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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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이런 조악한 신파에 휘둘릴 순 없어.
오직 네게만 허락된 빛의 정령은 결코 내 위로가 될 수 없어.
나는 황제가 될 거야.
도로테아는 피가 나도록 세게 입술을 깨문 채 입술 끝을 올렸다.

“……잘 가, 레이먼드.”

도로테아는 그녀를 죄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는 레이먼드의 가슴에 꽂힌 칼을 뽑았다.
붉은 피가 그녀의 즉위를 축복하듯 튀어 올랐다.
그녀와 레이먼드의 주위를 돌던 빛의 정령들이 레이먼드의 주위로 모여들며 환하게 빛났다가, 파스락, 덧없이 빛을 잃으며 사라졌다.

도로시를 덮친 어둠이, 그의 부고를 전했다.
그래, 잘 가. 늘 나를 가리며 찬란히 빛나던, 지독하게 순수한 태양.
그렇게 그녀는 거머쥐었다. 승리를, 오랜 꿈을, 황위를.
그녀가 좇던 그 영광스러운 미래에 도달한 것이다.
태양이 완전히 저문 밤. 빛 한 점도 남지 않은 황제의 방에 홀로 남아 선 채로.
그런데.

‘어, 아, 아팠어?’

레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빌어먹게도.
최후의 결전 때, 레이는 진심을 다했을까?
날 이기려는 생각이 있었을까?
그가 흔들린 것은 찰나이지만, 도로시는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레이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그 찰나는 수만 가지 판단을 내릴 수도 있는 긴 시간이라는 걸.

마음만 있다면 제 심장으로 들어오는 칼날을 어떻게 해서든 막을 수 있었다는 걸.
정말, 내가 레이를 이긴 게 맞을까? 레이가 져준 것이 아니라?
그 의문은 그날 이후로 계속되었고,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일에 답해줄 레이먼드 밀라네어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도로시는 빛 한 점 없는 밤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레이와의 기억을 잊으려 애썼다.

“왜 나야……. 왜 나만 이렇게 돌아온 거냐고.”

다들 아무런 기억도 없는데 왜 나만.
도로테아는 자신의 회귀가 형벌처럼 느껴졌다.
죽음을 받아들였고, 홀가분하게 눈을 감았는데.

그때, 어둠 속에서 삐그덕 하고 문이 열리더니 빛 한 줄기가 들어왔다.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기다란 빛줄기가 도로시가 앉아 있는 침대까지 닿았다.

“도로시, 안 자?”

그곳엔 레이가 빛의 정령을 등불 삼아 서 있었다.
도로시는 파자마를 입은 레이를 보며 눈을 지그시 감고 한숨을 쉬었다.

“하아, 왜 또 너야…….”

왜 하필 너냐고.

“네 방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혹시 아파서 못 자나 싶어서.”

레이가 문고리를 잡은 채 머뭇거렸다.
그의 눈가엔 졸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도로시가 자는 동안 깁스를 한 팔이 불편할까 봐 걱정한 모양이었다.

“내가 아프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내버려 두면 되잖아!”

“하지만…… 너도 날 도와주려다가 다쳤잖아.”

다칠 뻔한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은 건 도로시가 먼저였잖아.
레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고리를 만지작거렸다.

“그건…… 그냥 어쩌다 그런 거야!”

“그럼 나도 어쩌다 이러는 거야.”

저답지 않게 반박까지 한 레이는 졸음이 묻은 걸음으로 조심스레 도로테아의 침대 곁에 다가왔다.
빛의 정령들이 반딧불이처럼 공중을 돌며 빛을 밝혔다.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줄게, 도로시.”

레이가 침대 옆에 벨벳 스툴을 가져다 앉으며 웃었다.
도로시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레이를 쳐다보았다.
에단과 달리 머리에 든 게 없어 새하얀 표정.
저 순백의 얼굴 위에 검은 콩테로 선을 휘갈겨 더럽게 만들고 싶다면, 나쁜 마음이겠지. 착하지 못한 거겠지.
도로시는 레이에게 신경질을 부리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한편 레이는 도로시가 자신을 쫓아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레이는 빛의 정령을 천장으로 날려 보냈다.

“이것 봐, 도로시. 별처럼 반짝반짝 예쁘지?”

레이는 빛의 정령을 열심히 움직여 밤하늘처럼 천장을 수놓았다.
그 모습은 정말 별이 쏟아지는 여름날의 밤하늘 같았다.

“안 예뻐. 난 빛의 정령 안 좋아해. 너무 밝잖아.”

너무 밝아. 눈이 부셔서 멀 것같이.

“아아, 그렇지……. 너무 밝지? 도로시 자야 하는데.”

레이가 머쓱해하며 빛의 정령들을 사라지게 했다.
도로시는 레이를 등지고 누웠다.
도로시가 완전히 돌아눕자 레이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멍청이가 오빠 노릇 하려고 애쓰네. 하나도 안 고마운데.
도로시는 누운 채로 창밖을 보며 가만히 숨을 쉬었다.

“도로시……. 있잖아, 도로시는 엄마 보고 싶은 적이 한 번도 없어?”

레이는 재워준다더니 말을 걸어 방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뜬금없이 엄마라니.

“없어.”

“도로시는 정말 어른스럽구나…….”

레이가 푹 침대 위에 고개를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열네 살이나 되었는데도 엄마가 보고 싶던데.”

“……미안하게 됐네.”

도로시가 돌아누운 채로 중얼거렸다.

“뭐가?”

“나 때문에 엄마가 죽어서.”

도로시가 이불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보고 싶은 엄마가 나 때문에 죽었는데 어떡하나.
내가 다시 살려낼 수도 없는데.

심지어 나는 벌써 두 번이나 네 어머니를 죽여 버렸는데.

“무슨 말이야, 도로시?”

“나 낳느라 엄마가 죽어버렸잖아. 내가 안 태어났으면 엄만 죽지 않았을걸. 넌 그럼 엄마랑 평생 행복하게 살았을 거야.”

카르넌도 레이도 죽은 황후 앨리스와 함께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겠지.
도로시는 자신이 없는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면 늘 단란하고 행복하고 따뜻한 모습을 그리게 되었다.
카르넌은 사랑하는 여인 앨리스와 함께 웃음 핀 하루를 보내고, 착하고 귀여운 아들 레이는 그들의 사랑을 잔뜩 받으며 크는 그런 모습.

정원에 돗자리를 펴놓고 셋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피크닉을 하기도 하는 그런 모습.
셋이 한 침대에 누워 행복하게 웃으면서 따뜻함 속에 잠드는…… 그런 모습.
하지만 도로시가 태어남으로써 그 따뜻한 가정의 모습은 부서지고 말았다.
도로시가 있는 밀라네어가는 조금도 따뜻하지 않다.
가족의 기운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멀고 먼, 차갑게 식은 사이.
도로시는 그것이 그녀가 지은 수많은 죄 중에 제1의 원죄라고 믿었다.

“도로시.”

등 뒤에서 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기댔던 고개를 바짝 든 목소리였다.

“그런 말 하지 마.”

레이는 딱딱한 명령투로 말했다.
마치 내게 항복하라고 말하던 그때처럼.
평소에 잘 듣지 못한 레이의 말투에 도로시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단호했던 말과 달리 레이는 호두 턱이 되어서는 입술을 삐죽대고 있었다.
울어?

“나는 도로시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레이가 도로시의 파자마 소매를 꽉 쥐었다.
그에 도로시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네가 보기엔 내가 바보 같은 오빠겠지만 그래도 이건 알아. 엄마가 도로시를 낳은 걸 후회하지 않을 거란 거.”

“…….”

“엄마가 돌아가신 건 네 탓이 아니야. 그건…… 그냥 그런 거야. 네가 날 구해준 것처럼. 내가 잠 못 드는 널 찾아온 것처럼.”

레이가 웅얼거렸다.
도로시는 그가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뭐가 그냥 그렇다는 거야? 전혀 예시가 맞지 않는 얘기다.
앞뒤가 덜그럭거리는 멍청한 말에 도로시는 시선을 떨구었다.

“진짜 바보네.”

바보를 상대하고 있자니 똑같이 바보가 되는 기분이라 상대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도로시도 가끔 바보 같아.”

레이가 반항하듯 웅얼거렸다.
누가 누구더러 바보래.
도로시는 바보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다시 등을 돌려 누웠다.
그 후 어둠 속에 공백이 오래 자리했으나, 도로시는 뒤에서 레이가 꾸물거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다.

“있잖아, 도로시…….”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여는 레이.

날 재울 생각인지 나랑 수다를 떨 생각인지.
도로시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나랑 같이 람파스로 올라가지 않을래……?”

“싫어.”

용기 낸 레이의 제안에 도로시는 단칼에 거절했다.
겨우 도망쳐 와서 이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데 다시 올라가라고?

“하지만 팔도 다쳤고…….”

“다쳤으니까 요양을 해야지.”

도로시는 시큰둥하게 깁스를 한 제 팔을 올려 보였다.
도로시의 말에 레이는 반박할 거리를 찾는 듯 한참 동안 말하지 않았다.

“팔이 다 나으면? 이제는 검도 잡을 정도로 건강해졌잖아. 에피스테메는 여전히 가기 싫어? 너는 검술도 너무너무 잘하니까 정말 에피스테메에 오면…….”

“안 가, 절대 안 갈 거야.”

그에 레이가 쓰게 웃었다.

“하긴 도로시는 혼자서도 다 잘하니까.”

에피스테메에서 더 배울 게 없을 정도로 혼자서도 다 잘해 버리니 이제는 에피스테메에 오라고 조르는 것도 먹히지 않았다.
레이는 침대에 푹 고개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나도 여기서 도로시랑 같이 살고 싶다.”

“넌 돌아가야지.”

“응…….”

“…….”

“도로시, 혹시 나 나중에 또 여기 놀러 와도 돼?”

레이가 졸음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도로시는 그의 물음에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했다.
이곳 아나스타스궁은 본디 도로시를 위해 전용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황실 사람들이 자유롭게 휴양 목적으로 쓰기 위한 곳이었으므로 레이가 오는 것에 그녀가 가타부타 말을 덧붙일 일은 아니었으니 레이는 허락을 맡을 필요도 없지만…….

“생각해 보고.”

도로시는 퉁명스레 답했다.
그런데 레이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대신 뒤쪽에서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레이가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려 팔을 벤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스툴에 걸쳐진 엉덩이와 굽은 허리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그러게 재워주긴 누가 누굴 재워.”

밤도 새어본 적 없는 어린이 주제에 불면증 있는 사람을 어떻게 재우겠다고.
도로시는 몸을 일으키곤 한숨을 푸욱 쉬었다.
어차피 오늘은 잠이 오질 않았다.
도로시는 다치지 않은 한쪽 팔로 레이를 잡아당겼다.

“으웅…….”

레이가 투정을 부리며 몸을 뒤척였다.

“레이, 침대에서 자.”

“으응…….”

비몽사몽인 레이는 대충 몸을 끌어 침대에 툭 올려놓곤 바로 잠이 들었다.
도로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와 있는 레이의 다리를 침대 위로 올려주었다.
이불까지 덮어주자 좋다고 이불을 손에 꽉 쥐며 미소까지 짓는다.

“하아…….”

사람 마음 복잡하게 해놓고 자긴 잘만 자네.
도로시는 달빛이 내려앉은 레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네가 죽지 않았으면, 나는 다른 생을 살 수 있었을까?
내가 항복했다면 세상은 좀 더 나았을까?
도로시는 해가 뜨길 기다리며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반딧불이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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