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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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단은 오랜만에 별궁을 방문했다.
하르크가 왔다 갔던 날 이후로 도로시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에단 도련님.”

오랜만에 찾아간 별궁 사람들은-에단을 본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기쁜 얼굴로 에단을 맞았다.

“볼 때마다 더 멋있어지시네요, 도련님.”

클라라는 에단을 도로시에게 안내하며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에단은 하루가 다르게 커 가고 있었다.
그는 점차 소년의 얼굴을 벗어나 청년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었다.
클라라의 칭찬에 에단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별궁 정원에는 딸기와 블루베리를 바구니에 담는 하인들이 있었다.

하인들은 에단을 보고 잠시 멈춰 그를 구경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머무는 건 아주 흔한 일이어서 에단은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도로시를 만나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는 클라라의 뒤를 따라 별궁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복도 쪽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파이를 왜 방구석에 숨겼다가 썩혀!”

도로테아?
평소보다 큰 도로시의 목소리에 에단은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도로시는 어떤 두 아이와 서 있었다.
이 근방 귀족들을 다 꿰고 있는 에단도 본 적이 없는 이들이었다.

“아껴 먹으려고 했던 거예요. 포가 먹고 싶다고 그래서.”

“이 곰팡이가 핀 걸 먹으려고 숨겼다고?”

“생각날 때마다 한 입씩 먹으려고…….”

도로시보다 키가 살짝 큰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삐죽삐죽 뻗친 억센 갈색 머리에 얼굴에 가득한 주근깨. 구부정한 자세.

교양이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듯한…… 남자애?

‘누구지?’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한 건 귀족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걸 먹으려고 숨겼다고?”

도로시의 추궁에 낯선 얼굴의 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로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아깝잖아요. 남았는데. 버릴 거예요……?”

“…….”

초롱초롱한 두 아이의 눈빛에 도로시가 주춤했다.
그러자 두 아이가 도로시의 팔을 덥석 잡고 매달렸다.
그 모습을 본 에단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거기 곰팡이 핀 부분만 떼어서 먹으면 된다니까요? 겉에만 그런 거고 안에는 괜찮아요.”

“안 돼! 썩은 건 그냥 버리는 거야. 알겠어?”

“부자 같아…….”

“……그래, 나 부자야. 그러니까 먹고 싶으면 썩은 거 끌어안고 있지 말고 나한테 말을 해. 얼마든지 먹여줄 테니까.”

도로시의 말에 두 소년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도로시를 꽉 끌어안았다.

“황녀님, 멋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에단이 클라라를 올려다보았다.

“……누구예요?”

저 버러지들은?
에단의 물음에 클라라가 낯선 이방인의 존재를 설명해 주었다.
얼마 전 황녀님께서 친히 데려와 별궁에서 지내게 한 아이들이라고.
아버지가 도박 빚을 잔뜩 져서 광산으로 팔려 갈 뻔한 걸 구해줬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결국 근본 없는 부랑아라는 거잖아……?’

에단의 긴 속눈썹이 아래로 깔렸다가 다시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그런 아이들이 황녀님이랑 어울려도 괜찮아요?”

에단은 순수한 호기심을 가장하고 클라라에게 물었다.
그에 클라라가 웃었다.

“황녀님이 좋아하시니까요.”

클라라는 그저 도로시를 흐뭇하게 보며 말했다.
조이와 포가 들어온 뒤 도로시는 조금 더 활발해졌다.
말도 많아지고 검술 말고 다른 일들에도 눈을 돌리고.
글자도 가르치고 예법도 가르치고.

“하지만 황실에서 알면 큰일 날지도 몰라요.”

에단이 걱정스러운 듯 클라라에게 말했다.
황녀가 귀족 영애들과 사교 모임을 가져도 모자랄 판에 부랑아를 친구로 두다니.

“황녀님이 좋아하시는걸요. 황녀님껜 저런 친구가 필요해요. 늘 혼자 지내셨으니까.”

그에 에단의 하얀 손이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내 에단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고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렇군요. 황녀님이 좋아하신다니 저도 저 친구와 친해지고 싶어요.”

“어머, 에단 도련님도요? 다 같이 놀면 좋죠!”

사근사근한 에단의 목소리에 클라라가 반색했다.
그때 도로시가 제게 들러붙은 소년을 떼어내더니 홱 돌아 클라라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에단은 마침 도로시와 눈이 마주쳤고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에단.”

“잘 지내셨어요, 황녀님?”

“보다시피.”

도로시가 뒤쪽에 있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그녀가 들고 있는 접시엔 곰팡이가 핀 사과 파이 한 조각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에단, 이 문제 먼저 처리하고 와야겠어. 조금만 기다려 줄래?”

“물론이죠.”

에단의 말에 도로시가 슈테판과 함께 어디론가 가버렸다.
클라라도 별궁에 자주 왔으니 편하게 있으라며 도로시의 뒤를 따라갔다.
에단은 멀어지는 도로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로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고개를 돌리고 가느다란 눈으로 아까 그 부랑아 소년을 보았다.

그는 입술을 비죽 내민 채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옆에는 햄스터 같은 얼굴로 울멍거리는 작은 꼬마가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에단은 조용히 그들을 살피며 표정을 깔끔하게 정리한 뒤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녕? 처음 보는 얼굴이네?”

그는 상냥한 미소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주 에단 브론테스럽게.
그러자 두 사람은 잘생긴 소년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공작가 도련님!”

소년은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나를 알아?”

“검술 대회에서 봤죠!”

워낙에 잘생긴 얼굴이라 잊으려야 잊을 수 없어 조이는 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아…… 검술 대회.”

에단이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다시 빙그레 웃었다.

“나도 너희에 대해 들었어. 아버지 빚 때문에 여기 왔다고.”

“맞아. 황녀님이 우릴 구해주셨어요.”

“맞아요!”

두 사람은 뭐가 자랑스러운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너희는 황녀님을 위해 뭘 해드리지?”

에단이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우리? 우리는 글자를 배우는데. 이제 대충 철자를 보면 읽을 줄 알아요!”

“글자를 배운다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에단의 아름답게 뻗은 눈썹이 들려 올라갔다.

“그거 말고 역사도 배워요. 재밌어요.”

포가 옆에서 수줍게 거들었다.

“윽, 나는 역사 싫은데, 그래도 배워야 하니까 열심히 하는 중이에요.”

조이가 표정을 찌푸렸다가 금방 웃음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에단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듯이 차가워졌다.

“황녀님이 거두어주셨는데 은혜를 모르는구나, 너희는.”

에단의 싸늘한 말에 조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서 일하려면 건강해지고 예법을 배우고 글자를 알아야 한대서요.”

조이는 나름 도로시가 시키는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중이었다.
물론 조이 생각에도 지금의 생활이 너무 좋은 게 아닌가 싶기는 했다.
하지만 조이가 의문을 표할 때마다 도로시는 늘 단호하게 공부나 하라고 선을 그었다.
그에 반박할 만큼 황실의 논리를 아는 게 아니었으므로, 조이는 입을 다물고 도로시가 시키는 걸 할 수밖에 없었다.

“청소, 빨래, 짐을 나르거나 물을 떠 오거나 침대보를 정리하는 일도 하지 않아?”

“그건 여기 사람들이 이미 다 잘 하고 있어서 내가 할 필요가 없대요.”

조이는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두 사람은 주방에 물을 길어주려다가 한번 된통 혼난 이력이 있었다.
새로 들어왔는데 갑자기 일에 끼어들면 이곳 사람들이 이미 정해둔 규칙이 흐트러진다나.

“여긴 엄격하고 까다로운 곳이라고요.”

조이와 포는 이곳이 자신들이 함부로 끼어들 만큼 유한 곳이 아니라고 했다.

에단은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발을 대리석 바닥에 가볍게 두들겼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일정한 박자로 탁, 탁, 탁 두들기는 소리가 울렸다.
에단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풀어져 있던 자신의 소매 단추를 잠갔다.
아주 조용한 복도에, 느른한 에단의 목소리가 흘렀다.

“있지. 우리 집에서 예전에 사냥개를 키웠거든? 귀도 꼿꼿하고 등도 늠름해서 아버지께서 예뻐하셨어. 좋은 고기도 던져주고, 매일 털도 빗겨주셨지. 그런데 정작 숲에 데려가니 그 녀석 사냥이 영 시원치 않은 거야.”

에단이 제 소매 단추를 조용히 만지작거리며 눈을 들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조이와 포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래서 그 개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

그러자 조이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에단을 보았다.

“모르겠는데요?”

에단이 그 한심한 눈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에게 한발 다가섰다.
에단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조이는 숨을 참았다.

“어느 날, 그 개가 우리 집 식탁에 올라왔어. 펄펄 끓는 솥에다 삶아 가죽이 다 벗겨진 채로.”

에단이 나직이 그의 귀에 속삭였다.
조용한 경고. 우아한 위협.
그런데.

“그래요? 개는 맛있어요? 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개는 불쌍해서 못 먹는데. 포가 강아지를 좋아하거든요.”

조이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포는 개를 먹었다는 말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선 조이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더니, ‘멍멍이가 불쌍해’라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에 에단의 얼굴에 쩍, 금이 갔다.
그러나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수준이 맞질 않네.”

“아……. 황녀님이 그래서 우리 공부를 시키나 보다.”

조이가 포를 바라보며 ‘공작가 도련님도 이러는데 황녀님은 오죽 답답하시겠어?’라며 중얼거리자 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두 사람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를 가지고 노는 건가? 아니면 정말 멍청한 건가?’

설마 이런 무식쟁이들이 그를 가지고 놀 수 있을 리 없다.
에단은 다시 표정을 갈음한 뒤 입술을 떼었다.

“그럼 너희는 아무것도 안 하고 황녀님께 기생충처럼 붙어 있었어?”

“기생충?”

“기생충이 뭐야?”

조이와 포가 동시에 에단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에단은 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내 수준이 어디까지 떨어져야 하는 거지?’

여기서 저들에게 기생충을 설명할 수도 없는 일.
천박하게 ‘너희 변에서 기어 나오는 벌레’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지 않은가.
백번 양보해 그렇게 설명을 해준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저 멍청한 부랑아들은 또 자기 똥에서 그런 벌레가 나온 적 있다는 더러운 얘기에나 관심을 두겠지.
에단은 말싸움도 지성이 있는 자와 할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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