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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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단이 흙을 털어주려고 한 건데 그렇게 확 빼앗으면 어떡하니!”

공작 부인도 에단의 편이었다.

“쟤가 내 거 맨날 만진단 말이야! 인형에 안 묻었어!”

조나단은 억울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이 참 못나 보였다.

“네가 형이니까 에단을 이해해 줘야지!”

그러면 에단은 속으로 만족스럽게 웃으며 공작 부인의 치마를 붙잡았다.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보드랍고 하얀 손등으로 촉촉한 눈가를 닦으며 올려다보면 공작 부인은 또 어느새 마음이 녹아내려서는 ‘오오, 에단!’ 하며 안아주는 것이었다.
부인에게 안긴 에단은 아무도 몰래 조나단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바보 같은 녀석.’

그게 반복되다 보니 조나단은 에단을 매우 싫어하게 되었다.
에단은 조나단이 자신을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좋았다.
사랑스럽고 애처로운 약자 포지션은 에단이 사랑하는 자리였다.
에단이 먼저 조나단을 공격해도 이젠 모두 에단의 편을 들어준다.
단, 외부 사람들 앞에 ‘에단 브론테’를 드러내야 할 때만 빼고.

아무리 아름답고 착한 아이여도, 에단 브론테는 브론테 공작이 술집 여자와 외도하여 낳은 아이.
브론테의 작은 수치.
브론테 공작가의 사람들은 손님이 올 때면 에단의 존재를 숨기기에 바빴다.
조나단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에단을 들켰을 때, 하인이라고 소개했다.

조나단이 에단에게 우월 의식을 느낄 수 있는 건 다 그 때문이었다.
에단에게는 브론테 가문의 문양이 들어간 옷도, 물건도 허락되지 않았다.
공작과 공작 부인도 에단을 아끼면서도 공식적인 자리에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은 꺼렸다.
아무리 보아도 에단은 공작 부인의 자식이 아니었고 서자 가운데서도 지나치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에단, 우린 널 정말 아낀단다. 알지?”

공작 부인은 에단을 두고 사교 행사에 나갈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그럴 때면 에단은 작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예, 어머니.”

에단은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대신 돌아올 때 제 바이올린 현을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에단.”

말을 잘 듣는 만큼 얻을 수 있는 것도 챙기는 아이였고.
브론테 부부는 에단을 홀로 두거나 숨길 때마다 미안한 마음에 에단이 바라는 걸 하나씩 들어주곤 했다.
에단은 그 거래에 만족했다.
어차피 파티 같은 덴 갈 생각 없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에단의 존재는 이미 이 근방에 알려져 있었다.

에단의 존재감은 애당초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뿐이지, 세리티안 지역에 사는 사람 중 그가 공작가의 서자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추문이니까 쉬쉬하고 입에 올리지 않을 뿐.

“그래도 서자인데 저 정도로 살면 잘됐네.”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하긴, 술집 여자 밑에서 태어난 바깥 자식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친모도 아닌 공작 부인을 어머니로 부르며 공작저에서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대접이지.
브론테 입장에서는 가문의 수치를 보듬어주는 것이었으니까.

그들은 서자인 에단에게 충분히 ‘잘’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에단은 조용히 ‘브론테 공작가의 비밀스러운 서자’로 살아왔다.
차분히 때를 기다리면서.
하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도련님, 뺨이!”

에단은 공작가에 돌아오자마자 뭇 하인들의 시선을 받았다.
조나단이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아직도 빨간 뺨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에단은 공작 부인과 브론테 공작에게 가서 빨간 뺨을 내보였을 것이다.
그러곤 아무것도 아니라며 처연하게 웃고는 조나단의 눈치를 힐끔 보며 머뭇거려 보였으리라.

그렇게 하면 공작 부부는 바로 조나단의 짓인 걸 알아차리겠지.
조나단은 에피스테메에서 돌아온 첫날부터 실컷 혼날 테고 에단은 오랜만에 조나단이라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에단은 자신에게 온 관심을 쏟는 하인들을 뒤로하고 곧바로 방으로 올라갔다.
조나단을 놀리는 것도 공작 부인의 환심을 사는 것도 발이라도 핥아줄 것 같은 하인들을 데리고 노는 것도 흥미가 없었다.

‘……도로테아 밀라네어.’

방으로 올라온 그는 그 작은 소녀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빌어먹게 울 것 같은 표정도.
에단은 한 번 숨을 고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너무 약했나?’

에단은 방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천사 같은 모습의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누구나 찬탄해 마지않는 아름다운 소년.
하나 에단은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이리저리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보았다가 소매를 접어 걷어 올려보았다가 니삭스를 당겨 신어보았다.

‘……별로야.’

늘 완벽했던 외모인데, 조나단이 뺨을 때린 자국 때문인가? 아무리 만져보아도 제 모습이 영 성에 차지 않았다.
도로시를 만나고 나면 늘 그랬다.
처음부터 도로시는 그의 미모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의 외모를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잘생겼네’로 끝난다.

그의 어떤 행동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별궁에 놀러 가보아도 도로시는 매번 평범하게 그를 맞았다.
평범해도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이어도 너무 일상적이다.
특별히 반기는 기색도 없고, 그의 얼굴을 보고 기뻐하며 활짝 웃지도 않았다.

‘내가 받기에는 너무 좋은 물건이다. 도로 가져가.’

일부러 고심해서 골라 갔던 펜던트도 마다하고 기어이 받지 않았다.

왜? 비싸고 좋은 보석인데? 이런 거 안 좋아해?
예상과 다른 도로시의 반응에 에단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그에게 아예 관심이 없나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에단은 자신의 하얀 손목을 보았다.

‘따라와.’

조나단을 잔뜩 협박하고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앞서 나가던 도로시.
키가 작아 보폭이 좁은데도 어찌나 빠른지.
그때 도로시가 잡았던 손목 부근에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에단은 도로시를 뒤따라가며 예상했다.
이제 곧 상처를 걱정해 주며 그의 처연한 눈빛에 마음을 쓰게 될 것이라고.
그런데 도로시는 그보다 먼저 슈테판과 이야기하기 바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내 뺨과 베인 손을 걱정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 얼굴 한쪽이 빨간 거 안 보이냐고.
그러나 두 사람 사이는 그가 끼어들기 힘들 정도로 긴밀해 보였다.
겨우 그 덩치 큰 곰한테 고맙다고 하느라고 그를 뒷전으로 놓는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앗…….’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보겠어?
그가 조나단에게 맞은 뺨을 매만지며 아픈 척을 하고 나서야 도로시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별궁에 도착한 후였다.
에단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 레이와 테온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로시.

그가 얼굴을 쑥 들이밀고 나서야, 그가 존재했음을 깨닫던 도로시.
에단은 계속 도로시의 곁을 지켰다.
황녀님, 나를 봐요. 이토록 아름다운 날 좀 보라니까?
몇 번이나 불러보아도 도로시는 그를 완전히 유령 취급했다.
그리고 도로시는 유령처럼 투명한 그의 너머로 테온 프리드를 보았다.

테온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찌나 애처로운지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황녀님께선 벌써부터 그 대단하신 대공가 자제분을 좋아하신다.
에단은 도로시의 방에 놓여 있던 손수건을 떠올렸다.
도로시가 황급히 숨기기는 했지만 분명 프리드가의 문장이 새겨진 손수건이었다.

‘……찢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손수건의 주인은 보지 않아도 테온 프리드, 그 붉은 눈이었다.

‘테온 프리드.’

에단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도로시가 테온 프리드와 이야기를 나눌 때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그 표정이 그의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에단은 도로시의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평생 아무리 노력해도 선물할 수는 없을 것 같은 표정.
그건 테온 프리드만이 도로시에게 줄 수 있는 표정이다.

‘테온도 싫지만 그런 얼굴을 하면서까지 테온을 좋아하는 도로테아가 더 싫어.’

거울 속에 비친 소년은 서늘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전혀 아름답지 못한 자신을.
그때 달칵 문이 열렸고, 거울 속의 소년은 순식간에 천사의 빛을 띠었다.

“도련님, 여기 앉아보세요. 어쩜…….”

유모가 작은 약병과 거즈, 물동이를 가지고 들어왔다.
유모는 에단을 의자에 앉히고 빨갛게 부은 뺨을 살펴보았다.
에단은 겨우 뺨이 빨개진 것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유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미소 지었다.

“고마워, 유모.”

그 미소에 유모가 헤벌쭉 웃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내가 웃어주면 다들 좋아하잖아?
설령 뺨이 부었을지라도 에단의 외모에는 문제가 없었다.

‘흐음…….’

에단은 잠시 고민하다가 유모를 보았다.

“유모, 근데 얼굴이 조금 빨개. 어디…… 열이 나나?”

에단은 조심스레 유모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유모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얼굴이 빨개요? 어머,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정말 열이 나나? 도련님이 그러시니 진짜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유모가 두 뺨을 만져보고는 자기 허벅지를 팍팍 때리며 난리를 피웠다.
좋아 죽을 듯 호들갑을 피우는 유모를 보며 에단은 여상하게 생각했다.

‘그래, 이게 정상이라고.’

눈을 맞춰주면서 이마를 만져주면 좋아해야지. 설레야 하는 거잖아.
심지어 공작 부인은 이따금 우울할 때 내 얼굴을 보러 오는걸.
그런데 도로시는 그러지 않았다.
에단은 몇 가지를 더 시험해 보았다.
흐트러진 유모의 옆머리를 정리해 주자 유모는 더 해달라는 듯 다른 쪽을 내밀었다.
귀찮을 정도의 관심과 주책이었으나 에단은 웃으며 유모의 머리카락을 양쪽 다 정리해 주고 싱긋 웃었다.

“나 유모 좋아해.”

뺨에 약을 발라주는 유모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자 유모는 금방이라도 코피를 터뜨릴 것처럼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유! 어쩜! 저도 도련님 좋아해요.”

유모는 행복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오늘 다른 고용인들한테 가서 자랑할 것이다. 에단 도련님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공작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 오늘의 에단이 얼마나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유모의 반응을 확인한 에단은 속으로 떫게 혀를 굴렸다.

‘이걸 봐. 다들 좋아서 안달인데 왜…….’

에단은 자신을 찌릿 노려보던 도로시를 떠올렸다.

‘공작가에 가고 싶으면 클라라한테 얘기해. 마차 준비해 줄 거야.’

배웅조차 하지 않겠다는 말에 에단은 자신이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더니 나가라고 등을 떠밀곤 문을 쾅 닫아버리질 않는가!
어처구니없는 일. 이런 박대는 조나단에게나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도로테아 밀라네어는 어째서 날 봐주지 않느냐고.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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