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59화

Background color
Font
Font size
Line height

변덕스러운 싫증일까.

“귀걸이 빼.”

도로테아는 그녀의 귀에 커다란 귀걸이를 달아주던 하인에게 명령했다.

“예? 폐하, 하지만…….”

“귀걸이 빼라고!”

도로테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르자 놀란 하인이 허겁지겁 그녀의 귀에 걸었던 귀걸이를 빼었다.
그러나 황제의 분노에 두려웠는지 덜덜 떨며 남은 한쪽을 쉽사리 빼지 못했다.
그 잠깐의 지연이 도로테아를 분노케 했다.
왜 분노했는지는, 도로테아도 몰랐다.
그저 짜증이 났고, 그녀는 하인이 빼지 못하는 귀걸이를 손으로 움켜잡고 거칠게 당겨 억지로 빼냈다.

“폐하……!”

하인들과 뒤쪽에 있던 에단이 놀라 소리쳤다.
그녀의 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앙상한 그녀의 어깨를 붉게 적셨다.
그럼에도 도로테아는 일을 망친 것 같은 짜증이 치밀 뿐 귀가 아픈 것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깟 귀걸이 하나 빼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다니!
거친 호흡을 씩씩 내쉬며 귓불에서 피가 흐르는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거울 속의 도로테아 밀라네어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에단이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황급히 다가와 그녀를 살폈다.
그는 방금 피어난 꽃을 다루듯 귀중하게 그녀의 상처를 돌보려 했으나 도로테아는 그를 거칠게 쳐냈다.
그때였다.

“폐하, 프리드 공께서 드셨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종장의 목소리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도로테아는 열린 문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테온……!”

방금까지 짜증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은 불을 켜기라도 한 듯 밝아졌다.

‘테온이 나의 방을 찾아오다니!’

전에 없던 일에 도로테아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꼭 그녀의 방에 볕이 들고 공기가 새로 불어온 양 상쾌해졌다.
아침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떠오른 해가 할 일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로테아는 귓불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잊고 에단을 지나 테온에게로 달려갔다.

“어쩐 일로 나의 방을 찾았지, 테온? 드디어, 그래, 드디어 내게…….”

“폐하, 델레바인가의 작위를 회수하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제도 출입도 금하셨다고요!”

도로테아가 활짝 웃으며 반기는데, 테온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죽일 것 같은 얼굴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은 얼굴이라는 점에서,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후일 도로테아는 그 일을 떠올리며 후회했지만 당시의 도로테아는 그의 죽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도로테아는 테온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무서운 테온의 얼굴은 처음이라서, 만약 도로테아가 오랜 시간 동안 미움받는 것에 단련되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터뜨렸을 정도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레이먼드를 죽이기 위해 검을 들이밀던 그 순간보다 더 겁이 났다.

나의 남편. 테온, 당신은 줄리아를 위해서라면 이렇게 달려와 내게 화를 낼 수 있구나.
그 사실이 가슴을 찢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두려움과 고통은 고슴도치처럼 여린 살 위로 가시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 줄리아가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야?”

건조해서 찢어질 듯한 목구멍을 가르고 가시 하나가 툭 솟았다.

“델레바인가는 오랫동안 황실과 저희 프리드 대공가를 보필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 죄도 없는 델레바인가의 작위를 박탈하다니요?”

“테온, 넌 그 여자에게서 신경 끄고 이 황궁에서 잘 쉬고, 잘 놀고, 잘 먹기만 하면 돼.”

“신경을 끄라니요! 제게 줄리아가 얼마나……!”

언성이 높아지던 테온이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말이 끊겼음에도 도로테아는 그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가진 것을 모두 잃은 사람처럼 절망에 빠진 그의 얼굴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줄리아 델레바인을 사랑한다’고.
그와 함께 도로테아가 품었던 모든 가시가 바짝 고개를 들었다.

“테온, 넌 내 거야. 나의 것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리는 거지?”

지금까지 두려워서 차마 입으로 명명하지 못했던 사실. 그녀는 그것을 마른 눈물로 절규하며 물었다.

“전 폐하의 것이 되겠다고 맹세한 적 없습니다.”

도로테아를 바라보는 테온의 눈빛은 마치 하늘을 저주할 듯 악에 받쳐 있었다.
도로테아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손끝과 발끝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철썩!
테온의 말을 내치듯, 도로테아의 손바닥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자 테온이 바닥에 쓰러졌다.

“테온……!”

테온을 때린 도로테아는 도리어 쓰러진 테온을 보고 놀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손찌검 한 번에 테온이 이토록 맥없이 쓰러질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도로테아는 테온을 때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무뎌진 지문과 딱딱한 굳은살을 따라 그녀의 죄악이 새겨져 있었다.
쓰러진 테온은 몸을 추스르며 비틀거리고 일어섰다.
그리고 테온의 붉은 눈이 그녀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테, 테온!”

도로테아가 그의 뒤를 따라 나가려 했으나 에단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폐하, 지금은 가봤자 프리드 공의 마음을 해칠 뿐입니다.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신다면 분명 그 또한 폐하께 사과를 드릴 겁니다. 너무 심려하지 말고 기다려 보세요.”

에단은 그의 하얀 손으로 죄악에 물든 도로테아의 손을 꽉 맞잡았다.

“하지만…….”

“폐하, 폐하께선 세상 누구보다 높은 곳에 계십니다. 이런 일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폐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에단이 도로테아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사근사근 귓가에 내려앉는 침착한 목소리에 도로테아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에단은 흐트러진 도로테아의 잔머리를 손으로 넘겨주고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어 아까 채 닦아주지 못한 귓불의 피를 눌러 닦아주었다.
* * *
도로테아는 초조하게 테온 프리드를 기다렸다.

그리고 사과의 의미로 그에게 아름답고 귀한 새들을 기르는 온실 정원을 선물해 주었다.
먼 이국땅에서 들여온 형형색색의 새라면 테온도 마음을 열고 좋아해 주겠지.

보석은 외면해도 아름다운 새의 노랫소리는 외면하지 못하겠지.
그의 궁전 곁에 온실 정원을 마련해 준 후, 그는 종종 그곳을 찾는 듯했다.

“프리드 공께서 새들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듯합니다.”

테온을 모시는 시종의 말에 도로테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화가 풀렸을지도 몰라.
마치 생일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들뜬 도로테아는 테온이 있을 온실 정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꺄악!”

오래간만에 도로테아에게 깃들었던 기쁨이 날카로운 비명에 찢어졌다.

“무슨 일이냐?”

도로테아의 물음에 하인이 헐레벌떡 온실 정원 쪽으로 달려갔다.
멀리 온실 정원이 평소보다 어두워 보이는 건 왜일까?
하인을 보내놓고도 불길함이 엄습해서 도로테아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온실에 도착했을 때 도로테아는 목도했다.
땅바닥에 떨어져 죽은 새들과 죽음으로 물든 나무들을.
그리고 그 가운데 홀로 선 테온을.

“테온…….”

도로테아의 부름에 테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비친 좌절과 자조와 절망에 도로테아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래도 저를 사랑하십니까?”

테온이 물었다.
그는 웃는 것 같기도, 또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도로테아는 그 앞에 굳어 할 말을 잃었다.
바닥에 추락한 새들의 사체처럼, 그녀의 심장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도로테아는 미련했다.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의 가장 깊은 근원엔 테온의 절망 섞인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슬픔이 새의 죽음보다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도로테아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널 사랑한다.”

추하게도. 어리석게도. 잔인하게도.
* * *
그날 이후 도로테아는 더욱더 초조해졌다.
테온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그것은 점점 더 도로테아를 미치게 만들었다.
끊이지 않는 비난과, 원망과, 외면.
그 가운데 한 줄기 희망이 그녀에게 내렸다.

“줄리아가 죽었다고?”

“예. 아르본 지방에서 발견됐답니다. 호위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봉변을 당한 모양입니다.”

장군의 보고에 도로테아의 눈이 에단에게로 향했다.
에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그가 얼마 전 오랜만에 휴가를 다녀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이든, 사건의 전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테온도 이젠 날 돌아봐 줄 거야!’

드디어 줄리아 델레바인, 그 눈엣가시가 사라지고 도로테아 밀라네어의 인생은 완벽해졌다!
비록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시작했으나 그녀는 쟁취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승리인가!

“에단.”

에단만이 방에 남자 도로테아는 기쁘게 그를 불렀다.

“훌륭해.”

줄리아가 이 시기에 죽어주다니, 그녀의 죽음은 에단이 손을 쓴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에단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감입니다, 폐하. 제가 한 일이라면 폐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줄리아의 죽음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도로테아는 그렇게 말하는 에단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에단의 눈썹이 한 번 살짝 들려 올라갔다.
거짓말을 할 때의 그의 습관.
하지만 도로테아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누가 한 짓이든 상관없어. 해묵은 체증이 싹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아. 물론 당분간 테온의 마음이 착잡하겠지만 그 상처는 내가 잘 보듬어주면 그만이지. 그렇지, 에단?”

내가 죽인 것도 아니니, 줄리아의 죽음은 나의 죄가 아닌걸.
눈이 먼 도로테아는 그렇게 스스로를 변명했고,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폐하.”

도로테아는 줄리아의 죽음 뒤 테온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기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테온은 결코 도로테아의 것이 되지 않았다.
줄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그녀를 찾아오는 법이 없던 테온이 다시 그녀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도로테아의 방에 들어선 그의 눈가에는 도로테아를 향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것만 기억하세요. 당신의 욕심이 저를 죽였습니다.”

분노에 가득 차 도로테아를 찾아온 그는 절규하듯 그녀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순간 도로테아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서히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벗겨졌다.

“테온, 내가 줄리아를 죽인 게 아니야!”

도로테아는 사랑하는 이에게 변명했다.
그래, 그녀는 줄리아를 죽이라고 명령한 적 없었다.
죽여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었다.
에단, 그래, 에단이 한 짓도 아니라고 했다.
그저 절묘하게 줄리아가 피습을 당한 것뿐이다.
도로테아에게 죄가 있다면 줄리아의 죽음에 기뻐했다는 것 정도.


You are reading the story above: TeenFic.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