이의 편지를 무시했던 것치고는, 도로시와 레이의 사이가 많이 괜찮아 보인다고 그는 생각했다.
황제를 알현한 뒤에 굳어 있던 도로시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 보였으니까.
* * *
클라라는 갑작스러운 황실의 부름으로 쉴 틈 없이 분주해졌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불러들이실 수가!”

도로시와 슈테판은 벌써 제도로 올라갔고, 클라라도 그 뒤를 따라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처리하고 정리할 일이 너무 많았다.

“다 챙겼나? 황녀님 책은? 빠진 거 없나?”

모두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가운데 조이와 포는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누, 누나. 우리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모르겠어.”

다들 바쁜 탓에 조이와 포를 신경 써주는 이가 없었다.
그럴수록 두 사람의 불안감은 점점 더해져 갔다.
여기에 두고 가는 낡고 불필요한 짐처럼, 두 사람도 여기 버려질 것만 같았다.

“나 집에 돌아가기 싫어, 누나.”

“나도야. 걱정 마, 포! 걸레로 써달라고 하는 한이 있어도 여기에 남을 수 있게 졸라볼 테니까 조금 기다려 봐.”

“황녀님이 우리를 버린 거야?”

“……아니야. 아닐 거야.”

그때.

“에단 도련님?”

도로시가 없는 별궁에 에단이 찾아왔다.
클라라와 별궁 사람들이 허겁지겁 그를 맞았다.

“바쁘실 텐데 찾아와서 죄송해요.”

에단은 별궁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인사했다.

“아니에요, 도련님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런데 황녀님이 안 계신데…….”

“알고 있어요. 황녀님께 부탁받은 게 있어서요.”

그러더니 에단의 눈이 한쪽에 있는 조이와 포에게로 향했다.
에단과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은 맹수를 마주친 소동물처럼 그 자리에서 그대로 경직됐다.

조이는 괜히 포의 손을 꽉 붙잡았다.
저 별처럼 아름다운 눈동자 앞에 왜 몸이 긴장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에단의 시선은 그들에게 경고를 한 번 한 뒤 다시 클라라에게로 향했다.

“여기, 황녀님의 편지예요.”

“어머!”

클라라는 에단이 내민 편지를 반색하며 받아 들었다.
편지를 읽은 클라라는 이내 눈가에 어린 눈물을 훔쳤다.

“우리 황녀님, 다정하기도 하시지……!”

물론 클라라는 람파스로 올라가 다시 도로시를 모실 테지만, 그래도 별궁의 하인들을 신경 써주는 도로시가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별궁의 관리인과 정원사, 주방 막내의 이름까지도 하나하나 언급하며 인사를 남겼다.
클라라는 별궁 사람들에게 그 편지를 돌려보게 했다.
그리고 다른 봉투에 따로 봉해진 편지 한 장은 조이와 포에 관한 건이었다.

“조이, 포! 황녀님이 너희도 람파스로 올라오라는구나!”

클라라가 희소식을 전하자 바짝 긴장하고 있던 두 사람은 펄쩍 뛰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제도라니! 세상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가 아닌가?
황제가 산다는 제도 람파스는 통행증을 발급받는 것도 까다롭다고 들었다.
그런 도시에 갈 수 있게 되다니!
에단은 별궁과 어울리지 않게 소란스러운 그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하얀 손이 주먹을 쥐어 말려들어 갔다.

“편지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도련님.”

클라라와 별궁 사람들은 에단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에 에단은 생긋 웃으며 답했다.

“황녀님께서 제게 부탁하신 일인데요. 당연히 해야죠.”

“혹시 바쁘지 않으면 안에 들어가서 다과라도 잠깐 드시고 가겠어요?”

클라라는 귀한 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순 없어 물었다.
에단은 고개를 저었다.

“이만 돌아가 볼게요. 황녀님도 안 계신 궁에서 혼자 있기도 뭐하고. 편지만 전하려고 온 거였으니까요.”

에단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별궁을 빠져나왔다.
공작가의 마차에 오르려는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도련님!”

목청 좋은 조이와 조그만 포가 달려왔다.

“편지 전해줘서 진짜 진짜 고마워요! 도련님이 아니었으면 우린 버려졌을 거야.”

조이와 포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에단에게 말했다.

“그리고 지난번 일은 미안했어요. 그때 황녀님이 우리한테 화를 내는 게 너무 무서워서…….”

조이는 그 김에 지난번 손수건 일도 사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이는 방금까지만 해도 에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날 에단이 간식용 과일이니 뭐니 추동한 까닭에 도로시를 화나게 했기 때문이다.
조이는 자신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에단이 미웠더랬다.

“내가 정말 바보였어요. 황녀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게 아닌데. 그러고선 날 생각해 준 도련님한테 화를 내고. 그런데 도련님은 우리를 위해 저렇게 편지까지 전해주다니!”

에단은 들뜬 얼굴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조이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너희는 정말 운이 좋구나.”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목소리.

“예?”

“황녀님 얼굴에 먹칠하지나 마.”

에단은 싸늘하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마차에 올랐다.
조이와 포가 대꾸할 겨를도 없이 마차는 출발했고, 두 사람은 덩그러니 별궁 앞에 선 채 마차의 꽁무니만 바라보았다.

“누나……. 도련님이 화난 거야?”

포가 조이의 옷깃을 슬쩍 붙잡으며 물었다.
그러자 조이가 볼에 잔뜩 바람을 넣으며 미간을 구겼다.

“고맙다는 말 취소다, 예쁘기만 한 쓰레기야!”

조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진 마차를 보며 소리쳤다.
* * *
에피스테메 편입 시험은 바람이 다소 차가워진 날 치러졌다.
도로시는 황명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에피스테메 편입 시험에 응했다.
문제는.

“0점이라고?”

“예…….”

보좌관 로버트는 자신이 가시방석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에피스테메 시험에서 0점을 받은 황녀라니.

“백지를 냈나?”

“아니요, 전부 푸셨답니다.”

객관식 오백 문제, 그리고 논술형 열 문제.
단 한 문제도 남김없이 답을 적어 넣었는데 깔끔하게 0점이었다.
찍어도 이것보다는 훨씬 나을 텐데.

“검술과 기마, 궁술 시험은?”

“전부 응시는 하셨답니다.”

검으로 목표물 머리 베기 시험은 정확하게 다리만 베었다.
말은 완벽하게 1등으로 들어오는 듯하더니 목표 지점 앞에서 멈춰 내렸다.
화살은 죄다 점수권 바깥쪽을 맞췄다. 그것도 한 지점만 정확하게.
그러니까, 실력은 완벽한데 시험 기준에는 모두 미달.

“고의로 그렇게 했다는 거군.”

카르넌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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