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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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보기 싫었던 거라고. 카르넌과 나는 줄곧 좋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건방지다고 느껴질 정도로 빤히 카르넌을 올려다보았다.
기억보다 꽤 젊은 얼굴이었지만 그는 역시 황제다운 묵직한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이쪽은 도로테아 밀라네어 황녀입니다, 폐하.”

유모는 굳이 뒤에 있던 나를 앞으로 서게 하며 소개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유모.

“교육을 못 받은 건가?”

카르넌이 인사 하나 하지 않고 눈을 치켜뜬 나를 보며 거슬린다는 듯 물었다.
‘교육해 줄 부모가 없어서 말이죠’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은 것을 착하게 살겠단 다짐으로 참았다.

“아닙니다, 폐하! 황녀님께선 무척 똑똑하고 특별하시답니다!”

“글쎄, 내 눈엔 작고 건방진 계집애로밖에 안 보이는군.”

“그, 그게 황녀님께서 폐하를 처음 뵙는 거라 놀라셔서 그런가 봅니다. 황실 예법에도 밝으신 분인데…….”

유모가 진땀을 빼며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하아…….
나는 한숨을 쉰 뒤 무릎을 굽혔다.

“밀라네어 폐하를 뵙습니다.”

카르넌에게 인사해 주는 건 다 유모를 위해서야.
내가 카르넌에게 예법에 맞추어 인사하자 그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몇 살이지?”

“여, 여, 여.”

“올해로 여섯 살입니다.”

카르넌의 물음에 버벅이며 대답하는 유모가 안쓰러워서 나는 직접 대답했다.
그러자 카르넌이 다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디가 특별하다는 거지?”

“유모가 지나친 팔불출입니다. 제겐 특별한 면이 없습니다. 폐하.”

“폐하! 보시다시피 황녀님께서는 겸손하고 또래에 비해 무척 총명하십니다. 벌써 황실의 가계를 전부 외우고 계십니다!”

유모는 아주 작정하고 나왔는지 카르넌 앞에서 감히 나에 대해 읊어댔다.
유모 딴에는 지금까지 외면받던 황녀를 황제의 눈에 들게 하겠다는 열정이겠지만 나에게는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그에 카르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밀라네어의 가계도를 외운다는 게 사실이냐?”

아니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황제에게 거짓말을 한 죄로 유모의 목이 날아갈 것이 빤했다.
그래도 줄곧 나를 위해 일해준 유모인데 여기서 목이 날아가게 할 수는 없고.

“예, 폐하.”

하는 수 없이 카르넌과 말을 섞어야 했다.

“외워봐.”

건방진 카르넌.
나는 그의 무례함에 찌그러지려는 미간을 간신히 붙잡았다.

“황실의 가계라면 폐하께서도 이미 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내가 반항 어린 말대꾸로 받아치자 카르넌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굳은 표정에 정원에 겨울바람이라도 부는 듯 모두가 벌벌 떨었다. 나와 카르넌만 빼고.

“혹 밀라네어 황실의 가계를 모르십니까?”

“지금 나를 시험하는 건가?”

“폐하께서 저를 시험하시려는 것 같은데요.”

나의 발언에 모두가 경악에 빠졌고 유모의 눈은 튀어나올 정도로 커다래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카르넌이 내게 무관심하기는 해도, 여섯 살 난 딸의 목을 칠 정도의 미친놈은 아니라는 걸.
폭군은 내 수식어였지 카르넌의 수식어는 아니었으니까.
카르넌은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는 제법 괜찮은 평가를 받는 군주였다. 비록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제가 여기서 가계도를 읊는 게 무슨 이익이 있는지요?”

나의 당돌한 질문에 카르넌이 하, 하고 짧은 숨을 터뜨렸다.

“황제의 명령에 토를 다는 건가?”

“바쁘신 황제 폐하의 시간을 아껴 드리려는 겁니다. 제가 태어난 후로 단 한 번도 저를 찾지 않을 만큼 바쁘신 분 아닙니까?”

아, 6년 만에 처음 만난 ‘아버지’를 원망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지금까지 관심 한 번 주지 않던 주제에 다짜고짜 명령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내 말에 카르넌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네게 이익이 될 때만 가계도를 읊겠다?”

카르넌의 눈빛이 약간의 흥미로 빛났다.

“적어도 저와 폐하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유모의 말이 사실이군.”

잠시 눈을 흘기며 중얼거린 카르넌은 다시 그의 무릎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도로테아 밀라네어.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보아라.”

가지고 싶은 걸 말해보라고?
카르넌의 입가엔 미소 한 점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머리를 맞은 듯 놀랐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 건방지다고 한 소리 할 줄 알았는데.
내 기억상 카르넌은 내게 이런 말을 건네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카르넌은 최소한 재롱을 부린 개에게 뼈를 던져줄 용의는 있는 듯했다.
문제는.

‘난 당신에게 바라는 거…… 없는데.’

회귀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카르넌에게 바라는 게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바람을 가져봤자 무의미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하지만 카르넌은 개가 황제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매서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대답하라.”

여섯 살짜리 딸에게 보이는 칼날 같은 눈빛에 유모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다행히 이런 아픔에 내성이 생긴 지 오래였다.
갖고 싶은 것을 억지로 떠올리기 위해 한참 머리를 굴리던 내게 그나마 유용한 생각이 스쳤다.

“제 이름으로 최상급 와인을 빚어주세요.”

마침 카르넌의 면상을 보니 술이 좀 당겨서 떠오른 아이디어.

“뭐……?”

“잘 숙성시키면 제가 큰 다음에 먹을 만해질 것 같아서요.”

지금 내가 담글 수는 없으니 이 정도는 카르넌을 시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지, 와인. 숙성하는 데도 기간이 필요하고 말이야.
올해 포도 농사가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잘 숙성시키면 성인이 된 후에 적당히 곁들일 만한 술이 되리라.
내 대답에 카르넌의 엄격한 눈빛이 유모에게로 돌아갔다.

“유모, 이 아이에게 뭘 가르쳤지?”

“저, 저는 단 한 번도 황녀님 앞에서 술 얘긴 꺼내본 적이 없습니다, 폐하!”

두려움에 떠는 유모가 몸을 바닥으로 낮추고 빌듯이 말했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와인을 담가달라는 부탁을 했다.”

카르넌의 목소리가 살벌하게 유모를 위협했다.
지금껏 내 교육에 관심도 없었으면서 뒤늦게 화를 내는 게 참 가당치 않았다.

“유모가 가르쳐 준 거 아니에요.”

나는 애꿎은 유모를 곤경에 빠뜨리는 카르넌을 막아섰다.

“유모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면?”

“책에서 읽었어요. 와인은 길게는 수십 년 숙성된 것들이 있다고.”

사실 나는 술을 꽤 즐기는 편이었지만 아직 술을 즐긴다고 말하기엔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 외에도 이미 어른의 세계를 깊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말했다간 유모가 심장마비에 걸려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책에서 읽었다?”

카르넌치고 질문이 너무 많았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장 길게 나눈 대화에 꼽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바벨루아의 초상>이라는 책이요. 거기서 바벨루아가 연인과 오래된 와인을 마시면서 풍미가 뛰어나다고 묘사한 장면이 있거든요. 그래서 한번 좋은 와인을 먹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어요.”

나는 태연하게 임기응변하며 유모를 감쌌다.
유모는 호들갑이 심해서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내 일을 돌봐주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유모가 있어야 식사도 챙겨 나오고, 원하는 책을 도서관에서 가져다 달라고 할 수도 있고…….

“<바벨루아의 초상>을 읽었다고?”

“예, 폐하.”

그는 내가 <바벨루아의 초상>을 읽은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바벨루아의 초상>은 어느 기사가 몰락 귀족 바벨루아와 함께 여행하며 바벨루아의 삶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서술한 희곡이었다.
인물의 고뇌와 비유적인 표현들이 뛰어난 덕에 희곡의 정수로 꼽혔다.
그래도 별로 길지 않고 문장 자체가 읽기 어려운 건 아니니까 여섯 살이 읽는 것도…… 불가능하려나.

나를 향한 카르넌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네 이름을 걸고 최상급 와인을 담가주마. 그러니 황실의 가계, 외워봐라.”

카르넌이 나를 감시병처럼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단, 하나라도 틀릴 경우 거짓말을 한 네 유모를 처벌하겠다.”

카르넌의 말에 유모의 몸이 떨려왔다.
여섯 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이런 협박을 해가며 가계를 외우게 하다니.
나는 속으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내 될성부른 폭군의 떡잎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을 수 있다는 끔찍한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초대 밀라네어부터, 종가 직계 먼저 읊겠습니다.”

착하게 살기로 했으니, 유모 목숨은 구해줘야지.
* * *

“황녀님, 정말 잘하셨어요!”

유모가 떨리는 가슴을 꼭 쥐면서도 내게 칭찬세례를 퍼부었다.
카르넌 앞에서 황실의 가계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웠기 때문이다.
방계까지 읊고 나니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도 카르넌은 나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일방적인 시험이기는 했지만, 카르넌과 그렇게 오랫동안 사적으로 마주한 적이 있던가?
카르넌이 이상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이제 황녀님께 관심을 가져주실 거예요.”

“유모, 난 황제 폐하의 관심을 별로 받고 싶지 않아.”

나는 일부러 어린아이처럼 나무 블록을 쌓으며 말했다.
카르넌과 만나면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나쁘면 착하게 살기 힘들다.
그러므로 착하게 살기 위해서는 카르넌을 만나지 말아야 한다.
깔끔한 삼단 논법에 의거하여 나는 카르넌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모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슬픔에 젖어 나를 꼭 안아주었다.

“불쌍하신 분…….”

“…….”

유모의 품속에 나는 무표정하게 안겨 있었다.

“황녀님, 폐하는 황녀님의 아버지세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카르넌이 내 아버지고, 나는 그의 딸일 수밖에 없는 이 관계가.

“폐하께서는 황녀님을 좋아하실 거예요. 너무 바빠서 신경을 못 쓰시는 것뿐이에요.”

“그만해. 유모.”

그건 유모의 바람일 뿐이잖아.
그런 기대 해봤자 소용없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아.
그러니까 거짓된 바람 불어넣지 마.

“나 졸려. 잘래.”

유모가 계속 카르넌 이야기를 할 것 같아서, 그녀를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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