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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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 테온은 프리디아로 돌아가기 위해 별궁에서 나왔다.

“레이 전하와 도로시 황녀님은 아직 못 일어나셨나 봐요.”

클라라는 이른 새벽 홀로 별궁을 떠나는 테온에게 말했다.
시간이 너무 일러 두 사람을 깨우지 못한 것이다.

“어제 다 인사해 두었으니까 괜찮아요. 너무 이른 시간이라 깨우는 게 더 미안하기도 하고요. 요 며칠 정말 신세 많이 졌어요. 고마워요.”

테온은 클라라와 그를 배웅 나온 하인들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잠시 별궁을 보았다.
그런데, 2층 창문에서 누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시였다.

‘오늘도 못 주무신 건가?’

테온과 눈을 마주친 도로시는 깜짝 놀라며 커튼 뒤로 사라졌다.
손을 흔들려던 테온은 들어 올리던 손을 다시 내렸다.
이 새벽에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시간 맞춰 깨었을 리는 없고, 잠을 자지 않았다고 보는 쪽이 타당했다.

“저, 황녀님이 잠을 잘 못 주무시는 것 같던데…….”

테온은 지금 도로시가 깨어 있다고 말하면 꼭 도로시에게 배웅을 나오라고 하는 것 같아서 돌려 말했다.

“아, 황녀님이 잠이 좀 적은 편이시긴 하죠.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편이에요. 아, 혹시 지내는 동안 그게 좀 불편하셨나요, 도련님?”

“아니요, 전혀요. 그냥 걱정되어서요.”

“걱정 마세요. 황녀님은 원래 잠이 적은 편이시니까요.”

클라라가 웃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도로시는 회귀 전의 불면증의 영향인지 잠을 오래 길게 자지는 못했다.
클라라가 전대 유모로부터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도로시는 아기일 때부터 같은 나이의 아이들보다 훨씬 적게 잤다고 들었다.
다행히 자주 울지 않고 순한 편이라서 돌보기는 어렵지 않았다지만.
지금도 도로시는 깨우지 않아도 다섯 시간 정도 자면 혼자 알아서 깨었다.

“아, 그럼 다행이네요.”

원래 잠이 적은 편이었구나.
손수건을 떨어뜨리던 날 밤에 깨어 있던 것도 지금 깨어 있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던 것일까?
테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다시 한번 도로시의 방을 쳐다보았다.
도로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도련님.”

마차의 문이 닫히고, 마부의 채찍이 말을 몰았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별궁으로부터 멀어졌다.
* * *

“차 따라줘.”

도로시의 한마디에 레이가 뜨거운 물에 차를 우려 내놓았다.
하얀 찻잔에 다홍빛 물이 찰랑였다.

“먹여줄까?”

그에 도로시가 레이를 찌릿 노려보더니 제 손으로 차를 마셨다.

“맛 어때? 괜찮아?”

“너무 우려서 써.”

“미안. 다시 우릴까?”

레이는 마치 도로시의 시종이라도 된 듯 잔뜩 기합이 들어 보필했다.
클라라는 황태자인 레이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레이는 도로시가 자신을 구하려다 다친 것을 무척 미안해하며 이렇게라도 마음의 짐을 덜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됐어.”

‘장차 황제가 될 황태자가 위엄이 없어서는…….’ 시키는 대로 쪼르르 차나 따르고 덥다고 하면 부채질해 주고, 춥다고 하면 담요 덮어주고.
사람을 부리는 황제보다는 부림받는 시종에 어울리는 꼴이었다.

‘정말 시키는 대로 다 할 줄은.’

도로시가 일부러 일을 귀찮게 꼬아서 시켜도 레이는 좋다며 활짝 핀 미소로 도로시의 시중을 들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짜증 내며 그만두고도 남았을 상황.
도로시는 실없는 레이를 데리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레이.”

“응!”

“펜이랑 잉크. 종이도 많이.”

“알았어! 기다려 봐!”

도로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이는 클라라에게 달려가 펜과 종이가 있는 곳을 물어 가지고 왔다.
말 잘 듣는 개가 따로 없다.
도로시는 티와 디저트가 놓인 테이블을 치우게 한 뒤 종이를 깔아놓았다.

“나, 손 다쳐서 글씨 못 쓰니까 대신 써줘.”

“알았어! 불러봐!”

레이는 도로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펜을 들었다.
그의 초롱초롱한 눈이 도로시의 입술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맨 위에 큼직하게. ‘제왕학’.”

“제왕학?”

“제왕학.”

레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도로시가 단호하게 답했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 상단에 ‘제왕학’이라는 글자를 써넣었다.
도로시는 레이의 악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입을 다물고 다음 구절을 불렀다.

“중간 크기 글씨로, 제1장. 점 찍고, 밀라네어 황가의 계보.”

“제1장…… 밀라…… 네어…….”

레이는 도로시가 부르는 대로 글자를 따라 썼다.
검은 잉크가 펜촉을 따라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도로시는 레이가 글자를 틀리지 않는지 매의 눈으로 살폈다.

“다 썼어.”

“그럼 그다음 작은 글씨로. 태초에 빛의 정령을 다루는 제왕 밀라네어가 있었다.”

“태초에…… 빛의 정령을…….”

레이는 종이에 머리를 처박을 것 같은 자세로 도로시가 부르는 구절을 써 내려갔다.

도로시는 밀라네어 황가의 뿌리인 밀라네어에 관하여 몇 줄 더 읊었고, 레이는 순순히 종이를 채웠다.
그러나 3대 황제 라드 밀라네어에 이르자 손이 아팠는지 레이는 고개를 들곤 손을 털었다.

“잠깐만, 도로시. 손가락이 너무 아파.”

레이는 펜을 잉크병에 걸쳐놓고는 손을 쥐었다 폈다.

“근데 갑자기 제왕학은 왜 쓰는 거야?”

“나 공부 좋아하잖아.”

도로시가 왼손으로 차를 홀짝 마시며 답했다.

“그건 그렇지만…….”

레이는 도로시가 공부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도로시는 책을 읽기를 좋아했고, 레이가 모르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레이.”

“응?”

“나도 계속 부르려니까 목 아파.”

도로시가 목을 큼큼 가다듬으며 얼굴을 찡그리자 레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 이 지루한 제왕학 필사가 끝나겠구나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레이의 기대는 철저하게 빗나갔다.

“제왕학 정도는 다 외우고 있지? 나 목 아프니까 안 부를래. 알아서 끝까지 써줘.”

“제왕학을…… 끝까지?”

레이가 입을 벌리며 딱딱하게 굳었다.
제왕학은 오래된 지도서로 총 스무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두꺼운 책 시리즈였다.
1장인 밀라네어 황가의 계보만 해도 백 쪽이 넘었다.
그 외에도 상벌, 군사학, 세계 지리, 외교, 화술, 용인술, 경제, 역사 등 방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왕학이라고 부를 뿐이지 실상 여러 책을 하나로 묶은 명칭이었다.

“설마 못 외웠어?”

에피스테메에 다니잖아.
에피스테메에서는 제왕학이라는 책으로 한 번에 묶어서 배우지는 않지만, 여러 수업에 나누어 제왕학에 해당하는 내용을 배웠다.
그러므로 밀라네어 황가에서는 일찍부터 황태자에게 제왕학을 달달 외우도록 시켰다.
그것이 황태자를 에피스테메에 보내기 위한 지독한 사교육 방법 중 하나였다.

“그게…… 옛날엔 다 외웠는데 금방 까먹었어.”

“까먹었으면 외운 게 아니잖아.”

“어…… 그래도 거의 기억나니까 써볼게!”

레이는 다시 펜을 들고 다음 구절부터 내용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도로시는 감시자의 눈으로 레이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살펴보았다.
기억이 나지 않으면 레이는 잠깐 멈추고 펜 끝으로 제 턱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다음 구절을 이어나가길 반복했다.

“광휘의 돌을 세운 건 체임버가 아니라 에타르야.”

도로시가 틀린 부분을 지적하면 레이는 화들짝 놀라며 오자를 고쳐 썼는데, 다행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았다.

그는 손이 아프면 잠시 펜을 놓고는 도로시를 보며 씨익 웃었다.

“됐어. 오늘은 여기까지 해. 손 아프잖아.”

“정말? 괜찮아?”

“응.”

도로시는 레이가 쓴 제왕학을 쭉 훑어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밀라네어가 정령과 계약하며 받았다는 정령석을 코레서스가 잃어버린 시기까지. 레이는 그 많은 양을 용케 써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네.’

군데군데 틀린 것을 도로시가 다시 지적하고 설명하기도 했지만, 몇몇 군데를 제외하면 완벽했다.
레이는 도로시가 자신의 결과물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곤 뿌듯하게 웃었다.

“1장은 됐고 내일은 2장부터 쓰자.”

“2장? 상벌과 형법?”

“싫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레이는 어쩐지 도로시를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 자기가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도로시가 옆에서 틀린 부분이나 잘못 쓴 글자를 가르쳐 주니까 도로시가 공부를 하고 있는 것도 맞기는 한데…….
레이는 반 곱슬의 금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기묘한 찜찜함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그동안 도로시는 잉크가 다 마른 종이를 차곡차곡 쌓아서 책장 한쪽에 정리해 넣었다.

“있잖아, 도로시. 도로시는 똑똑하잖아. 검술도 최고고.”

레이는 쫄래쫄래 도로시의 뒤를 따라와 물었다.

“도로시는 그럼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레이의 물음에 도로시의 발이 딱 멈춰 섰다.
뭐가 되고 싶냐고?
도로시는 레이에게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황제. 그것은 되고 싶었던 것. 그리고 되었으나 실패한 것.
이번에 되고 싶은 것은…… 글쎄, 착한 사람?

“그건 왜 물어?”

도로시는 대답할 수 없기에 레이에게 신경질을 냈다.
슈테판이 물었으면 조금은 차분하게 생각하고 대답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레이가 이런 질문을 하니 그럴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그냥 궁금해서. 도로시는 대체 뭘 하고 싶을까……. 도로시 같은 사람이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레이는 도로시가 날카로워진 걸 느끼곤 눈치를 보며 말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내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도로시는 이내 조소했다.
그렇지. 레이의 목을 베고 황위까지 찬탈할 수 있었으니, 뭐든 할 수 있었지.
그게 비록 악일지라도.

“나는 있잖아, 커서 농부가 되고 싶거든. 밭에다 밀이랑 무랑 당근이랑 가지, 토마토도 기르고 마당엔 강아지랑 닭이랑 염소도 키우고! 소도 한 마리 키우면서.”

레이는 굳어진 도로시의 표정을 보며 자기 얘기로 말을 돌렸다.
그는 자신이 살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그리며 콧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정원엔 넓은 탁자가 있어서 손님들과 함께 직접 기른 채소로 음식을 만들어 파티를 열고 직접 키운 닭이 낳은 달걀과 수확한 밀로 빵도 만들고.
레이는 이런 시골 별궁에 와서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 사실 가지를 안 좋아했는데, 내가 직접 기른 가지는 되게 맛있더라고. 그때 나는 농부가 되면 잘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아직도 텃밭 키워?”

“어? 아, 아니. 예전에 말이야. 아니면 산에서 버섯이랑 풀을 캐면서 사냥도 하고 그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거 같아.”

하지만 그 이야기는 도로시를 더 어처구니없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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