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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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온은 당황하며 나의 눈치를 살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너 못된 아이구나! 좋은 친구가 될 줄 알았는데.”

레이가 버럭 화내더니 테온을 내게서 떼어냈다.
제 딴에는 꽤 화가 난 모양인지 테온을 노려보며 적개심까지 드러냈다.

“도로시는 아기 때도 이렇게 운 적 없단 말이야!”

레이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우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회귀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언어를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신체가 발달하지 않은 아주 갓난쟁이 시절에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울음 비슷한 소리를 내었을 뿐이다.
달리다가 넘어져도, 유모가 잠시 자리를 비워 혼자 남았을 때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유모는 비정상적으로 울지 않는 걸 걱정해서 의사에게 상담을 받았을 정도였다.

“도로시한테 무슨 짓을 했지?”

“레이먼드 전하, 그게…….”

“테온 때문에 운 거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테온에게 화를 내는 레이에게 소리쳤다.

“테온 때문이 아니라고?”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런 거야.”

나의 허술한 변명에 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 녀석에게 울었다는 사실을 들켜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정말이야. 가시 같은 게 들어가서 너무 아파서…….”

“……지금은 괜찮아?”

바보 레이는 내 허술한 변명을 믿은 것인지 나의 눈을 마주 보며 이상이 없는지 살폈다.
나를 향한 그의 푸른 눈동자가 질리도록 맑았다.

“울어서 빠졌어. 괜찮아.”

“다행이다.”

레이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뒤늦게 레이의 뒤를 허겁지겁 쫓아온 유모도 놀랐는지 눈물 자국이 남은 내 뺨을 연신 닦아주었다.

“에구구, 우리 황녀님! 정원에 계시더니 언제 여기까지 나왔어요!”

유모와 레이의 등장에 점차 마음이 진정됐다.

“도로시, 내가 새 친구 소개해 주려고 그랬어.”

레이가 분위기를 환기하며 테온을 내 앞으로 가까이 잡아당겼다.

‘새로 소개해 준다는 친구가 테온이었던 거야?’

“초면에 결례를 범했습니다, 도로테아 황녀님. 테온 프리드라고 해요.”

테온은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두근두근.
한 번 후회의 길을 겪었으면서도 마음이란 길들어지지 않는 야생마처럼 이리저리 날뛰며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테온의 미소 한 번에 나는 파렴치한 희망에 부풀었다.
지금의 우리는 새 출발이었다. 우리 사이엔 아무런 이야기도 쓰이지 않았다.

그러니…… 잔혹하게 사랑을 갈구하던 나를 잊고, 지난날의 불행을 떨쳐내고 우리는 새로 시작해도 괜찮을까?
좀 더 너를 위한 사랑을 한다면, 이번에 넌 나를 봐주지 않을까?
혹시 다시 찾아온 생이 내게 새로운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면…….
그러나 그 꿈은 곧 산산조각 났다.

“테온, 같이 가자니까 왜 혼자 가버렸어?”

나의 희망이 무르익기도 전에 찾아온 절망.

“줄리!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나를 향했던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돌아간다.
테온의 시선 끝에 닿아 있는, 봄같이 향기롭고 풍성한 분홍빛 머리카락과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

그림자가 드리운 적 없는 것처럼 환한 미소. 그래서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소녀가 테온의 옆으로 달려와 섰다.

테온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던 줄리아 델레바인.
가문의 약속과 나의 고집으로 나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으나, 테온은 죽을 때까지 오직 그녀만을 사랑했다.
소꿉친구로 오랜 정을 나눠온 두 사람은 잘 맞는 퍼즐 조각처럼 내가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각별했다.

결국 내 생은 그런 생이었다.
카르넌의 사랑을 갈구했으나 그 사랑을 받지 못했고, 테온의 사랑을 갈구했으나 그 사랑을 받지도 못한…… 사랑스럽지 못한 삶.
테온은 나와 결혼한 후에도 줄리아를 찾았다.
나 몰래 줄리아와 주고받은 수십 통의 편지.
그걸 알면서 그를 줄리아에게 보내주지도, 그렇다고 함부로 범하지도 못한 이유는 내가 지독히도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줄리아를 향한 질투에 눈이 멀었다. 줄리아가 테온의 곁에서 사라지기를, 아니, 죽어버리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나의 충실한 부하가 그럴듯한 죄목을 만들어 줄리아의 죽음을 가져왔을 때, 나는 기뻐했다. 이제 테온이 내게 올 거라고 착각하면서.
하지만 종국엔 테온은 죽음으로 나에게서 벗어나 그녀의 곁으로 가버렸다.
그가 죽은 건 결국 나의 욕심 때문이었다. 내 이기적인 사랑이 그를 죽였다.
그걸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지금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이 감정을?

“줄리아도 왔네!”

레이는 이미 줄리아와도 인사를 나눴는지 살갑게 그녀를 불렀다.

“도로시. 여기는 줄리아 델레바인이야. 테온과 함께 대공국 프리디아에서 왔대.”

레이가 차례로 그들을 정식으로 소개해 주었다. 테온과 줄리아는 얼마 뒤에 있을 레이의 책봉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제도로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소개가 끝난 줄리아는 예의 바르게 무릎을 굽히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도로테아 황녀님.”

줄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사랑스럽고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질투가 날 정도로.
안 돼. 웃어야 돼, 도로시. 줄리아를 미워해선 안 돼.

“……안녕.”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했지만, 감정이 통제되지 않았다.
티 없이 선량한 그녀의 미소와 달리 나의 미소는 온갖 감정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줄리아와 테온이 자연스레 맞잡은 손이 가슴을 후볐기 때문이다.
뭘 기대했던 거야, 도로시. 테온을 한 번 죽였던 주제에.

“도로시 있잖아…….”

“나 방에 올라갈래, 유모.”

레이가 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는 유모의 하얀 앞치마를 잡아당겼다.
내 손으로 죽였던 황태자, 나를 피해 죽음을 선택했던 사랑, 나의 사랑이 사랑하는 여인, 그 틈에 내가 서 있을 곳은 없다.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네? 새로 온 친구분들이랑 놀지 않으시고요?”

“피곤해.”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돌리곤 도망치듯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내 손이 테온의 손수건을 놓지 못했다는 것을 잊은 채.
* * *
밀라네어라는 이름은 내게 저주였다.
밀라네어라는 이름만으로도 레이의 책봉식에 반드시 참석해야만 했으니까.
레이가 황태자가 되는 것이 싫음에도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어떡하지, 도로시! 나 너무 떨려!”

“가만히 좀 있어, 레이.”

책봉식을 앞둔 레이는 내 앞을 이리저리 오가며 가만히 있질 못했다.
정신이 사나워 책을 읽는 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린이 삽화집으로 표지를 갈아 끼운 역사서를 보고 있었다.
유모가 카르넌의 계략을 세운 이후 나는 어려운 책을 읽을 때 일부러 표지를 갈아 끼우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오늘 황태자가 된대, 도로시.”

“그래. 위대한 제국 우베라의 황태자.”

나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회귀 전, 나는 레이가 황태자가 된다는 데 불만이 많았다.
당시 여덟 살에 불과했지만 나는 책봉식이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갖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굳이 정치적인 의미가 아니어도, 레이가 나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도로테아 밀라네어는 결코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없으며 황태자 책봉식 같은 커다란 행사의 주인공이 되어 축하받을 일이 없을 거란 것도.
그러므로 나는 그의 책봉식 내내 뚱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다 식이 끝나자마자 또 유모들에게 짜증을 부렸다.
빛의 정령을 불러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

하지만 지금의 나는 레이에게 순순히 황제의 자리를 넘겨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레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를 또다시 끌어내리거나 죽이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좀 걱정은 돼.’

저런 해맑은 멍청이가 제국을 다스릴 걸 생각하면.
정령은 황제를 만들지만 별 힘이 없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조언을 해주지도 않았다.
물론 나도 좋은 군주는 아니었으니 레이에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지나친 욕심과 집착으로 나라를 망쳤으니까.

그러니 내가 레이를 걱정하는 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황태자는 중요한 자리야, 레이.”

하고 싶은 말은 많고 감정은 복잡했지만 한마디만 했다.
나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며.
나와 다르게, 실수하지 않기를 바라며.

“후하후하, 알아. 그래서 너무 떨려! 도로시, 나 황태자 같아?”

레이가 크게 심호흡하며 핑그르르 몸을 돌려 보였다.
아니, 오늘도 어김없이 바보 같아. 조금 꾸며 입은 바보.
반곱슬의 금발을 기름 발라 넘기고, 하얀 제복을 입고 망토를 두른 바보.
봐줄 만은 하지만 여전히 레이 녀석인 건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저렇게 진지하게 꾸민 모습은 레이랑 어울리지 않아 더 우습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레이가 제법 의젓하고 잘생겼다고 칭찬했지만, 글쎄.

“나 말고 도로시가 황태자 하면 좋았을걸. 도로시는 분명 떨지 않고 멋지게 책봉식을 끝냈을 텐데. 도로시는 나보다 똑똑하잖아.”

“…….”

순수하고 착하다고 감싸주기엔 지나치게 멍청한 말이었다.
만약 내가 회귀한 게 아니었다면 곧바로 그를 한 대 후려갈겼을 테니까.
저 말이 황태자가 될 수 없는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모든 걸 부여받고 태어난 바보 레이 녀석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순수하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레이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난 정령 못 불러내서 안 돼.”

“아니야, 도로시도 곧 정령을 부르게 될걸?”

아니, 절대 못 봐. 죽을 때까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는 가슴을 내밀며 내가 정령을 만날 날이 곧 올 거라고 장담했다.
섣부른 위로와 격려가 나에게는 난도질이나 다름없다는 걸 레이는 모른다.
속에서 자꾸 나쁜 마음이 싹트려 해서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레이는 아무것도 몰라.’

몰라서 그러는 것뿐이야.
도로시 너는 착하게 살아야 해. 잊지 마.
그때 레이가 내 곁에 슬쩍 다가와 앉았다.

“도로시, 나한테 힘내라고 한 번만 해주면 안 돼?”

“내가 왜?”

“도로시가 힘내라고 해주면 나 잘하고 올 것 같아.”

레이가 살가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기울여 나와 눈을 맞추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속눈썹 안쪽으로 기분 좋은 푸른빛이 청량하게 빛났다.
여우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 같은 몸짓에 나는 그렇지 않아도 무뚝뚝한 얼굴 위로 미간을 구겼다.

“그냥 망치고 와.”

“도로시~ 그러지 말고, 응? 오빠인데, 나 한 번만 안아줘라. 응?”

힘내라고 해달라던 게 갑자기 포옹으로 한 단계 발전했다.
애교 섞인 콧소리까지 완벽해서 나는 기꺼이 대답했다.

“응, 망치고 와.”

어디서 감히 교태를 부리는 건지. 포옹 대신 주먹이라면 한 대 선물해 주고 싶은 걸 참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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