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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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레우스는 이를 꽉 깨문 채 말이 없어졌고, 도로시는 그와 마주 앉아 여유롭게 홍차를 마셨다.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러려고 에피스테메에 입학한 거잖아? 가서 배우면 이런 것도 다 알게 될 거야.”

도로시는 네레우스를 격려하듯 말했다.

‘착하게 말하고 있지, 나?’

상냥한 말투, 친절한 미소, 사려 깊은 대화.
네레우스에게 욕을 퍼부으며 심지어 손찌검까지 시도했던 예전에 비하면 많이 순해졌지.

“몇 개 좀 더 아는 거 가지고 잘난 척은.”

“잘난 척은 그쪽이 먼저 했고.”

“에피스테메가 뭐 좀 더 안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인 줄 착각하나 본데 문무를 모두 겸비해야 하는 곳이야.”

“……그래서 칼이라도 잡아보자 그런 말인가?”

“하하, 나랑 대결을 해보겠다고?”

네레우스는 솔직히 지식보다는 검술에 더 자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칭찬을 들으면서 훌륭한 검사로 인정받은 그였다.
저 비리비리해 보이는 여자애쯤은 일합에 꺾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도로시는 콧대를 높이 세운 네레우스를 보며 생각했다.
왜 자기 무덤을 직접 파려고 할까?

“원한다면 피하지는 않아.”

도로시가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았다.
* * *

“검은 들 줄 아나, 황녀?”

네레우스는 도로시를 위아래로 훑었다.
또래에 비해 덩치도 작고 피부도 희멀건 데다가 팔다리도 딱히 굵어 보이지 않았다.
반반하고 고운 얼굴을 가진 계집애가 감히 하르크의 왕자를 얕보다니.
정령도 못 다루는 밀라네어 주제에.

“내게 패하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할 거야. 외교상의 결례를 웃어넘기는 데엔 한계가 있거든.”

가벼운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온 도로시가 검을 들며 말했다.
그러자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죽지 않을까 걱정이나 해.”

네레우스의 실력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실력은 꽤 봐줄 만했다.
전장에 직접 나온 왕이자 지휘관이었으니 허튼 실력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도로시의 실력이 그를 훨씬 상회한다는 게 문제였다.

“본인 걱정부터 해야 할 텐데…….”

도로시는 여유롭게 검을 들며 웃었다.
한편 공터 가장자리에 선 클라라는 슈테판의 팔뚝을 팍팍 치면서 흔들어댔다.

“황녀님 좀 말려봐요!”

깁스 푼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검이야!
검술 대회 나갔다가 팔까지 부러져 놓고는 이젠 외국의 왕자님을 만나서 또 한 판 붙겠단다.
검, 검, 검. 이젠 제발 그만 좀 했으면!
이 정도면 중독이다. 아주 심각한 중독.
하지만 클라라가 보채도 슈테판은 도로시를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사람도 같은 중독자니까! 중독자한테 중독자를 말리라고 하는 내가 멍청한 거지.’

클라라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하나를 하면 너무 끝까지 하려고 드신다니까.’

검을 들기 전에는 책을 폭식하듯 읽어 해치우더니 검을 잡으면 또 몸이 닳을 때까지 하려고 하고.
대충 평범한 수준으로 하고 그만두면 좋으련만 몸이 상할 것처럼 몰아서 해대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차라리 책이랑 검 말고 다른 것,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린다든지 악기와 춤을 배운다든지, 수를 놓는다든지, 보석이나 멋진 예술품을 수집한다든지, 그도 아니면 낮잠이나 실컷 자든지.

그런 것들을 두루두루 적당히 해가면 얼마나 좋아.
클라라는 솔직히 돈 많고 팔자 좋은 황녀 인생에 뭐가 저렇게 열심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클라라가 도로시였다면, 한량처럼 먹고 놀고 마시고 자다가 사람들 만나서 수다도 떨다가, 어디 좋은 곳이 있다고 하면 놀러도 갔다가, 예쁜 목걸이가 있으면 가격도 보지 않고 구매하는 삶을 살았으리라.
하지만 도로시는 정말 너무너무 성실했다.

‘그게 또 황녀님의 매력이지만.’

걱정은 되지만 또 미워할 수는 없다.
하나에 온 힘을 다해 몰두하는 도로시는 반짝반짝 빛나니까.
그사이 도로시는 손에 검을 쥐고 가볍게 손목을 풀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깁스를 풀고 나서 겨뤄보는 건 처음이네.’

이리저리 가볍게 움직여 보는데, 역시 예전만 하진 못했다.
오랫동안 쉰 오른손이 뻑뻑하고 둔했다.
하지만 도로시는 그것을 핑계로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침 심판 역할을 맡은 공작가의 기사 하나가 공터 한가운데로 나와 깃발을 들었다.
그러자 네레우스가 여유 있게 들어오라는 듯 손을 까딱했다.
오라는 말에 먼저 다가가는 건 싫었지만 그렇다고 그와 오랫동안 검을 붙이고 있을 생각은 없어서, 도로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느리잖아?’

네레우스는 팔랑팔랑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도로시를 보며 생각했다.
공격할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시선도 네레우스를 보고 있지 않았고, 한쪽 손은 제 역할을 잃고 허리춤에서 적당히 나풀거렸다.

‘이 정도 실력으로 나를 이기려고 했다니.’

네레우스는 검을 들어 무방비하게 다가오는 도로시를 공격했다.
그 순간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목격한 작은 미소.
챙, 챙!
도로시는 순식간에 그의 공격을 받아 튕겨낸 뒤 칼을 목덜미로 바짝 들이밀었다.
서늘한 칼날이 네레우스의 목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도로시는 한 손만으로도 널 이겨줄 수 있다는 듯 한 손을 뒷짐 지고 있었다.

상냥한 미소와 함께 번뜩이는 칼날을 들이민 도로시.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네레우스는 화를 참지 못했다.
촤악!

순식간에 어디선가 솟아오른 물이 도로시를 휘감았다.

“윽!”

“황녀님!”

놀란 클라라가 비명을 질렀고 슈테판이 재빨리 도로시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도로시를 휘감은 물은 그녀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슈테판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갔다.
물속에 갇힌 도로시의 주위로 푸른 물의 정령들이 맴도는 것이 보였다.
물이 목을 조르듯 숨이 막혀왔다.

“정령도 못 다루는 주제에 나를 비웃어?”

네레우스가 방금까지 칼이 닿았던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이를 갈았다.

‘정령, 빌어먹을 그놈의 정령.’

도로시는 손에 든 칼을 꽉 움켜쥐었다.

“정령의 힘이 없는 황녀가 태어나다니. 우베라도 곧 하르크에 먹히겠어.”

그런 네레우스에 슈테판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슈테판은 도로시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 마, 슈테판.’

도로시가 고개를 저었다.
도로시의 눈빛을 읽은 슈테판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슈테판이 여기서 네레우스를 치면 일이 더 커진다.
하지만 도로시가 위험한 상황에서 그가 해야 할 건…… 도로시를 지키는 일뿐.
슈테판은 이를 꽉 깨물었다.
도로시가 당하는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가 네레우스를 공격하려던 그때.
촤악!
물에 갇혀 있던 도로시가 칼을 뻗어 물을 베어냈다.
그러자 물이 갈라지며 주위를 맴돌던 푸른 정령들이 칼날에 흩어졌다.
물의 정령들이 흩어지자 곧 도로시를 감싸고 있던 물 또한 힘을 잃고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뜬 도로시는 낙하했다.

“황녀님!”

슈테판은 추락하는 도로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털썩, 다행히 그의 두 팔에 도로시의 몸이 안겼다.

“콜록, 콜록!”

도로시의 숨이 트이며 기침이 터져 나왔다.
클라라 또한 곁으로 달려와 그녀를 살폈다.

“괜찮으세요, 황녀님?!”

클라라는 물에 젖은 도로시의 이마와 두 뺨을 어루만지며 상태를 살폈다.

“나는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클라라는 하인들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키는 네레우스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하르크 쪽에 정식으로 항의해야 해요!”

클라라는 눈빛으로 욕을 쏟아붓고 있었다.
도로시는 숨을 정리하고 슈테판을 보았다.

“슈테판, 내려줘.”

슈테판은 도로시의 부탁에도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 괜찮아. 내려줘.”

도로시를 안은 두 팔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가, 결국 그녀를 땅에 내려주었다.
대신 그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기사의 재킷을 도로시에게 덮어주었다.
도로시는 추락하며 떨어뜨렸던 칼을 땅바닥에서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어 네레우스를 보았다.

눈을 마주친 네레우스가 흠칫 떨었다.
보통 물에 갇히면 숨이 막히고 당황해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도로시는 그 상황에서도 물의 정령을 노려 힘이 빠지게 만들었다.
그 침착함, 빠른 상황 판단, 그리고 물을 갈라 정령을 위협하는 대담함과 정확함.
도로시가 물에 흠뻑 젖은 채 저벅저벅 그에게 다가왔다.

“검, 다시 들어.”

나직이 던지는 한마디에 네레우스는 등골을 스치는 한기를 느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그는 이대로 자신을 굽힐 수 없었다.

“정령의 힘도 싸움의 수단이야.”

달리기가 빠르고 민첩한 것, 주먹이 정확한 것처럼 정령도 개인이 가진 능력이었다.
그러니까 사용해도 전혀 비겁한 게…….

“그래, 마음껏 써 봐.”

도로시가 느른하게 내리깐 눈으로 검을 휘둘렀다.
네레우스는 황급히 검을 들어 그를 막았다.
도로시의 검은 그를 쉴 틈 없이 몰아세웠다.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공작저 전체에 울려퍼졌다.
물의 정령? 그딴 것을 두려워했으면 회귀 전 하르크를 짓밟지도 못했을 것이다.
네레우스와 전투를 치를 때, 정령을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나갔던 건 도로테아 밀라네어였다.

“……정령의 힘 없이도, 하르크 정도는 막을 수 있어.”

레이도 네레우스도, 모두 정령을 다루는 선택받은 자들이었지만 도로시는 그들을 죽이고 황좌에 올랐었다.
그러니까.

“약속대로 내 앞에 예를 갖춰.”

그녀의 검이 어느새 네레우스의 목에 닿아 있었다.
* * *
그 일이 있은 후 오후 일정까지는 잠시 시간이 비었다.
하르크 쪽에서도 이번 일로 무척 당황했고, 홀딱 젖은 도로시도 다시 정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클라라는 도로시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주며 투덜거렸다.

“놀라기는. 슈테판은 내가 이길 거라고 믿었지?”

도로시는 거울 너머로 뒤에 서 있는 슈테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믿었던 슈테판마저 엄격하게 굳은 표정으로 도로시를 쳐다봤다.
그 또한 이번 일에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저는 정말 속상해요, 황녀님. 이런 일은 황제 폐하께 알려야 해요. 하르크의 왕자가 제국의 황녀를 해하다니요.”

클라라가 도로시의 젖은 머리를 빗겨주며 말했다.
카르넌에게 이 일을 알린다고?
도로시는 조소했다.
아마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걸.
오히려 하르크 편을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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