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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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레이의 책봉식에서 도로시보다 브론테 공작의 편을 들어주었듯이, 카르넌에게 유용한 건 도로테아 밀라네어보다는 하르크였으니까.

“결과적으로 내가 이겼으니까 됐어. 네레우스도 내 앞에 고개를 숙였잖아.”

“황녀님이 큰일 나실 뻔했잖아요! 팔 다친 거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솔직히 황녀님은 그렇게까지 검술에 매진하실 필요도 없는 분이잖아요. 굳이 왕자님을 이기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슈테판 기사님도 든든하게 지켜주시는데.”

클라라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에 도로시가 잠시 멈칫하더니 쓰게 웃었다.

“그렇네.”

이렇게 매진할 것까진 없네.
어느새 또 검으로 네레우스를 이겨야지, 레이를 이겨야지 이러고 있었네.
처음 회귀했을 때 힘을 기르지 않으려고 했었다.
또다시 그 힘으로 레이를 해칠까 봐 일부러 검을 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유괴범을 핑계로 검술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그 다짐을 잊고 있었다.
너무 즐거워서, 신이 나버려서.

“이겨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데.”

이겨서 뭐 하려고?
다시 레이를 이기고 황제라도 되려고?
아니면 줄리아를 질투해 테온을 괴롭게 만들려고?
그 탐욕스러운 승부욕에 영혼을 팔아버리려고?
도로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또 최고가 되고 싶어져 버렸어…….”

도로시는 깨달았다.
나는 또 욕심에 눈이 멀어 있었던가?

“……당분간은 검을 잡지 말아야겠어.”

신변 보호를 위한 거라면 지금 실력으로도 충분했다.
도로테아 밀라네어는 더 검을 갈고닦을 필요 없다.
누구를 이길 필요도 없다.

“잘 생각하셨어요, 황녀님.”

클라라는 그런 도로시의 어깨를 토닥였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도로시의 방을 노크했다.
클라라는 잠시 도로시의 머리를 빗겨주는 걸 멈추고 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어머! 에단 도련님?”

“황녀님이 다치셨다고 들었어요.”

에단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다급한 투였다.

“황녀님이 걱정되어서 오신 거예요?”

클라라는 도로시를 위해 달려와 준 에단에 감동했다.
곱게 생기신 분이 마음씨도 참 곱지.

“황녀님은 괜찮으세요.”

그러고는 클라라가 도로시를 쳐다보았다.

“들어와, 에단.”

도로시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단이 조금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그녀를 살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아요?”

에단의 미간이 아름다운 굴곡을 그리며 일그러져 있었다.

“다친 데는 없어. 그냥 물의 정령 때문에…….”

도로시가 말을 하다 떫게 웃었다.

‘그렇게 정령의 힘이 가물가물하다가는 우베라도 곧 하르크에 먹히겠어.’

네레우스를 이겼지만 그는 정령을 다루기에 왕위를 물려받을 테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겠지.

아무도 나를 찾지 않겠지.
그때 부드러운 손길이 고개를 숙인 도로시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다친 데, 있네요.”

고개를 드니 에단이 어느새 무릎을 꿇어앉아 의자에 앉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무릎 위에 포개진 도로시의 손을 감싸 잡았다.

“예전에도 이러셨죠. 별궁의 의무실에서.”

의무실. 테온이 예고도 없이 별궁에 놀러 왔을 때의 일이었다.

“하나도 안 괜찮은 얼굴로 괜찮다고 하시잖아요.”

에단이 거울을 가리켰다.
거울에 비친 도로시는 아주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울 것 같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표정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도로시는 이 얼굴을 잘 알았다.
회귀 전, 거울을 볼 때마다 마주했던 얼굴.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미운 그 얼굴.

도로시는 그 모습을 가장 싫어했다.
분명 한동안 괜찮았는데, 왜 또 이런 얼굴이야.
도로시는 그 얼굴이 보기 싫어 거울에서 고개를 돌렸다.
도로시가 입술을 꽉 깨물자 에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녀님, 바이올린 켤 줄 아세요?”

조금 어색하게 그는 화제를 전환했다.

“바이올린……?”

“네. 바이올린이요.”

도로시가 되묻자 그가 생긋 웃었다.

“악기는 다룰 줄 몰라.”

검술 말고는 취미가 없던 도로시는 예술 쪽엔 전혀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귀족들은 교양을 위해 악기 한두 개쯤 배워두는 편이었지만, 카르넌은 도로시에게 악기를 가르칠 만큼의 관심이 없었고, 도로시는 그에 흥미가 없었으니 익힐 일도 없었다.
그에 반해 에단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실력이 꽤 좋은 편에 속했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순식간에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귀부인들이 가곡을 부를 때 그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으로 반주를 해주며 인맥을 넓혀가기도 했다.

‘다들 에단에게 반주를 요청하고 싶어서 안달이었지.’

“그럼 바이올린 연주 듣는 건 좋아하시나요?”

“싫어하지는 않아.”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음악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뭉뚱그려 답했다.

“그럼 제 연주 들어보실래요?”

에단은 말간 미소를 짓더니 어디선가 바이올린을 가져왔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시작된 바이올린 연주회였지만 에단이 무척 열심이었으므로 도로시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그는 바이올린을 턱에 끼우더니 자연스럽게 활을 얹었다.
몇 번 현을 움직이며 짧게 조율을 마친 그가 도로시를 한번 확인하듯 쳐다보았다.

“듣고 깜짝 놀라실 거예요.”

그와 함께 바이올린 현 위로 활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의 손끝에서 청아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새가 지저귀듯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달콤한 속삭임.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바이올린을 켜는 에단의 모습은 그가 만들어내는 선율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바이올린 한 대로부터 퍼져 나온 음악은 어느새 방 안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폴짝폴짝 춤을 추며 방을 뛰어다녀야 할 것 같았고, 손뼉을 치며 노래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그 경쾌한 분위기를 위해 현을 짚는 에단의 손가락은 빠르고도 유려하게 움직였다.
도로시는 이내 에단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방금전의 우울감은 잊을 정도로.
연주가 끝났을 때, 도로시는 에단을 위해 기꺼이 박수를 쳤고, 클라라도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슈테판도 작게 짝짝짝 손뼉을 쳐주었다.
그들의 박수에 에단은 웃으며 청중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에단 도련님은 바이올린 천재신가 봐요!”

클라라는 비록 귀족은 아니지만 궁정에서 일하며 바이올린 연주를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에단의 실력은 악사들과 비교했을 때 전혀 밀리지 않았다.
저 어린 나이에, 벌써 전문가 수준의 연주가 가능하다니.

“맞아. 대단해, 에단.”

도로시도 클라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에 만난 에단보다 어린 때인데, 실력은 그때와 비슷했다.
이쯤 되면 신동 소리를 들어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칭찬해 주시니 다음 곡을 들려 드리지 않을 수 없겠군요.”

에단이 웃으며 바이올린을 다시 어깨에 걸었다.
그가 다음으로 연주한 곡은 <봄의 물결>이었다.
아까와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선율이 귀를 간질였다.
그런데 그때.
똑똑.
누군가 도로시의 방문을 두드리자 에단이 연주를 멈췄다.

“도로테아 밀라네어 황녀님.”

다소 고집스러운 목소리.

“들어가도 될까요?”

네레우스였다.
그 순간 도로시는 에단과 눈을 마주쳤다.

에단은 브론테 공작이 일부러 하르크에 인사시키지 않은 ‘없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죠? 황녀님을 괴롭힌 사람.”

바이올린을 내려놓은 에단이 조용히 물었다.
그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위험한 눈빛이었다.
도로시는 에단과 네레우스가 만나선 안 됨을 직감했다.

“에단, 일단 숨어.”

“…….”

“얼른!”

도로시는 에단을 커튼 뒤로 밀어 넣었다.

“황녀님?”

밖에서 다시 묻는 네레우스의 목소리.

“잠깐만요!”

클라라가 대신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 도로시는 커튼 뒤에 숨은 에단에게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커다란 슈테판을 커튼 앞에 세워 에단이 보이지 않게 했다.
에단을 숨기고 나서 도로시는 클라라에게 눈짓했다.
그제야 클라라가 네레우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무슨 일이시죠, 왕자님?”

네레우스를 맞이하는 클라라의 목소리는 에단을 맞이할 때와 달리 새침했다.

“고생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왕자님!”

네레우스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뒤에 있던 신료가 눈치를 주었다.
이 사건을 알게 된 하르크 왕이 사과하라고 보낸 게 틀림없었다.

“다행히도 우리 황녀님께서는 매우 건강하시답니다. 용건은 그게 전부이신가요?”

클라라는 문 앞을 막아선 채 도도하게 말했다.
그러자 네레우스가 클라라를 노려보았다.

“잠깐 비키지? 난 황녀랑 얘기하러 왔으니까.”

네레우스는 클라라를 밀치고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도로시는 여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도로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물었다.
네레우스는 입을 꾹 다문 채 도로시를 내려다보았다.
잠깐의 정적은 팽팽한 기 싸움이었다.
도로시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자 네레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로 다친 곳도 없군요.”

“용건만, 간단히.”

도로시는 그와 길게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까 일은 내가 사과하죠. 정령도 못 다루는 일반인에게 내가 지나친 힘을 써버렸으니.”

마지못해 하는 사과는 끝까지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

“괜찮아요. 별로 다친 곳도 없거든요.”

도로시는 ‘어차피 이긴 건 저잖아요?’라고 덧붙이려다 말았다.
굳이 또 이기려고 해봤자 소용없으니까.

“사과는 이만 됐으니 돌아가 봐도 좋아요.”

고고하신 네레우스를 무릎 꿇릴 생각도 없고, 에단도 있었기에 도로시는 그를 돌려보내려 했다.
네레우스는 아니꼬운 듯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과의 의미로 티 타임에 초대할까 하는데.”

네레우스의 얼굴에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또한 하르크의 왕이 시킨 것이리라.

“조금 피곤해서 저녁 식사 때까지는 쉬고 싶은데.”

“제 부친께서 직접 초대하시는 겁니다, 황녀님. 브론테 공작도 참석하실 거고.”

하르크 왕의 초대라면 사적인 티 타임이 아닌 업무였다.
네레우스와 티 타임을 가질 생각은 없지만, 왕의 초대라면 거절할 수 없다.
그런 일을 하려고 이곳에 온 거니까.
도로시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잘해보고 싶은데 갈수록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알았어요. ……클라라.”

“네, 황녀님.”

클라라는 티 타임을 위해 가벼운 채비를 하면서도 네레우스를 찌릿 쳐다보았다.

“그런데.”

도로시가 티 타임을 위해 준비를 하는 동안 잠시 방으로 눈을 돌린 네레우스가 입을 열었다.

“방금 바이올린 연주, 황녀님의 것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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