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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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는 죽기 직전의 일들은 대부분 기억이 흐릿했다.
처형대까지 어떻게 갔는지, 에단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어렴풋한 것만 기억날 뿐 정확한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은 명확했다.
도로테아 밀라네어와 에단 브론테는 너무 닮아서, 서로를 더 서로답게 만든다는 것.

에단의 개과천선? 그건 진짜 착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거야.
나 같은 사람은 에단을, 그리고 나 자신을 검게 물들일 뿐이야.
도로시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돌아가, 에단.”

그녀는 더 이상 에단과 함께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와 있다간 또 욕망을 꽃피우고, 악의 길을 걸을까 두려웠다.
악에 눈이 멀어 또다시 그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될까 봐 무서웠다.

“황녀님……!”

차가운 축객령과 함께 도로시가 등을 돌리자 당황한 에단이 그녀를 붙잡고 돌려세웠다.
그러자 감추려 했던 눈물이 에단 앞에 뚝 떨어지고 말았다.
눈물을 본 에단의 눈동자가 떨렸다.
도로시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를 밀쳐내려 했다.
그런데.

“미안해요. 미안해요, 황녀님.”

에단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말아요.”

에단은 도로테아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애원했다.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잘게 떨렸다.
방금까지도 뻔뻔하게 무죄를 주장하던 그가, 한순간에 죄를 인정하며 돌변했다. 에단답지 않게.
도로시는 혼란스러웠다.

“이거 놔, 에단……!”

도로시는 그를 밀쳐냈다.
그러자 에단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그는 무언가 두려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떨고 있었다.
그런 얼굴의 에단은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해서, 도로시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이것마저 상황을 모면하려고 꾸민 가면일까?
아니면 황녀와의 연줄을 잃을 게 두려운 걸까?
누구보다 가까이서 수년을 보아왔는데도 여전히 그의 속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도로시는 에단의 진심을 알 수 없어서, 일부러 그와 눈을 오랫동안 맞추었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 안쪽을 더듬거리며 그 속에 숨겨진 진심을 찾아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표정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도로시는 당혹스러웠다.

“제 잘못이에요. 저들이 황녀님이랑 친한 게 질투가 나서 그래서 그랬어요. 제가 황녀님의 유일한 친구이길 바랐어요.”

에단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황녀님께서 버리시면 저는 혼자예요.”

그 끝에 금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톡, 떨어진 물방울은 그녀의 심장을 흔들었다.

“그러니까, 절 미워하지 마세요…….”

에단이 그녀를 꼭 붙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썹 한 번 움찔거리지 않는, 그 슬픈 얼굴로.
도로시는 그가 진실로 영악하다고 생각했다.
차마 미워한다고 말할 수 없었으니까.
* * *

“하르크 쪽은 잘 돌려보냈나?”

“예, 폐하.”

하르크가 제국 우베라의 방문을 모두 마친 뒤, 카르넌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카르넌이 무심하게 서류를 넘기다가 이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보좌관 로버트를 보았다.

“황녀 도로테아 이야기를 하더군.”

카르넌은 하르크 사람들의 말을 떠올렸다.

“세리티안에서의 환대가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하르크 사람들은 브론테 공작과 도로테아 황녀가 그들을 잘 대접해 준 덕에 제국 우베라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가졌다고 말했다.
카르넌은 그에 펜을 놓고 생각에 잠겼다.

‘도로테아 황녀님은 무척 건강해 보이시던데 말입니다. 참 지혜롭게 자라셨더군요.’

도로테아 밀라네어가 별궁으로 내려간 후, 이따금 그녀의 소식이 들려오곤 했다.
세리티안 근방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도로테아의 적극적인 구호로 민심이 많이 좋아졌었다.
그 외에도 도로테아가 기부한 곳은 많았고, 지방의 귀족 사이에서도 평이 좋았다.
어린 나이에 영특하고 야무지다는 평이었다.

“도로테아 황녀님을 천재라고 말하는 이도 많습니다.”

그에 카르넌은 잠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황녀에게 요양이 더 필요한가?”

“아니요. 보고된 바로는 브론테 공작이 주최한 검술 대회에서 레이먼드 황태자 전하와 겨룰 만큼 건강하시다고 합니다.”

“그럼 올라오라고 해.”

카르넌의 명령에 로버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랫동안 괄시하던 딸을 드디어 부르시는구나.

“그리고 에피스테메 편입 시험을 한번 보게 해봐.”

“예? 도로테아 황녀님을 말씀이십니까?”

보좌관 로버트가 놀라서 물었다.

“그럼 누구겠나?”

황실 사람이니 에피스테메는 나와서 나쁠 건 없다.
다만 빛의 정령을 다루지도 못하는 도로테아를 에피스테메에 보내려고 교육시키고 싶진 않았을 뿐이다.
하자 있는 밀라네어에 공을 들이는 건 낭비다.
하지만 머리가 좋다면 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황녀님은 에피스테메 시험에 적합한 교육을 받아보신 적이 없습니다.”

로버트는 당황스러웠다.
레이먼드도 전문 교사들을 불러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은 결과 에피스테메에 턱걸이로 합격할 수 있었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로 자녀를 에피스테메에 보내기 위해 교육열을 불태웠다.
그런데 지방에서 요양이나 하던 황녀가 에피스테메 입학이라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 아카데미로 알려진 곳을, 선생 하나 없이 혼자 공부한 걸로 시험을 치러 합격하라고?

“영특하다면 알아서 들어가겠지. 못 들어가면 거기서 쓸모를 다한 거고.”

카르넌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말했다.

카르넌은 도로테아가 에피스테메에 합격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도로테아 밀라네어는 황제감도 아니고, 조용하고 얌전히 살다 죽는 게 가장 좋은 위치니.
이것은 도로테아를 향한 시험이었다.
영특하다는 소문이 제도에 있는 그의 귀에까지 들려오는 도로테아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
굳이 그가 도로테아를 이리저리 재보지 않아도, 에피스테메 시험 점수는 도로테아의 수준을 간단하게 판별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똑똑하긴 했던 것 같군.’

몇 년 전, 정원 ‘앨리스의 고향’에서 만났을 때 조그만 도로테아가 밀라네어의 가계도를 달달 외우는 걸 들은 적 있었다.
그때도 나이에 맞지 않는 책을 읽었다던가?

‘그 머리가 황실에 유용할지. 아니면 독이 될지…….’

카르넌이 관심이 있는 건 그뿐이었다.
카르넌의 무뚝뚝한 대답에 로버트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 슈테판은 검을 갈고 있었다.
별궁에 온 후로 검을 쓸 일은 거의 없었으나 그는 검을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슈테판은 도로시가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조금 기뻤다.

혼자 수련하는 것 말고도 검을 쓸 수 있는 일이 생겨서.
그리고 도로시에게 검술을 가르치며,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느꼈다.
도로시가 그의 가르침에 기대 이상으로 부응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 아니, 백을 아는 도로시는 불과 몇 년 새에 꽤 상대할 만한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다.

슈테판은 도로시가 큰 사고 없이 성년이 되면 뛰어난 기사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출 것이라고 장담했다.
황녀라는 신분이 아까울 정도로.
그는 자신이 말수가 없는 만큼 가르침에도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로시를 보면 가르치는 기쁨이 뭔지도 알 것 같았다.

‘완벽한 사람…….’

슈테판의 눈에 도로시는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것 같은 존재였다.
가문도 두말할 것 없이 좋지, 똑똑하지, 야무지지, 검술도 잘하지, 착한 데다 귀엽고 예쁘기까지 하지.
슈테판은 밀라네어의 전설이니, 고귀한 핏줄이니 하는 것을 믿지 않았으나 도로시를 본 뒤로는 ‘아, 저것이 황실의 핏줄이라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저런 아이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슈테판은 도로시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처음에 만났던 도로시는 지금의 모습과 거리가 조금 멀었다.
그가 도로시를 처음 만난 건 달도 구름에 가린 어두운 사막, 차가운 모래 위 쓰러져 있던 모습이었으니까.

‘황녀님!’

그날 광휘의 기사단의 기사들은 납치된 황녀를 찾으라는 명령으로 서쪽의 사막에 파견되었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차가운 사막에서 도로시를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슈테판이었다.
그 넓은 땅에서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그때의 도로시는 부러질 것처럼 작고 가녀린 몸으로 갈라져 가는 얕은 숨을 뱉고 있었다.

추위에 덜덜 떨리는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을 때 그녀는 모래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처럼 가벼웠다.
조금이라도 힘을 줘서 안으면 부서질 것 같아서 그는 망토에 그녀를 싸매어 급히 근처 마을로 달려갔다.
정신을 잃은 그녀가 숨이 걸려 기침을 할 때마다 깊어지는 어둠이 두려워지던 그날.

마을에 도착했을 때 비가 쏟아졌던 것을 그는 아직도 기억했다.
도로시의 호위 기사를 자원한 것은 그 일의 영향이 컸다.
그렇게 이곳에서 도로시를 다시 만났을 때, 도로시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날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그만 몸으로도 당당한 황녀의 기품을 갖추고 그를 맞았다.

그러곤 손등뼈와 핏줄이 다 드러나 보이는 작은 손을 그에게 내밀었더랬다.
여렸다. 그가 잡으면 부서질 것처럼.
그래서 그는 툭, 손을 맞대고는 서둘러 떼어버렸다.

‘황제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이 작은 여자아이를 먼 곳에 혼자 보내신 걸까?’

분명 가족이 보고 싶을 나이인데. 혼자 견디기 힘들 텐데.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 다 깊은 뜻이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아이를 홀로 두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조그만 황녀를 안타까워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황제에게 버려졌다고 수군거리곤 했다.

불쌍한 황녀님.
종종 황궁을 찾아오는 귀족들도 도로시 앞에서는 활짝 웃으며 호감을 보이다가, 뒤를 돌면 혀를 내둘렀다.
도로시는 그 사실을 알까?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걸?
슈테판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아마 알고 있겠지.’

도로테아 밀라네어는 똑똑하니까. 알고 있는 것을 티 내지 않을 만큼.
그래서 슈테판은 도로시가 강한 아이인 줄로만 알았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있잖아, 나 엄청 무서운 꿈을 꿨어……. 꿈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날 싫어해. 결국엔 내가 너무 싫어서…… 내 방에서 목을 매달아 죽는 거야.’

의무실에서 도로시가 털어놓은 고백.

‘옛날부터 생각했던 건데…… 나는 엄마를 죽이면서 태어났잖아. 그러니까 처음부터 나쁜 사람으로 태어나 버린 거야. 그래서…… 사랑받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해도 나쁜 사람이 되는 운명인 거야.’

그 작은 아이가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을까?
그는 한 번도 도로시의 속에 그런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납치 때의 일도 이겨냈으니까 흉들이 모두 아물었을 것이라고, 혹은 잘 아물어가는 중일 거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부분들, 웃음 속에도 얼핏 비치는 메마름.
도로시는 충분히 신호를 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사람이 되는 운명……. 착하게 살기 버킷 리스트.’

그 말을 듣고 돌이켜 보니 도로시의 독특했던 행동들이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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