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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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는 초조하게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바퀴벌레처럼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았다.

“정신 사나워서 원! 가만히 좀 앉아 있거라!”

“황녀는 어디 갔냐니까!”

도로시는 조이를 별궁에다 내버려 두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조이는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도로시는 ‘감자한테 간과 쓸개 받아낼 거니까 깨끗이 씻겨서 옷 갈아입혀 놔’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때문에 조이는 별궁의 하인들 손에 붙들려 더러운 몸을 한 시간이 넘도록 씻어냈다.

얼마나 박박 씻었는지 피부가 벗겨지는 줄 알았다.
그러더니 그들은 조이에게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를 입혀놓았다.
도로시의 것으로 보이는 원피스는 키가 큰 조이에게 작아서 기장이 무릎 위로 껑충 올라가 있었고 소매도 짧았다.
조이는 자꾸 위로 올라가는 원피스를 몇 번이나 벅벅 긁어내며 아래로 내렸다.

황녀 같은 치마를 입고 이상한 향이 나는 오일을 머리에 바른 탓에 머리에서 꽃냄새 같은 게 풀풀 났다.
부자 옷이 싫은 건 아니지만 처음 입는 옷이 어색하고 나아가 수치스러웠다.
입어서는 안 될 것을 입은 느낌에 죄를 짓는 것도 같았고, 자신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 빤하니 비웃음을 살 것만 같았다.
게다가 겉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황녀는 대체 어쩔 생각이지……?’

조이는 초조하게 부르트고 갈라진 입술을 침으로 적셨다.

‘설마 정말로 내 간이랑 쓸개를 빼갈 생각은 아니겠지?’

이미 동생을 구해달라고 했고 거래가 성사되었으니 말을 바꿀 수는 없었다.
조이의 아버지 거트는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조이에게 손찌검을 하며 ‘사람은 태어나서 한 입으로 두말하면 안 된다’고 말했었다.
한 입으로 한 말 했는데도 두말하지 말라고 때릴 때는 억울하기도 했다.

‘지는 한 입으로 백 말 하고…….’

한 입으로 한 말만 하는 건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근데 나 없으면 포는 어떡하지? 아빠 새끼랑 단둘이 살면 어떡해?

조이는 기껏 빗어놓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동생을 걱정했다.
도망친 엄마를 찾아가서 나는 이제 돌보지 않아도 되니까 포만 돌봐주면 안 되냐고 부탁할까?

심각하게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멀리서 마차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별궁의 하인이 조이에게 나오라고 하더니 마차에서 내리는 도로시의 앞으로 데려갔다.
도도한 발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린 도로시는 곧바로 조이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도로시 앞에 선 조이는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신 껑충 올라가 무릎이 슬쩍 보이는 원피스를 몇 번이고 주먹을 당겨 내렸다.

‘옷차림도 부끄럽고 이게 뭐야!’

조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녀는 그녀의 복장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턱을 만지작거렸고, 곰탱이 같은 기사는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근성이 없어 보여.”

턱을 만지작거리던 도로시는 뭘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조이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와.”

도로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조이에게 한마디 하고는 아나스타스궁 안으로 들어갔다.
슈테판은 멀뚱히 서 있는 조이에게 어서 도로시를 따라가라는 듯 눈짓했고, 철저한 을인 조이는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도로시의 뒤를 따랐다.
도로시가 조이를 데려간 곳은 집으로 써도 될 만큼 커다란 옷장이 있는 방이었다.

도로시가 오기가 무섭게 하인들은 몇 개나 되는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도로시는 확실히 귀족들 가운데 검소한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넓은 드레스 룸이 필요했다.
옷장 안에는 옷들이 하나하나 가지런히 걸려 있었는데, 너덜너덜한 옷을 구석에 대충 개켜두거나 낡은 바구니에 쑤셔서 모아두는 조이네 집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이었다.

옷들은 마치 귀하신 몸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하게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지, 옷들은 정말 귀하신 몸이겠지.

조이는 저 옷들이 제 몸값보다도 비쌀 것이라고 추측했다.
도로시는 그런 귀하신 몸들을 까다로운 눈으로 둘러보더니 한쪽에 있던 갈색 바지와 하얀 블라우스를 꺼냈다.

허리까지 오는 하이웨스트 바지는 아래 품이 넉넉했지만 주름 각이 서 있어 깔끔해 보였고, 장식 없는 기본형의 블라우스는 얼룩 없이 하얗고 깨끗했다.
도로시는 옷과 조이를 번갈아 보며 대충 기장을 가늠해 보았다.

“갈아입혀.”

도로시의 한마디에 사람들이 조이를 파티션 뒤로 데려가더니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혔다.

‘뭐 별거라고 옷 한번 갈아입는데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달려들 일인가?’

그래도 나은 건 갈아입은 옷이 아까 옷보다 덜 화려하고 움직이기도 편하다는 점이었다.

“어때?”

“아까보다는 나아. 아까 옷은 너무 비싸 보이고 부담스러웠어.”

조이는 지금 입은 옷이 장식도 적고 무난해 보였으므로 원피스보다 저렴한 옷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원피스보다 지금 입은 옷이 세 배는 더 비싸다는 걸 모르는 편이 낫겠지.’

도로시는 조이를 보고 피식 웃었다.
잔뜩 기가 죽고 창피해하던 아까와 달리 지금의 조이는 조금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이 옷을 입고 광산에 갈 수는…….”

“누가 그 옷 입고 광산 가래?”

그 비싼 옷을 입고 광산에 왜 가?

“그럼?”

“간이고 쓸개고 다 준다고 그랬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가려면 간이랑 쓸개 내놓고 가야 돼.”

“…….”

도로시의 말에 조이가 체념한 듯 눈을 감더니 무릎을 딱 꿇었다.

“……뭐 하는 짓이야?”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한 번에 죽여줘.”

“……?”

조이가 고개를 툭 떨구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올려놓았다.
설마, 목을 치라고 고개를 내놓는 거야?
도로시는 예상을 벗어나는 무식한 각오에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못 했다.
눈치 없기로는 레이 버금가는군.
도로시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너, 이제부터 내 밑에서 일하라는 뜻이야.”

“그럼 백작은?”

조이가 떨구었던 고개를 바짝 들었다.
황녀 앞에서 백작을 두려워하는 꼴이라니.
도로시가 팔짱을 끼곤 조이를 내려다보았다.

“백작이 세겠어, 내가 세겠어?”

“백작.”

그 대답에 도로시의 미간이 팍 구겨졌고, 곁에 있던 슈테판과 하인들의 얼굴도 굳었다.

“왜? 백작이 더 크잖아?”

도로시는 황녀라 해봤자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녀에 불과했다.
그러니 백작이랑 싸우면 당연히 이 꼬마가 진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도로시는 검술 대회 결승에 올라갈 정도로 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백작이 한 대 때리면 죽을걸?
도로시의 짧은 주먹은 백작한테 닿지도 않을 거야.

조이는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고, 도로시는 상식을 벗어난 당당한 어리석음에 혀를 내둘렀다.

“널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하니?”

“왜? 나 이래 봬도 알 건 다 알아.”

조이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가슴을 펴며 뻐겼다.

‘하, 그래. 뭐 잘 아시겠지.’

도로시가 대충 수긍하는 표정을 짓자 조이가 꿇었던 무릎을 펴며 벌떡 일어나더니 뭔가 대단한 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황녀님은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알아?”

조이의 질문에 뒤에 있던 클라라와 슈테판은 물론이고 모두가 일순 정적에 빠졌다.
클라라와 슈테판의 눈동자가 슬쩍 도로시를 향했다.
그들은 아직 도로시가 어른들의 비밀을 모르는 순수한 황녀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청정한 바닷가의 별궁에서는 그런 것을 가르쳐 본 적이 없으니.

“모르지?”

“알거든.”

모르긴 왜 몰라. 나 인생 2회차에 유부녀였던 사람이거든?
물론 테온과 밤을 보내본 적은 없지만 알 건 다 안다고!
그러나 도로시의 대답에 클라라와 슈테판이 서로 눈을 맞췄다.
그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도로시의 뒤통수에서도 느껴졌다.

“황녀님이 어떻게 아시죠? 혹시 황새가 아기를 물어다 준다고 믿고 계시는 거 아닐까요?”

클라라가 입 모양으로 속닥거리자 슈테판이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 들려, 클라라. 슈테판, 너는 왜 고개를 끄덕이는데!’

“앞으로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그런 쓸데없는 아는 척하지 마. 금지야.”

도로시의 말에 조이는 제가 승리하기라도 한 듯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안다면서 말은 못 하네, 황녀님?”

“그런 거 얘기하면서 신나 하는 네가 더 유치해. 그리고, 이제부터 나한테 반말하지 마.”

“삐지셨어요, 황녀님?”

“아니거든?”

앞으로 별궁에서 지내면서 지켜야 할 규칙을 알려주려는데 조이가 이상한 이야기를 꺼내서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삐진 게 아니라 원래부터 지적하려고 했던 거라고!
이전부터 그 선 넘는 말투가 거슬려서 단단히 고쳐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가만 놔두면 재미는 있겠지만, 저러다가 언젠가 누구한테 잘못 걸리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욕설 금지. 앞으로는 철저하게 예법을 익히도록 해.”

도로시는 챙겨두었던 간단한 예법 목록을 품에서 꺼내 조이에게 건넸다.
그러나 조이는 목록을 받지 않고 멀뚱히 서 있었다.

“나 글자 못 읽어요.”

“……이런, 가르칠 게 생각보다 더 많잖아.”

평민 가운데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럼 일단 글자부터 먼저 가르쳐야겠네.”

“글자를 꼭 알아야 돼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잘 살았는데. 나 아는 사람들도 다 글자 모르는데 잘 살아요. 내 아빠란 사람도 글자 모르는데 그 나이까지 잘 살아 있고.”

조이의 아버지인 거트가 읽을 줄 아는 건 오직 노름판의 패뿐이었다.
아니, 그마저도 잘 읽지 못해 빚을 졌지.
그를 잘 아는지 도로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글자 모르고도 잘 살아서 광산에 끌려갈 뻔했던 거야? 동생이랑 같이?”

“그건 글자 읽고 못 읽고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유감스럽게도 상관있는 일이야.”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건 세상이 몇 배로 더 넓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넓어진 세상은 더 많은 기회를, 더 큰 힘을, 권력을 준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조이의 얼굴이 살짝 부루퉁해졌다.

‘눈치 없는 데다 공부에 별 관심 없는 것까지 누굴 닮은 것 같아.’

도로시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서 조이, 자신 있는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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