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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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가 포를 데리고 쭈뼛쭈뼛 소파에 앉았다.
마침 타이밍이 좋게 도로시가 불렀던 의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황녀님?”

“저기 저 애들 건강 상태 좀 봐주고, 치료가 필요하면 해줘요.”

도로시가 조이와 포를 가리켰다.

“예, 알겠습니다.”

의사는 조수와 함께 소파로 가서 두 사람의 몸을 살폈다.
눈가에서 흐르는 진물과 피부에 난 두드러기, 부스럼. 몸에 난 상처와 멍.
의사는 그들의 몸을 구석구석 살피고는 약을 처방했다.

“무엇보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들었지? 너희가 해야 할 일이야. 신선한 채소와 과일, 투정 부리지 않고 챙겨 먹기.”

도로시가 조이와 포에게 말했다.

“그게 일이에요?”

“만약 너희가 몸이 약해서 병에 걸렸다가 나한테 옮기면 큰일이잖아? 벼룩이나 이를 옮기는 것도 질색이야. 황실의 궁전에서는 아프고 약한 사람은 일할 수 없어. 그게 법도야.”

“법도……?”

“규칙이라고.”

“아아.”

법도라는 단어를 쉬운 단어로 바꿔주자 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서는 하인들도 건강하고 깨끗해야 하는구나.
하긴 던컨 백작이나 브론테 공작의 하인들만 봐도 얼마나 깨끗한데.
조이는 도로시의 명령을 납득했다.

“클라라, 오늘 내 저녁 식사에 저 아이들 것도 함께 준비해 줘. 잘 먹는지 아닌지 봐야겠어.”

“예, 황녀님.”

클라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 * *

“슈테판, 혹시 오늘 어디 다치거나 하진 않았지?”

저녁 식사를 위해 응접실로 가는 길.
도로시는 뒤따라오는 슈테판에게 물었다.
조이와 포를 챙기느라 쿨하게 돌아서기는 했지만 혼자 두고 떠나는 게 마음 가볍지는 않았었다.
그러자 슈테판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설마 걱정한 거냐는 미소였다.

“걱정은 아닌데 혹시나 해서. 당연히 혼자서도 감당할 거라고 믿고 있었지. 안 그랬으면 두고 못 갔을걸.”

도로시는 서둘러 슈테판에게 변명했다.
당연히 실력은 믿었는데. 그래도 걱정이 되잖아.
그러자 슈테판이 도로시를 번쩍 들어 올려 안았다.
다친 데 하나 없이 건강하다는 증명이었다.

“아, 알았어! 건강한 거 알겠으니까 내려놔.”

도로시는 당황해서 슈테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슈테판한테 쉽게 쉽게 안겼는데, 요즘은 그에게 안기는 게 기분이 묘했다.
몸이 커지다 보니 애기 취급받는 게 낯설어졌달까.

슈테판에 비하면 아직 한참 작지만 열두 살이 남의 품에 안길 나이는 아니지.
도로시의 재촉에 슈테판이 사뿐히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발이 땅에 닿자 도로시는 아까보다 좀 더 빨라진 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황녀님.”

도로시가 오후에 얘기했던 대로 테이블엔 조이와 포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도로시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아직 오지 않은 두 사람을 기다렸다.
곧 하인의 안내를 따라 조이와 포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우와아아!”

동시에 두 아이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미친, 저게 식탁이야?”

조이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으며 어마어마한 크기의 테이블을 보았다.
테이블이 그녀가 살던 집 크기만 했다.

“식탁 위에서 달리기해도 되겠다!”

포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소리치더니 후다닥 달려왔다.
그들은 응접실 천장에 그려진 아름다운 천장화를 보고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휴, 저녁 시간 전까지 얼마나 난리였다고요.”

하인이 도로시에게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두 사람은 이 커다란 궁전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그들에겐 궁전의 기둥도, 벽면에 있는 부조도, 바닥에 깔린 카펫도, 창가에 걸린 커튼도 온통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다들 흥분하지 말고 앉아.”

도로시는 조이와 포를 진정시키며 두 사람을 위해 마련된 자리를 가리켰다.
조이와 포는 도로시의 말에 바로 자리로 달려왔다.
한번에 의자에 앉은 조이와 달리 키가 작은 포는 의자에 올라 앉으려고 낑낑댔다.
결국 슈테판이 나서서 포를 의자에 앉혀주었다.
테이블 위로 포의 얼굴만 빼꼼 보였다.

“아무래도 의자에 뭐 좀 올려서 앉아야겠다.”

하인이 포의 의자에 두꺼운 방석을 몇 겹 더 깔아주자 그제야 포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두 사람은 도로시의 앞이라 그런지 신나게 떠들지는 못하면서도 넓은 테이블 위를 구경하느라 고개를 가만히 두지 못했다.

“왜 포크랑 스푼은 여러 개가 있는 거지? 떨어뜨리면 새 거 쓰려고?”

“이거 진짜 은이야?”

조이와 포가 테이블을 보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뭐가 저렇게 신기한지.’

도로시는 두 사람을 더 신기하게 여기면서, 하인에게 음식을 내오게 했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아주 평범한 양송이 수프, 평범한 빵과 바질 올리브 소스, 평범한 염소 고기, 평범한 샐러드와 피클이었다.
그러나 두 아이는 입을 벌린 채 테이블에 놓이는 음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식탁 밑으로 흥분한 다리가 공중에서 흔들거렸다.

“고기! 고기다, 누나! 부자 접시야!”

포는 스테이크 접시를 가리키며 조이에게 떠들었다.
접시가 이렇게 알록달록한 색으로 차다니!
매일 하나의 음식으로 하루 끼니를 때웠던 그들에게는 놀라운 식사가 아닐 수 없었다.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포의 입가엔 침이 고여 있었다.
겨우 그릇 몇 개 나온 걸로 두 사람은 정신이 아득해진 듯 혼란스러워했다.

‘만찬장 가면 기절하겠네.’

메인 하나에 몇 가지 곁들임이 있는 걸 가지고 이러니.

“지금부터 너희한테 식사 예절을 알려줄 거야. 귀족과 황족은 식사를 하는 데도 예의가 있어. 나를 모시려면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해.”

도로시의 말에 조이와 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달려들어 먹고 싶지만 이건 황녀님의 음식이었으니 말을 잘 들어야 했다.

“일단 가장 바깥쪽 포크와 스푼을 쓰는 거야. 보통 빵과 수프를 먼저 먹고, 샐러드를 곁들이기도 해.”

도로시가 식사 순서를 알려주었다.
배고프다고 못 참고 먹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은 생각보다 순순히 도로시의 가르침을 따라왔다.
도로시가 수프를 뜨자 두 사람은 똑같이 수프를 떠서 입에 넣었다.

“맛있다!”

포는 허겁지겁 수프를 떠먹었다.
두 사람의 얼굴엔 행복감이 가득해서 보는 도로시가 흐뭇해질 정도였다.
빵도 샐러드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도로시가 알려주는 순서에 따라 두 사람은 메인 요리를 들었다.
포는 아직 어려서인지 나이프질에 서툴렀는데 그럴 때면 조이가 포를 먼저 도와주고 자신의 것을 잘라 먹었다.
조이는 식사 도중 틈틈이 제 몫의 음식을 포의 접시에 덜어주기도 했다.

“급하게 먹지 말고, 천천히 먹어.”

“네!”

그렇게 대답했으면서, 두 사람의 먹는 속도는 도로시의 몇 배는 되었다.
도로시가 스테이크의 반도 채 먹지 못했을 때, 두 사람의 접시는 깨끗이 비어 있었다.
포만감에 행복해하는 조이의 접시는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포 또한 숟가락을 쪽쪽 빨며 남아 있지도 않은 바질 페스토를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맛있다.”

포가 숟가락을 문 채 중얼거렸다.
배가 빵빵해졌지만 두 접시 세 접시도 열 접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매일매일 식사 예절 배웠으면 좋겠다, 누나.”

포가 조이에게 속삭이자 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론 자주 먹을 테니까 욕심부리지 마.”

도로시가 두 사람의 접시에 스테이크를 한 점씩 더 덜어주며 말했다.
더 줄 수도 있지만 더 먹였다간 체하겠어.

도로시의 고기 한 점이 각자의 접시로 돌아가자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황녀님은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착한 사람이에요.”

조이의 눈이 그렁그렁했다.

“고기 준다고 착한 사람이야?”

“고기만 준 게 아니잖아요. 그 빌어먹을…… 아니, 아빠한테서 구해주고, 또 여기서 지낼 수 있게 해주고, 옷도 새 옷 입혀주고, 의사도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조이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꼽아 보였다.

“맞아요! 황녀님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야!”

포도 활짝 웃으며 힘껏 고개를 까딱였다.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이라니.
도로시는 그 말이 자신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라면 몰라도.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둔 것처럼, 어색하고 낯설었다.
혹시 너희도 나중에 내 모습에 실망하지는 않을까?

지금은 착해 보여도, 사실은 나쁜 사람인데.
그녀는 두려웠지만 동시에 고마웠다.
늘 혼자 앉아 있던 식탁이 오랜만에 따뜻하게 물든 것 같았다.
도로시는 웃으며 남은 식사를 마쳤다.
도로시가 포크를 내려놓자 아까부터 빈 접시를 긁으며 눈치를 보고 있던 조이가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우리 이제 일어나면 돼?”

“아직 식사 안 끝났어.”

그 한마디에 조이와 포의 눈이 매처럼 번뜩였다.
아직도 안 끝났다고?

“디저트 남았어.”

“디저트!”

들어만 봤어, 디저트!
조이와 포는 동시에 눈을 맞추며 부푸는 가슴을 낮추려고 애썼다.
도로시가 주방장에게 신호를 보내자 이내 곧 커다란 접시가 테이블 가운데에 놓였다.
그리고 조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야.”

도로시는 디저트를 소개하며 말했다.
접시에는 얼굴보다도 큰 크기의 사과 파이가 통째로 놓여 있었다.

“이건 예절 필요 없으니까 그냥 먹어.”

오늘 잘해줘서 주는 상이야.
그렇게 덧붙이려던 도로시가 말을 멈추었다.
조이 때문이었다.

“이…… 빌어먹을.”

조이가 입술에서 나오는 나직한 욕설을 짓씹었다.
그러나 욕설이 묻은 그녀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눈두덩이는 빨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진짜 황녀님은……!”

“욕하면 쫓아낸다고 했는데.”

“쫓아내든가요! 누가 그러니까 욕 나오게 친절하라고 그랬나! 쫓겨나도 나한텐 이미 훨씬 이득이거든요!”

“누나 울어……?”

“안 울어!”

조이가 손목으로 눈가를 쓱쓱 닦아내곤 포에게 소리쳤다.

“이씨, 내가 주려고 했는데.”

“너 좋으라고 주는 거 아니야. 내 간이랑 내 쓸개 좋으라고 주는 거야.”

도로시가 차례로 조이와 포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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