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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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있던 황실의 창고는 가득 차 새로운 창고가 필요할 정도였다.
그래. 그녀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녀는 황제답게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의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먼 남부에서 올라온 희귀한 과일을 먹고, 샴페인에 진주를 녹여 마시고, 초콜릿을 금으로 감싸 음미했으며, 화려한 공작새를 사들이고, 전설로 불리는 명검을 수집했다.
그녀의 정원에는 사치와 향락에 젖은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제국이 온 세상을 호령하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레이먼드 밀라네어였다면…….”

한 귀족이 말을 하다가 싸늘한 기운에 입을 멈추었다.
도로테아의 서슬 퍼런 시선이 그를 향했다.

“……클라크 공?”

자리에 있던 귀족들은 숨을 들이켜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금까지 크게 웃던 황제 도로테아가 다른 사람이 된 듯 얼굴을 굳히고 손에 들고 있던 붉은 체리를 툭 놓았다.
웃음소리 가득하던 정원은 순식간에 귀가 먹었나 의심될 정도로 차가운 정적에 빠졌다.
레이먼드. 도로테아 앞에선 절대 내뱉어선 안 될 금기어.
도로테아는 한쪽에 비스듬히 놓여 있던 그녀의 검을 집어 들었다.
제 실수를 깨달은 클라크가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어깨를 떨었다.

“폐, 폐하, 제 말뜻은 폐하께서 레이먼드보다 훨씬 훌륭하시다는…….”

서걱!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얀 테이블보와 음식이 담긴 접시에 붉은 피가 튀었다.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은 경악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에단.”

“예, 폐하.”

“치워.”

“예, 폐하.”

도로테아의 곁에 서 있던 에단은 병사들을 불러 시체를 거둬 가게 했다.
클라크의 시체가 치워지자 도로테아는 다시 자신의 자리에 기대어 앉으며 피가 튄 와인을 들이켰다.

“왜 다들 말이 없지? 즐겨.”

도로테아는 싸해진 귀족들의 분위기에 피식 웃었다.
* * *
도로테아는 불면증을 앓았다.
레이먼드의 사후 그녀의 불면증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낮에는 향락과 사치에 취해 있었지만, 밤이면 그녀를 달랠 것이 없었다.

테온은 늘 방에 틀어박혀 그녀의 곁에 없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황위에 오른 후, 그녀는 갈 길을 잃었다.
그녀에겐 더 이상 질투하며 가진 것을 빼앗을 레이먼드도 없었고, 목적으로 삼을 황위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까지 가져본 적 없던 희귀한 것들을 탐하기 시작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얻으면 텅 빈 부분이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으론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았고 그 메워지지 않는 공허감에 그녀는 지쳐 있었다.

“백성들이 여전히 내 욕을 하고 다닌다지.”

도로테아는 조소했다.

“무지한 자들이 지껄이는 헛소리입니다.”

에단이 답했다.

“아직도 죽은 귀족들이 충신이라고들 떠든다지?”

“케케묵은 전통에 눈이 먼 자들입니다.”

에단은 그렇게 도로테아를 위로했으나 짙게 그늘진 도로테아는 변화가 없었다.

“……그날 이후, 테온은 날 제대로 봐주지 않아.”

레이먼드의 죽음 후 테온은 줄곧 도로테아를 상대하지 않았다.
강제로 올린 결혼식, 황실의 공식 석상에서도 테온은 도로테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더랬다.
희귀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꽃다발을 만들어 바쳐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보석으로 반지를 만들어 선물해도 테온은 그녀의 품에 안기는 법을 몰랐다.

그가 단 한 번만 웃어준다면, 내 손을 잡아준다면 이 끝없는 공허감과 불면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무자비한 폭군 도로테아였지만 사랑하는 테온만큼은 어떻게 할 줄 몰랐다.
나의 사랑, 내가 바라는 사람.
도로테아는 테온을 겁박하지도, 강제로 침대에 묶어 들이지도 못하고 홀로 전전긍긍했다.

테온의 마음을 얻고 싶은데, 그것만큼은 결코 얻을 수가 없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테온을 웃게 할 수 있을까?
그가 비단 찢는 소리에 웃는다면, 그의 앞에서 세상 모든 비단을 찢어줄 텐데.
대체 어떻게 해야 테온이 나를 바라봐 줄까?

“폐하, 밤이 늦었습니다. 침대로 가시지요.”

“에단.”

“예, 나의 폐하.”

“테온은 나를 증오하는 것이겠지.”

도로테아는 허무한 눈으로 창밖을 채운 캄캄한 새벽을 멍하니 응시했다.
에단은 도로테아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괘념치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세상 가장 높은 곳에 계시며 모든 것을 가진 분입니다.”

“하나…… 테온을 떠올리면 정작 세상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해.”

“폐하. 제가 곁에 있습니다. 저는 폐하를 영원히 모시며…….”

“그런 위로는 하지 않아도 괜찮아, 에단.”

다른 이들이라면 듣고 기뻐할 말이었으나 도로테아는 그마저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도로테아는 그가 위선과 가식으로 무장한 사람임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에단의 위로는 알맹이 없는 빈말에 불과했다.
허무하고, 공허함만 더해주는 빈말.

“…….”

에단은 그런 도로테아를 바라보더니 입을 떼었다.

“보아하니, 프리드 공은 줄리아 영애에게 또 서신을 보낸 모양입니다.”

그의 말에 도로테아는 속절없이 가슴이 내려앉았다.

“벌써 열 번이 넘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테온은 줄리아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도로테아에게 말도 하지 않고, 1년에도 몇 번이나.

테온은 줄리아의 편지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다가, 줄리아의 편지가 도착하면 그전에 없던 기쁜 표정으로 받아보고, 편지를 읽고 나면 슬픔에 잠긴 얼굴로 읽고 또 읽다가 품에 넣었다.

그 일련의 과정은 도로테아가 꿈꿨던 관심과 사랑이었다.
도로테아 밀라네어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
딱지가 내려앉은 흉터를 뜯어내듯 다시 가슴이 아파왔다.

“프리드 공의 편지를 중간에서 빼돌려 볼까요?”

“아니 에단, 그럴 필요 없어.”

도로테아는 눈을 감았다.
이미 줄리아를 향한 끝없는 질투가 그녀의 가슴을 갉아 먹어 더 큰 구멍을 만들고 있었다.
편지 내용을 봐봤자 상처받는 건 도로테아였다.
도로테아는 그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에단.”

“예, 폐하.”

“궁전을 새로 지어야겠어.”

도로테아가 감았던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테온의 환심을 사는 방법은 오직 그녀가 가진 것들을 바치는 것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을 지어 선물한다면 테온도 나를 돌아봐 줄 거야.
아름다운 궁전에서 지내다 보면 분명 기분이 좋아질 거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가와 장인, 정원사…… 필요한 모든 전문가를 불러 모으고 최상의 자재만을 사용하도록 해.”

도로테아는 역사에 길이 남아 인류의 유산이 될 만한 궁전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유산에 자신의 사랑을 새기겠노라 다짐했다.
그것이 폭군의 죄인지 미처 알지 못한 채.
* * *
그러나 테온은 도로테아의 결정에 분노했다.

“제가 폐하께 궁전을 지어달라 하였습니까!”

아니야, 테온, 모두 널 위한 거야.
나는 네가 기뻐할 줄 알고…….

“폐하께서는 완전히 눈이 머셨습니다!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계시다고요!”

테온은 그녀의 모든 선물을 증오했다.
남들은 갖지 못해 안달인 그 모든 것을…….

“에단 브론테, 그자 먼저 쳐내십시오.”

“테온, 에단은 내가 황녀이던 시절부터 나를 가까이서 보필해 온 충신이다.”

“그는 충신이 아니라 간신입니다.”

“내가 그를 내치면, 그럼 그땐 날 사랑해 줄 수 있나?”

도로테아가 물었다.
테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은 언약으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테온.”

“하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폐하를 증오하는 일은 없겠죠.”

“날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줄리아 델레바인 때문인가?”

도로테아는 결국 그토록 증오하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테온의 붉은 눈동자가 동요했다.
그 작은 동요가 도로테아의 심장에는 지진만큼이나 큰 충격이 된다는 걸 그는 몰랐을까?

“저는…… 줄리아 델레바인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테온의 변명에 도로테아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내가 줄리아를 해칠까 봐 감싸는 건가?
폭군인 내가 네 사랑을 죽일까 봐?
도로테아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줄리아를 이렇게나 사랑한다는데, 테온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행복을 위해 줄리아에게 보내주는 게 맞을까?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녀는 테온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를 놓는 순간 도로테아는 세상과 연결된 모든 끈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테온이 없으면 나는 왜 살아야 하는 거지?
이미 부와 권력, 명예까지도 모두 내 삶에서 빛을 잃었는데.

테온이 없다면 그녀 인생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도로테아라는 사람의 존재 의미조차도.
그러므로 그녀는 추하게도 테온을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줄리아를 향한 증오도 커져갔다.

“줄리아가 제도에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해.”

도로테아는 결국 줄리아가 테온을 절대 만나지 못하도록 제도 출입을 금지했다.

“델레바인 가문의 작위를 회수하겠어.”

얼마 뒤, 줄리아가 갖고 있는 작은 귀족 작위마저도 빼앗았다.
그로서 줄리아는 아주 평범한, 아니, 평범하다고 하기에도 하찮은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하면 기분이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녀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더러워졌다.

줄리아의 작위를 빼앗은 다음 날 아침, 그녀는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치장하며 거울 앞에 앉았다.
정교한 뻐꾸기시계, 금으로 만든 독수리 조각상, 향유를 담아둔 형형색색의 유리병, 화려한 사치품들이 거울 속에 비쳐 반짝였다.
그녀의 목에는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머리카락은 화려한 꽃 모양의 헤어 바인으로 치장했으며, 귀가 무거울 정도로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황제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전신은 제 권위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어느 때보다 추하고 흉측해 보였다.
수척한 얼굴 위로 구멍처럼 푹 팬 눈두덩이와 검을 제대로 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른 몸, 비 온 후 호수처럼 탁한 눈동자.
도로테아는 울컥 화가 치솟아 거울을 깨뜨리고 싶어졌다.
귀에 달린 커다란 보석이 반짝이며 그녀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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