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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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테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레이먼드에게 말했다.
그녀가 죽이러 왔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언제나처럼 낙천적이고 철이 없었다.
도로테아는 그 멍청함을 진절머리나도록 싫어했다.

“그럼 이건 어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며 한잔하는 건.”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에 도로테아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 바로 옆에서 들었으면서 뻔뻔하게 그런 말을…….
분노한 도로테아와 달리 레이먼드는 잔뜩 감상에 젖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처연하고 비련에 젖은 얼굴.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조차 제대로 슬퍼할 시간이 없구나.”

“너나 많이 슬퍼해.”

내가 왜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지?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의무를 갖는다면 나의 피를 모두 뽑아내고 스틱스강의 물로 피를 대신하는 것을 택하리라.

“……맞아, 넌 아버지를 늘 싫어했지. 아버지께서도 널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고.”

레이먼드의 푸른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툭 건드리면 이슬을 떨어뜨릴 풀잎처럼, 그는 여린 얼굴로 도로테아를 보았다.
그 나약한 꼴을, 도로테아는 보기 싫었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로 부족한 증오의 관계를 아버지와 딸이라는 핏줄로 묶으려는 것 자체가 싫었다.

“우린 왜 이렇게 됐을까?”

레이먼드가 물었다.
노을에 어울리는 감상적인 질문은 시골 한량들에게나 던져주었으면.
도로테아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도로테아 밀라네어가 태어났을 때부터.

“네가 조금만 나를 믿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조금만 여유를 갖고 시간을 줬더라면 이렇게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너를 믿어? 여유를 갖고 시간을 줘? 그럼 그동안 날 쳐낼 계획을 세웠겠지.”

“도로테아.”

“왜, 아니야?”

도로테아의 날카로운 물음에 레이먼드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술잔을 들어 포도주를 마셨다.
도로테아는 당장 죽음을 앞에 두고도 여유를 부리는 레이먼드의 행동이 그녀를 무시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널 죽이러 왔어, 레이먼드.”

“도로테아. 난 네가 네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후회? 그런 건 네가 해야지.”

도로테아는 후회라는 단어가 자신에겐 결코 찾아오지 않을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선택은 최악을 피하고 생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니 후회할 것도 없다.
하지만 레이먼드는 슬픈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후회를 장담하는 듯이.
도로테아는 레이먼드의 측은한 눈빛에 화가 치밀었다.

“……이 순간에도 짜증 나는 건 뭔지 알아? 내가 널 죽이는 건 반란이라고 손가락질받을 텐데 네가 날 죽이는 건 황위를 보전하기 위한 합당한 일이라고 찬양받을 거란 점이야.”

도로테아는 이미 사람들이 자신을 뭐라고 부를지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에서 이겨 황제가 되어도 그녀의 수식어는 이미 정해져 있다.
반란을 일으켜 제 오빠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한 황제.

권력에 눈이 멀어, 아버지의 장례식에 군대를 몰고 올라와 제 혈육까지 죽인 탐욕스러운 폭군.

정령도 보지 못하고 선황의 인정도 받지 못한 그녀가 황위를 갖는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레이먼드가 선황의 유언을 받들어 그녀를 제거하고 황위를 ‘지켰다’면?
그는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한 정당하고도 강인한 황제가 되리라.
그는 반역자를 처단하고 밀라네어 가문의 위대한 정통을 이어갈 것이다.

“놀랍지 않아? 태어날 때부터 너는 선이고 나는 악이라는 게.”

“…….”

“뭐야, 전혀 몰랐다는 듯한 그 표정은?”

역겨움에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지금껏 계속 그래왔잖아, 레이먼드.”

너는 모든 걸 손쉽게 가지면서 사랑받았고, 나는 늘 저 멀리 뒤에서 외면당해야만 했지.
내가 너만큼 갖는 건 죄가 되었고, 네가 나보다 많이 갖는 건 미덕이었지.
유형적인 것이든 무형적인 것이든, 그 어떤 것도 도로테아는 레이먼드를 앞설 수 없었다.
도로테아는 헤아리기 힘든 수많은 차별을 떠올리며 자조했다.

“……넌 그렇게 생각했구나, 도로테아.”

레이먼드는 꼭 낯선 이국의 언어를 되뇌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하, 정말 넌 아무것도 몰랐구나. 아니, 모르는 척하는 건가?
하지만 그 덕에 도로테아는 완전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비정한 칼을 들어 올렸다.
레이먼드는 그녀의 칼날이 저물어가는 노을 끝에서 붉게 빛나는 것을 응시하고, 차분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레이먼드 또한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레이먼드의 검은 도로테아가 차고 있는 검보다 더 좋은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하지만 도로테아는 개의치 않았다.
그깟 검보다 더 큰 차이와 차별을 숱하게 꺾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승리할 것이다.

도로테아는 늘 그녀의 앞에 있던 레이먼드와 마주했다.
레이먼드의 눈은 그사이 검을 잡기 위한 전사의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사위가 어두워졌다.
하지만 레이먼드만은 주위를 둘러싼 정령들의 빛에 감싸인 채 방 안을 밝혔다.

어둑어둑한 공기 가운데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레이먼드를 향해, 도로테아가 달려들었다.
빛의 정령들은 두 사람의 싸움을 부추기기라도 하는 듯 주위를 뱅뱅 돌며 두 사람을 위한 조명을 비추었다.
레이먼드만 쓰러뜨리면 황위는 온전히 도로테아의 것이었다.
도로테아는 두려움보다 충만한 희열을 느꼈다.

레이먼드는 그녀의 상상보다 훨씬 강했고, 검을 부딪칠 때마다 강렬한 파동에 빛의 정령들이 멀찍이 물러났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날카로운 레이먼드의 눈빛이 도로테아를 찢어발길 듯했다.
도로테아는 멍청하게 해맑은 것보다는 악에 가까운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당장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심장을 파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눈.

그래, 너도 날 죽이고 싶지?
불길 위를 지나는 가느다란 끈 위를 걷듯 팽팽한 긴장감이 방을 가득 채웠다.
검에 베인 쿠션이 뜯어져 거위 털이 눈 내린 듯 날리고 도자기가 깨져 바닥에 산산이 부서졌다.

“읏!”

빛의 정령에 둘러싸인 레이먼드의 검이 그녀의 귓가를 스치며 긴 금발 머리카락을 베어냈다.
레이먼드는 도로테아에게 제 실력이 우위에 있다는 걸 그렇게 알렸다.

“항복해, 도로테아.”

레이먼드는 도로테아에게 투항하라고 경고했다.
꼴에, 항복하라는 말만큼은 황제처럼 단단한 명령투였다.
그러나 도로테아는 피식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내 항복을 받아내고 싶다면 머리카락이 아니라 내 머리를 잘라야지.”

그렇게 쉽게 항복했을 일이면 시작하지도 않았어.
그 한마디에 레이의 눈빛이 이내 무너졌다.
왜 그런 눈을 하지? 대체 왜…….
도로테아가 레이먼드를 넘어서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반역이 유일했다.
근력도 체력도 모두 레이먼드가 도로테아보다 뛰어났고 검을 다루는 유려함도 그가 위였다.

공부 머리는 나빠도 검에서만큼은 늘 뛰어난 레이먼드였으니까.
그러나 도로테아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네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이 싸움은 끝이 나.
도로테아는 다시 레이먼드에게 달려들었고, 두 사람은 수 합을 다시 주고받았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문 레이먼드의 검이 다시 도로테아의 허리를 깊이 베어냈다.
쑤욱 밀고 들어오는 칼날에 도로테아는 이것이 가벼운 상처가 아님을 깨달았다.
칼날이 지난 궤적을 따라 붉은 선이 그려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도로테아……!”

눈빛과 함께 흔들리는 레이먼드의 검.
도로테아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푹.
깊이 박힌 그녀의 검이 레이먼드의 가슴을 붉게 물들였다.
챙그랑, 그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싸울 땐 끝까지 이길 생각만을 해야지, 멍청한 레이.

도로테아의 푸른 눈이 승리를 가늠하는 긴장된 희열로 젖어들었다.

허리에서 배어 나오는 피도, 고통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겼다. 드디어……!
그런데 먼저 미소를 지은 것은 레이먼드였다.
그의 입가에 번진 미소에 제 미소를 빼앗긴 듯, 도로테아는 얼어붙었다.
왜 웃는 거지……? 넌 졌잖아? 죽어가고 있다고!
레이먼드는 끝까지 승자의 미소마저도 도로테아로부터 빼앗아갔다.
혼란에 빠진 도로테아의 뺨에 아직 식지 않은 따뜻한 손이 닿았다.

“도로테아.”

그가 도로테아의 뺨 위에 튄 피를 닦아냈다.
도로테아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그녀는 턱을 부서뜨릴 것처럼 이를 꽉 깨물었다.

“울지 마, 도로테아.”

꺼져가는 목소리와 함께 빛의 정령들이 도로테아를 감쌌다.
내가 울고 있다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기뻐서 이렇게 웃고 있는데! 울고 있는 건 패배한 너잖아!
도로테아는 레이먼드에게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으나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된 거야……, 도로테아…….”

레이먼드의 속삭임이 그녀를 어루만지듯 전해져 왔다.
도로테아는 형언할 수 없는 불쾌감에 휩싸였다.

“헛소리 집어치워……!”

싸구려 사탕처럼 달콤한 말로 날 흔들려고 했다면 큰 오산이야.
난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아.
도로테아는 자신의 뺨에 닿은 레이먼드의 손을 쳐냈다.
그러자 그 힘을 버티지 못한 레이먼드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숨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거칠었고, 이따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호흡이 멎곤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레이먼드는 홀로 서 있는 도로테아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먼드의 눈빛에 담긴 악의 없는 미련에 도로테아는 주먹을 쥐었다.
반란을 일으키고 그를 죽이는 것이 떳떳한 일이 못 될 것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먼드는 그런 그녀를 더 깊은 지옥으로 끌어내리려는 듯 죽음 끝에서도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가 악인임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선한 미소.
저주를 퍼붓고 원망하며 도로테아를 난도질하듯 비난해야 할 그는, 끝까지 착했다.

“미안해…… 내가 부족해서…….”

그 끝에 떨어지는 눈물까지도 완벽하게 끔찍했다.
도로테아는 그의 눈물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어디선가 식은땀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아, 그녀는 힘껏 버텼다.
그런 그녀의 주변을 빛의 정령이 위로하듯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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