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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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온은 낮에 도로시가 아프다며 의무실에 들어가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를 거절하려고 의무실에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아팠던 걸까?

“아니야. 자다가 깼어. 테라스 창문이 열려 있었나 봐.”

도로시는 저도 모르게 능숙하게 거짓말을 뽑아냈다.

“그러는 너는, 왜 이렇게 늦은 밤에 정원에 나와 있었어?”

“저는 밤을 좋아하거든요.”

“밤을?”

“프리드라서 그런가 봐요. 에피스테메에서 지낼 때도 몰래 밤 산책을 다니곤 했거든요.”

“아.”

그래, 알고 있어. 네가 밤엔 늦게 자고 낮잠을 즐긴다는 거.
도로시는 자신이 아는 테온의 습관이 언급되자 어쩐지 정답을 맞힌 것처럼 뿌듯해졌다.

“그럼, 황녀님. 이만 다시 주무셔야죠.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응…….”

“그리고 이거. 혹시 필요하면 계속 갖고 계셔도 괜찮아요.”

테온이 제가 쥐고 있던 손수건을 도로시에게 내밀었다.
그에게 손수건 한 장 정도야 도로시에게 그냥 줄 수 있는 가벼운 물건에 불과했다.
어차피 그에게 돌아와 봤자 다른 평범한 손수건과 똑같을 뿐이니…….

‘아닌가? 황녀님께 갔다 온 손수건이니까 조금 다르려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도로시의 눈빛이 반짝이며 빛났다.

“정말 내가 가져도 돼……?”

기쁜 듯 묻는 도로시.
회귀 전 테온은 도로시에게 선물을 준 적이 없었다.
형식적으로 주고받아야만 하는 결혼반지나 감정 하나 없이 하인들이 준비한 생일 화환은 선물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
그렇기에 손수건은 더 뜻깊었다.
테온이 도로시를 위해 기꺼이 내어준 그의 일부분.
테온은 예상보다 훨씬 더 기뻐하는 도로시를 보곤 조금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고마워.”

도로시가 조심스레 손수건을 받자 테온이 작게 웃었다.

“그럼 저도 이만 돌아가 볼게요.”

너무 늦은 시간, 숙녀의 방에 오래 있는 건 실례라고 배웠다.

“안녕히 주무세요, 황녀님.”

“응……! 그래.”

테온이 담백한 인사를 남기고 방으로 돌아갔다.
도로시는 테라스 문을 닫고 침대에 달려가 다시 풀썩 누웠다.
테온이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했지만, 다시 잠들 수 있을까?

‘이런 작은 일로 설레다니, 너 정말 바보구나, 도로시.’

도로시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생각했다.
들뜨지 마, 설레지 마.
테온은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란 말이야.
손수건 하나 선물해 줬다고 설렐 일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결혼했겠다.
혼자 들떴다가 나중에 실망할 것이 두려워서 도로시는 싹트는 마음들을 모두 뽑아버리려고 애썼다.

불과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몇 마디 되지 않는 간단한 대화, 누구에게나 선물할 수 있을 법한 특별하지도 않은 선물.
따로 도로시를 위해 사 온 것도 아니고 그저 쓰던 손수건을 줬을 뿐이다.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좋아하면 안 돼, 도로시.

‘줄리아가 있어.’

도로시는 다시 한번 버킷리스트를 되새겼다.

[둘째, 남의 것을 탐하지 않기.
황위는 레이의 것. 테온은 줄리아의 것.]

‘그래도, 혹시 테온이 나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때는 조금 욕심을 내어보아도…….’ 모르겠다. 뭐가 옳은 건지.
두 번째 삶인데도 모르겠어.
* * *


“황녀님! 내일 축제에 검술 대회가 있는데요~”
클라라는 레이가 참여하는 검술 대회를 구경 가자고 꼬시기 위해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런데.

“화, 황녀님도 검술 대회에 신청하셨다고요? 그것도 청소년 대회로?”

예상치 못한 도로시의 대답에 클라라는 입을 틀어막았다.

“왜 그렇게 놀라, 클라라?”

“아니요, 황녀님은 청소년 대회에 나가기엔 아직 어리시니까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괜찮아.”

도로시가 괜찮다고 하니 괜찮은 거겠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레이먼드 전하와 황녀님이 같이 나간다는 거잖아!’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이고 말았다.
레이는 도로시에게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겠다며 나이를 열다섯 살로 속이고 ‘루이’라는 이름으로 검술 대회에 접수했다.
그런데 도로시도 그 대회에 나가기로 한 것이다!
클라라는 도로시의 뒤에 있는 슈테판을 째려보았다.

‘왜 말씀 안 해주셨어요, 기사님!’

찌릿찌릿한 클라라의 눈빛에 슈테판이 눈을 끔뻑였다.
클라라는 그런 슈테판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고 싶었다.
원래 말이 없는 슈테판이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큰일은 말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클라라는 당장 슈테판의 널따란 등짝을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려주고 싶었다.

처음엔 커다랗고 말이 없어서 무섭기만 한 슈테판이었는데, 이제 클라라는 슈테판이 말이 없어서 속 터지는 커다란 곰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입에 자물쇠를 채운 슈테판을 원망했지만 이제 와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두 분이 붙게 되면 큰일이야!’

도로시와 레이가 같이 붙으면 모든 계획은 엉망이 되고 만다.
레이가 도로시를 이겨도 문제고 도로시가 레이를 이겨도 문제다.
레이가 도로시를 이기면 도로시는 패배했다는 것에 기분이 상할 것이고, 도로시가 레이를 이기면 레이의 ‘바보 오빠 이미지 극복’은 불가능해진다.
검술에서마저 도로시가 레이를 이겨 버린다면, 나름 검술에는 자신 있는 레이도 충격을 받을 것이고 도로시는 레이를 이전보다 더더욱 한심하게 보겠지.

‘아니지, 아니지. 그래도 두 분이 꼭 붙으라는 법은 없어.’

그래도 청소년 대회였다.

도로시와 레이 모두 어린 축에 속했다.
열여덟, 열아홉 살 틈바구니에 끼어서는 토너먼트식으로 이뤄지는 대회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레이와 도로시는 서로 만나기 전에 어느 한쪽 혹은 양쪽이 탈락해서 만나지 못할 확률이 더 컸다.

‘두 분이 꼭 이겨서 우승까지 갔으면 좋겠지만, 이 클라라는 두 분이 싸우지 않는 걸 더 바란답니다.’

클라라는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 * *

“내 대회까지만 보고 가는 거야, 테온.”

“알았어, 레이. 안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테온은 레이와 클라라의 만류로 별궁에 좀 더 남아 있기로 했다.

‘게다가 도로시 황녀님도 이제 그렇게 화가 나신 것 같지도 않고.’

테온은 그날 밤 마주쳤던 도로시를 떠올렸다.
다행히 도로시는 그에게 조금은 마음을 연 듯했다.

‘하지만 아직도 어색하네.’

그날 손수건을 선물하면서 관계가 많이 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날이 밝자 도로시는 또 그와 어울려 주지 않았다.
식사도 따로 했고, 마주치면 후다닥 피해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도로시는 파도 같았다.
쏴아 하고 반갑게 다가오다가도 발끝을 적시면 붙잡을 새도 없이 멀리 뒤로 빠져 버리는 파도.

“테온, 너도 대회 나가면 좋을 텐데. 너도 검이라면 꽤 하잖아.”

레이의 말에 테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검을 잘 다루는 건 사실이지만, 레이에 비하면 부족한 실력이었다.
더욱이 그는 대회에 나가는 것처럼 요란스러운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꼭 우승할 거야. 우승해서 우승 상금을 전부 도로시한테 줄 거야.”

레이는 요 며칠 별궁에서 지내는 동안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린 도로시를 떠올렸다.
같은 별궁에서 지내는데도 도로시는 레이와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찾아오지도 않고, 찾아가는 것도 어렵고.
이러려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닌데.
도로시와 함께 바다에서 수영도 하고 세리티안 지역에서 볼만한 것도 함께 둘러보려고 했는데.
섭섭하기는 했지만 검술 대회가 끝나면 도로시와 사이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겠지?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테온도 그런 레이를 독려했다.
그는 레이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에피스테메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로 어지간한 기사들과도 견줄 수 있는 수준이니 보이는 것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리라.

* * *
대회장에 도착한 두 사람이 당혹감에 빠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응원하러 온 거 아니었어?’

‘구경하러 온 줄 알았는데.’

대회장에 같이 올 때까지만 해도 도로시와 레이는 서로가 응원하기 위해, 혹은 대회를 구경하려고 하는 줄로만 알았다.

“클라라, 알고 있었지?”

“저도 어제 알았어요, 황녀님! 왜 나간다고 일찍 말씀 안 해주셨어요?”

도로시는 한숨을 쉬었다.
멀리 도로시의 눈치를 보며 대회를 준비하는 레이가 보였다.
그의 곁에는 테온이 준비를 돕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테온은 경기에 출전하지 않는다고 했다.
도로시는 잠시 출전을 포기할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레이 하나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걸 그만두기는 싫어. 이건 나쁜 짓도 아니잖아.’

도로시는 머리끈을 꽉 조여 묶었다.
레이랑 대결하게 되더라도 이기면 돼.

“긴장되세요, 황녀님?”

“아니. 하나도.”

도로시는 목숨을 내놓고 전쟁을 치러보았고, 또한 레이의 황위를 빼앗기 위해 제 손으로 불구덩이를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동네 대회로 긴장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레이와의 대결은 오랜만이라서 약간, 피가 끓었다.
의연한 도로시와 달리 멀리 떨어져 있는 레이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떨린다, 어떡해.”

레이는 꼭 에피스테메 시험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평소 친구들과의 대련에는 긴장하지 않으면서 꼭 ‘시험’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는 병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도 도로시가 더 신경 쓰였다.

“도로시 괜찮을까……?”

레이는 출전을 준비하는 선수 중 가장 작은 체구를 가진 도로시가 걱정됐다.
아무리 보아도 도로시는 이 대회에 나오면 안 됐다.
출전자 중에는 이미 어른이라고 부를 만큼 큰 사람도 많았다.
레이도 선수 중에는 작은 편에 속했는데 레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도로시라면 이미 신체적 조건에서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로시가 저렇게 커다란 사람들과 싸우다 다치면 큰일인데.
대결이란 것은 하다 보면 험해지는 일이 많고, 다치는 것은 예사였다.
레이는 차라리 저런 사람들이 자신과 먼저 붙어 미리 꺾어놔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마침 대회의 심판이 대진표를 발표했다.
참가하는 선수는 총 열여섯 명.

‘제발 황태자 전하와 황녀님이 첫판에 붙지 않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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