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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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형님이 돌아오셔서…… 반가워서 얼굴을 자주 뵙고 싶었어요. 그뿐이에요.”

에단은 옷자락 아래로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브론테 공작 부인은 그것을 보고 홍차에 탄 설탕처럼 심장이 녹아내릴 듯했다.
조나단에게 그렇게 구박을 받는데도 오랜만에 제 형이 왔다고 좋아하는 동생이라니!
어떻게 이렇게 착하고 사려 깊은 아이가 있을까!

그에 반해 올해 벌써 열다섯 살이나 된 조나단은 여전히 한참 어린 동생을 괴롭혀 댔다.
공작 부인은 사랑스러운 에단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그의 고운 마음씨를 칭찬했다.

“그런데 어머니, 황녀님이 지난 검술 시합 때 사고로 다치셨잖아요…….”

“오오, 그래. 네 아버지께서도 그 일로 상심이 크시단다.”

애단이 도로시에 대한 운을 띄우자 조나단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방금까지 에단과 그는 도로시와 처음 만나 무례를 저질렀던 그 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 않았던가!

“에단!”

조나단이 다급히 에단의 입을 막으려 소리쳤다.
그가 도로시에게 했던 망발과 도로시의 경고를 모두 어머니께 고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 소리가 큰 탓에 에단이 깜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조나단!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에단이 놀라잖니! 어쩜!”

공작 부인이 화를 냈고, 에단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조나단을 돌아보았다.

“왜요, 형님?”

“너…… 너…….”

차마 공작 부인 앞에서 그날 일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조나단은 버벅대며 무언의 위협을 가하려 애썼다.
그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멍청하기는.

“어머니, 그래서 말인데 황녀님의 병문안을 다녀와도 될까요?”

“황녀님 병문안을?”

“네. 그래도 우리 가문에 책임이 있기도 하고…… 인사도 드릴 겸이요.”

“에단, 어쩜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집안의 일을 신경 써주는 에단이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에단은 황녀와 몇 번 만나 논 적이 있으므로 황녀의 병문안을 가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다녀오렴, 에단. 집사에게 말해둘 테니 병문안을 위한 선물도 사 가고.”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에단은 공작 부인을 보며 배시시 웃고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 사랑스러움에 브론테 부인은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이를 키우는 기쁨이란 이런 것일까!

“조나단 형님, 형님도 같이 가실래요?”

에단은 고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조나단은 격렬히 고개를 저었다.
황녀한테 저지른 짓이 있는데 어떻게 감당하라고!

“조나단, 이런 일엔 함께 가서 황녀님께 인사드리는 게 예의란다.”

“싫어요! 내가 왜 황녀한테 인사를 해요?”

“조나단.”

공작 부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미니, 아무래도 형님이 불편하신 것 같으니 저 혼자 다녀올게요. 저랑 황녀님은 일면식이 있기도 하고요.”

에단은 그런 공작 부인을 말리며 말갛게 웃었다.
어차피 애초부터 너 따위와 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거든.

* * *
에단이 병문안을 온 것은 레이가 제도로 올라간 다음 날이었다.
에단은 평소보다 단정한 도련님 차림을 하고 왔다.
그레이 패턴이 들어간 재킷, 크로스오버 타이를 맨 하얀 셔츠에 검은 멜빵, 정갈하게 다림질된 면 반바지. 갈색 가죽 단화.
교본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완벽한 도련님.
평범하다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복장인데, 에단이 입으니 특별해 보였다.

“늦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황녀님.”

에단은 도로시가 다친 뒤 바로 찾아오지 않은 것을 사과했다.

“아니야. 너 때문에 다친 것도 아닌데, 뭘.”

“걱정 많이 했어요. 이번 부상으로 검술에 지장이 생기는 건 아닌가 해서요. 좋아하시잖아요.”

“부러진 것도 아니고 겨우 금 간 거야. 다 나으면 별 차이 없다고 그랬어.”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게 싫어서 도로시는 괜히 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에단은 괜찮다며 쑥스럽게 웃음 짓는 도로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에단?”

“바람이 조금 차네요. 춥지 않으세요, 황녀님?”

에단은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창문에서 살짝 서늘한 바닷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도로시는 깁스 탓에 긴 팔을 입을 수 없어서 팔이 드러난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조금 춥지만 환기가 되는 편이 더 좋아.”

도로시는 서늘한 팔을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자 에단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 도로시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에단의 온기가 남아 있는 재킷이 팔에 닿았고, 늘 에단에게 나던 향기로운 꽃향기가 풍겼다.

“그렇지 않아도 몸 안 좋으신데, 조심하셔야죠.”

에단이 생긋 웃었다.

“아, 그리고 황녀님 병문안에 빈손으로 오기는 그래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에단은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도로시에게 건넸다.
한 손에 들어올 만큼 가볍고 부피가 작은 선물이었다.

“이런 건 안 가지고 와도 되는데…….”

“그냥 다치신 것도 아니고, 저희 브론테 가문이 단단히 챙기지 못해 사고가 난 건데 어떻게 빈손으로 오겠어요.”

지그시 도로시를 바라보는 에단의 금빛 눈동자는 도로시가 이 자리에서 선물을 뜯어보길 바라는 듯했다.
제 선물이 레이가 보낸 편지와 같은 꼴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도로시는 한 손으로 포장지를 벗기려고 애썼지만 마음처럼 되질 않았다.

“도와드릴까요?”

“응. 고마워.”

에단은 다시 선물을 받아 들고는 차근차근 포장을 풀었다.
에단답다고 해야 할까? 그는 포장지를 훼손하지 않고 깨끗하게 벗겨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포장지를 벗겨낸 에단은 두 손으로 선물을 내밀어 보였다.

그의 손 위엔 금사로 테를 두르고 화려한 검을 수놓은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손수건은 한때 황제까지 했던 도로시가 만져보기에도 부드러울 만큼 고급스러웠다.

“지난번 선물은 싫어하셨지만, 이 선물은 황녀님께서 받아주신다고 하셔서요.”

에단이 생긋 웃었다.
지난번 화려한 펜던트를 선물했을 때, 도로시는 부담스러워서 거절했었다.
그때 하필 에단이 테온의 손수건을 봤었고…….

“아……. 고마워.”

도로시는 그 일을 기억하고 일부러 손수건을 사 온 에단의 섬세함에 놀랐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에단이 기대에 부푼 얼굴로 도로시를 보았다.

“마음에 들어. 그런데 손수건에 검을 수놓다니. 이렇게 특이한 손수건은 어떻게 구했어?”

보통 손수건에는 꽃이나 새 같은 것을 수놓게 마련이었다.
도로시가 아는 한 손수건에 검을 수놓는 사람은 없었다.
딱 한 경우, 황제 도로테아 밀라네어만 빼고.
회귀 전 도로시는 검을 정말 좋아해서, 취미로 명검을 수집하곤 했다.
마음이 허할 때면 제국 제일의 대장장이를 시켜 전설로 남을 만한 최고의 검을 만들라고 명하기도 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명령이었지만 의뢰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선 목숨을 건 협박으로 느꼈다는 게 문제지만.
결론적으로 ‘폭군의 사치’라는 죄목 중에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지금도 꽤 괜찮은 취미였다고 생각했다.
방 한쪽 벽면을 마음에 드는 검으로 전부 도배하듯 걸어두고 우울할 때 보고 있으면 검이 말을 걸어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가끔 억누를 수 없는 나쁜 충동이 덮쳐올 때만 빼면 도로시의 몇 안 되는 행복 중 하나였으니.
아무튼 그 취미의 연장선으로 그녀는 손수건에 검을 수놓아 쓰기도 했다.

“황녀님이 검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특별히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이제 그 낡은 손수건 대신 쓰시면 되겠어요.”

낡은 손수건이라면 에단이 보았던 테온의 손수건이었다.
에단은 그 손수건이 무척 오래되어 보인다며 황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테온에게서 받은 게 수년 전이었으니, 아마 다른 손수건들처럼 매일 사용했다면 이미 수십 번은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테온의 손수건은 도로시가 고이 모셔두기만 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아 아직 멀쩡했다.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어. 아직 깨끗하고.”

“하지만 옛날 것이잖아요. 이젠 새것이 생겼으니까요.”

에단이 가늘게 웃었다.

“황녀님, 저 선물을 드렸으니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부탁?”

“예전부터 저 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여우처럼 간사하면서도 매혹적인 눈웃음에 담긴 속내는 아무리 노려보아도 읽히지 않았다.

“뭔데……? 들어보고.”

“저…… 그 깁스에 글을 써보고 싶어요.”

에단이 조심스레 도로시의 하얀 깁스를 가리켰다.

“여기에?”

친한 사이끼리는 이따금 친구의 깁스에 격려 글을 남기거나 짓궂은 멘트를 적어넣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레이 같은 애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녀가 아는 에단은 그런 유치한 장난을 할 만큼 풋풋하지 않은데…….

그를 이상하게 여기던 도로시는 순수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에단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아무리 속이 새카매도 아직 애는 애라는 걸까?

“그래……. 그 정도야 뭐.”

착한 마음이라면 얼마든지 내줄 수 있지.
어차피 한 달 뒤에 벗어버릴 것이기도 하고.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님.”

에단이 그녀의 깁스에 작게 입을 맞췄다.
에단은 도로시를 테이블에 앉게 한 뒤에 펜과 잉크를 가져왔다.
어쩐지 그 모습이 들떠 보여서, 도로시는 그가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이상한 걸 그려놓는 건 아니겠지?
에단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도로시의 깁스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혹시 잡으면 아프거나 불편하신가요……?”

도로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에단은 도로시의 자세가 불편하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에단은 길고 흰 손가락으로 깃펜을 들어 톡톡 잉크를 묻히더니 신중하게 펜을 댔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평소와 달리 열정적인 빛을 띠었다.
팔 위에 글을 쓰다 보니 에단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

가녀린 은빛 머리카락이 사르르 흘러내리면 그는 잠시 펜을 들고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다시 깁스 위에 글자를 써넣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을 따라 그녀의 팔 위로 글자가 새겨졌다.
그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아서, 도로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에단을 지켜보았다.

속눈썹이 정말 길구나.
깁스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간사하기보다는 진중해서 아름다웠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깨끗하게 결을 따라 난 눈썹도, 오점 하나 없는 하얀 피부도, 반듯하게 뻗은 콧대도, 처음으로 예쁘다는 수식어를 붙여보는 입술도.
에단은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오래 보아왔는데도, 늘 본 적 없던 오묘한 면을 발견하게 되곤 하니까.
도로시는 깁스에 집중하고 있는 에단을 보며 오랜만에 그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멈춘 듯 도로시는 에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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