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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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는 홀로 앉아 몇 번이고 표정을 다스리려고 했다.
크게 숨을 쉬어보기도 하고 일부러 얼굴을 찡그렸다 펴보기도 하고,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보기도 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연습한 친절한 미소도 몇 번이고 해봤다.
하지만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조금도 나아지는 기색이 없었다.

‘테온을 만날 때마다 이럴 생각이야, 도로시?’

도로시는 한심한 제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든 테온은 만날 수밖에 없었다.
에피스테메를 가지 않더라도 데뷔탕트 때도 만나게 될 거고 황실 사람으로서 오가다 만날 수밖에 없겠지.
밀라네어와 프리드니까.
그리고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사랑했던 남자의 모습을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테온을 보겠어.
어떤 낯으로, 어떤 표정으로.
도로시는 빨개진 눈가를 손등으로 꾹 눌렀다.
어느새 잊고 있던 과거의 그림자가 그녀의 발목에 달라붙었다.
똑똑.
의무실 문을 걸어 잠근 채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레이? 에단? 아니면 테온?
그 누구든 달갑지 않아서 도로시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쭈그리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 노크는 거의 천장과 가까운 높이에서 들렸다. 꼭 문 위쪽을 두드리는 듯한…….

‘슈테판?’

레이라면 ‘도로시’ 하며 이름을 불렀을 테고 에단이나 테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말없이 노크만 하는 사람이라면 그밖에 없었다.
도로시는 조금 붉어진 눈가를 쓱쓱 닦은 뒤에 빼꼼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커다란 슈테판이었다.

“무슨 일이야……?”

“…….”

말이 없는 슈테판은 도로시를 내려다보더니 의무실 안쪽을 살폈다.

“혹시 다쳤어?”

슈테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클라라 찾고 있어?”

슈테판은 고개를 젓더니 도로시를 내려다보았다.
아, 나를 찾고 있었다고?

오랫동안 함께 지낸 도로시는 슈테판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눈빛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테온이랑 레이 갔어?”

슈테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는 여기 좀 더 있을래…….”

별로 나가고 싶은 기분이 아니어서 대답했더니 슈테판이 자기도 안에 들어가도 괜찮겠느냐고 눈으로 물었다.
도로시는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게 싫었지만 조용하고 말 없는 슈테판이라면 옆에 있어도 상관없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슈테판이 들어와 문을 닫자 도로시는 의무실에 놓인 작은 소파에 풀썩 앉았다.

“……슈테판도 앉아.”

오래 있을 생각이니까.
도로시가 옆에 남은 소파 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슈테판은 머뭇거리며 소파 앞쪽에서 어쩔 줄 몰랐다. 호위 기사가 함부로 앉는 건 안 되는데, 또 도로시가 말하니 옆에 앉아야 할 것 같고.

“앉아. 슈테판이 너무 커서 가뜩이나 좁은 의무실이 답답해져.”

그에 슈테판이 멈칫하더니 결국 조심스럽게 도로시 옆에 앉았다.
슈테판은 키도 크고 어깨도 넓어서 공간을 많이 차지했지만 다행히 열두 살의 도로시는 작았다.
각자 0.6인분과 1.4인분 정도의 크기니 2인용 소파에 앉아도 비좁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정말 오랫동안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일정한 박자로 들려오는 숨소리나 밖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나 이따금 복도를 지나는 하인들의 소리만이 들렸다.

그 차분함 속에서 도로시의 심장도 서서히 평상심을 되찾았다.
그제야 도로시는 여유가 생겨 슈테판을 흘끔 확인했다.
슈테판은 옆에 앉아서 가만히 앞에 있는 벽만 응시하고 있었다. 무료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호위 기사들이 가져야 하는 덕목 중의 하나였다.

모시는 분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게 가만히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기민하게 깨어 있어야 하는 것. 있는 듯 없는 듯 뒤에 서 있는 것.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분명 가만히 있다가 꾸벅꾸벅 졸 텐데 도로시는 슈테판이 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도로시가 가만히 앉아 있는 슈테판을 올려다보자 슈테판은 그녀가 혹시 필요한 게 있나 하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도로시는 말수가 없는 슈테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슈테판……. 슈테판은 비밀 잘 지켜줄 수 있지?”

도로시의 질문에 슈테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는 말…… 다른 사람한테 말 안 할 거지? 클라라나 황제 폐하한테도.”

슈테판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시는 어쩐지 슈테판한테만큼은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열지 못할 비밀 일기장처럼 내 얘기를 적어놔도 누가 보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 같은 믿음직한 사람.
그래서 도로시는 혼자 응어리로 품고 있던 것을 조심스레 슈테판에게 털어놓았다.

“있잖아, 나 엄청 무서운 꿈을 꿨어…….”

물론 모든 걸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순 없으니, 얄팍한 거짓말을 섞어서.

“꿈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날 싫어해. 결국엔 내가 너무 싫어서…… 내 방에서 목을 매달아 죽는 거야.”

도로시의 작은 주먹이 꽈악 말려 들어갔다.
테온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랑하는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를 볼 때마다 끔찍했던 그 끝이 떠올라서. 사랑하는데도 그와의 끝을 그려보면 결국 그 모습뿐이라서.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높은 캐노피. 그 캐노피 아래로…… 늘어진 그의 몸.

그 장면이 떠오르면 테온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죄를 잊지 말라고 상기시키는 그 모습 때문에.
전생에 그녀는 테온의 인생을 망치고 무너뜨린 악인이었다.

여전히 그를 보면 심장이 뛰는데 테온이 그녀에게 건넬 말을 떠올려 보면 온통 부정적인 말뿐이었다.
널 만난 걸 후회해.
널 사랑하지 않아.
네가 증오스러워.
네가 다시 살아나다니 끔찍해,
너 때문에, 내가 죽은 거야.
도로시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 기억들을 떨쳐내려 했다.
슈테판은 그런 도로시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옛날부터 생각했던 건데…… 나는 엄마를 죽이면서 태어났잖아. 그러니까 처음부터 나쁜 사람으로 태어나 버린 거야. 그래서…… 사랑받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해도 나쁜 사람이 되는 운명인 거야.”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그냥 가끔 도로시는 그런 실없는 상상을 해보았다.
카르넌이 그녀를 사랑해 주지 않을 때, 레이가 가진 것을 나는 가질 수 없을 때, 테온이 외면할 때, 백성들이 폭군이라며 손가락질하고 욕할 때.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을 때.

도로테아 밀라네어가 나쁜 사람이 되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문제들이니까, 그렇게 귀결시키면 편하다.
내가 모든 걸 망쳤다고, 사람들이 나를 떠난 것도 나 때문이라고.
나쁜 일은 모두 나쁜 내 탓이라고.

“그래서…… 가끔은 무서워.”

도로테아 밀라네어의 근원에 악밖에 없을까 봐.
그녀는 씨앗부터, 악일까 봐.

“……바보 같아서 웃기지?”

도로시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슈테판은 그녀를 보고 고작 악몽을 꾸고서 심각하게 투정을 부리는 겁쟁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칭얼대는 모습을 보곤 조금 짜증 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괜히 말했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말고 그냥 혼자 생각할걸. 평소처럼.

그때 도로시에게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슈테판은 도로시를 번쩍 들어 안더니 자신의 품에 꽈악 안았다.
그러곤 도로시의 등 절반을 채울 정도의 큰 손으로 그녀의 등을 한 번 토닥, 두드렸다.
그 한 번의 작은 두드림이 그녀의 심장을 쿵 울렸다.
순간 도로시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슈테판의 어깨에 푹 파묻었다.
슈테판의 포옹이 꼭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말 같아서.

“고마워, 슈테판. 그리고 미안해…….”

지난 생에 너를 그렇게 죽여 버려서.
회귀한 후 도로시는 왜 다시 태어났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죽을 때도 ‘내가 왜 죽어야만 하는지’ 완벽하게 납득했었다.
그녀는 도로테아 밀라네어가 나쁘고 악이고 폭군이니까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죽을 수 없다고 발악하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저주를 퍼붓지도 않았다.
심지어 에단이 그의 죄까지 다 뒤집어씌웠을 때도 덤덤했다.
처형장으로 향하는 폭군은 조용히 자신의 목을 단두대에 맡겼다.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어쩌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왜 나는 다시 살게 되었을까? 나처럼 못된 사람이 왜?
이런 기회는 착한 영웅들한테나 줘야 하는 것 아닐까? 예를 들면 슈테판 같은 사람한테 말이야.
도로시는 다시 시작해 버린 이 고통스러운 삶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다시 살게 된 이상 예전처럼 살 수는 없다는 것.
또다시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나 정말 착하게 살고 싶어.”

도로시가 고개를 묻고 웅얼거리자 슈테판이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황녀님, 착한 어린이…….”

슈테판이 도로시의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
그에 도로시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맞아, 나 착한 어린이야.”

* * *
클라라는 도로시를 찾으러 도로시의 방에 올라갔다가, 혼자 우뚝 서 있는 레이를 발견했다.

“레이먼드 전하?”

클라라가 부르니 레이가 손바닥으로 두 눈을 꾹 찍어 누르곤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우셨어요?”

“아니.”

클라라는 ‘우셨군요’라고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도로시 황녀님과 다투셨나요?”

“도로시는 내가 싫은가 봐.”

“예?”

“내가 찾아온 게 재앙이래…….”

조금 진정되나 싶었던 레이는 다시 도로시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지난 몇 년 동안 도로시는 혼자 먼 지방 별궁에서 지냈다.
레이는 당연히 그런 도로시가 심심하고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계시지 않고 아버지는 바쁘고, 레이는 도로시의 유일한 오빠였다.

먼 타지에 홀로 있는 어린 동생이 걱정된 것이 이상한 일일까?
도로시가 제게 의지할 거라고 생각한 건 오만한 착각이었을까?
내가 내려가 주면 반가워해 주겠지. 즐거워해 주겠지. 기뻐해 주겠지.
선물은 뭘 가져갈까? 뭘 주면 좋아할까? 세리티안 지역엔 없는 제도의 물건이 뭐더라?

별궁엔 바다가 있으니 도로시랑 같이 바다에서 놀아야지.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별궁 구경도 시켜달라고 해야지.
에피스테메 방학하기 전부터 고대하며 편지에 꾹꾹 눌러쓴 진심들.
그 모든 것이 도로시에게 재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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