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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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온을 만나는 건 분명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기쁜 일이었다.
그의 손길 하나, 눈빛 하나에 도로시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선연히 깨닫곤 했다.
그러니까 불편하다고 할 수 없다.
불편하다고 하면 테온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떠나 버릴 테니까.
테온이 건네는 작은 기회조차 제 발로 차버리는 게 되어버릴 테니까.
도로시는 선택해야 했다.

“불편한 건 아니야…….”

결국, 도로시의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도로테아 밀라네어는 테온 프리드를 저버리는 법을 모른다.
그에 테온이 조금 마음이 놓인다는 듯 다정한 눈빛으로 도로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저를 볼 때마다 늘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거죠?”

테온이 도로시의 눈과 코와 입술, 뺨을 한눈에 담으며 물었다.
그런 표정?
도로시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절대 예쁜 표정은 아닐 거라는 점이었다.
도로시는 제 표정을 평범의 범주 안으로 넣으려고 애썼다.

“저는…… 황녀님과 잘 지내보고 싶어요.”

테온은 살짝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춰왔다.
그는 용서를 구하듯 말했다. 자신을 미워하지는 말라는 듯이.
그 한마디에 견고하게 쌓았던 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잘 지내고 싶다.

그 말을 나는 네게 수백 번 했었어, 테온.
회귀 전, 나를 외면하는 네 등에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을.

가슴이 지끈거려 도로시는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착한 미소나 친절함, 상냥함 같은 건 생각할 겨를도 없어.
저렇게 보석같이 예쁜 눈으로 나를 동정하며 다정함을 구하는 네게 나는…….

“황녀님.”

그때 테온과 도로시 사이로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뺨이 너무 아파서 그러는데 약이 있을까요? 손가락도…….”

뺨이 빨갛게 부은 에단의 얼굴이 해를 집어삼킨 달처럼 테온을 정확하게 가렸다.

“응?”

그제야 거대한 파도에 떠밀리듯 붕 떴던 마음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맞아, 에단을 데려왔었지.
레이와 테온 때문에 너무 놀라 에단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응……! 약, 그래. 다쳤으니까.”

도로시는 테온을 회피하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온을 더 마주하고 있다가는 지끈거리는 가슴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해, 테온. 에단이 다쳐서 약 발라줘야 해. 내가 데리고 온 손님인데 깜빡했어.”

도로시는 테온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부산스럽게 말했다.
테온의 말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 도로시는 에단을 데리고 허겁지겁 약을 보관해 둔 의무실로 향했다.
멍청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그가 내게 잘 지내보고 싶다고 했는데, 이렇게 허겁지겁 도망쳐 나오는 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익숙하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도로시는 에단과 의무실에 들어와 문까지 닫아버렸다.

“황녀님……?”

“참, 널 데려왔는데 다른 손님이 와서 신경을 못 써줬네. 오자마자 약을 찾아봤어야 했는데.”

도로시는 서둘러 에단을 의무실 한쪽에 앉혀놓곤 선반을 뒤적거리며 횡설수설했다.
그녀의 손은 애꿎은 서랍을 열었다 닫고, 찬장의 상자들을 들었다 놓고, 물건들을 이리저리 들추며 수선을 떨었다.

“어어, 약이 어디 있더라? 이쯤에 있을 텐데.”

에단은 의자에 앉은 채 조용히 도로시를 지켜보았다.
약을 찾아보던 도로시는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선반에 있던 물건을 와르르 쏟아버렸다.

“앗! 이런……!”

도로시는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보고 간신히 한숨을 삼켰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되는 게 없지?

도로시는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정리하려고 쪼그려 앉아 물건을 주웠다.
그러자 에단이 조용히 다가와 물건을 줍는 것을 도와주었다.

“고, 고마워.”

도로시는 어쩐지 에단을 볼 수가 없었다.
지금 표정이 또 엉망일 것만 같아서.
오늘따라 모든 게 마음처럼 되질 않는다.
아침에 받은 카르넌의 편지부터, 검술 대회 신청도 그렇고, 갑자기 찾아온 레이도…… 온통 엉망이야.
도로시는 정리한 물건을 선반에 올려두며 애써 마음을 억눌렀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마음을 에단 앞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도로시는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휴, 나 혼자는 못 찾겠다. 아무래도 약이 어디 있는지 클라라한테 물어봐야겠어.”

도로시가 어색하게 웃으며 걸음을 떼자 에단이 그녀를 붙잡았다.

“약 필요 없어요. 그냥 뺨 좀 부은 건데요.”

“하지만 분명 약 발라달라고…….”

“괜찮아요.”

에단이 빨갛게 부은 뺨으로 빙그레 웃었다.

“그보다 약이 필요한 건 황녀님 아니신가요?”

“내가? 내가 왜?”

“그냥…… 좀 아파 보여요.”

웃음기가 가신 에단의 눈이 조용하게 가늘어졌다.
순간 회귀 전의 에단이 떠올라서 도로시는 에단의 손을 툭 떼어냈다.

“나 안 아파.”

“아닌데, 어디…… 열이 나나?”

에단의 손이 다가오더니 도로시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가까운 거리, 에단에게서 달콤한 꽃향기 같은 것이 훅 끼쳐왔다.
좁은 의무실에 에단의 향기가 가득 찬 것 같았다.

“나 정말 안 아파!”

도로시는 성급히 고개를 저으며 에단의 손을 떼어내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에단이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렸다.

“……황녀님이 왜 요양을 왔는지 알 것 같아.”

에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다시금 도로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에단의 노란 눈은 테온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회귀 전에도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누구보다 먼저 그녀가 원하는 걸 대령하던 놈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진짜 몸이 안 좋아서 온 거야.”

“그런 게 뭔데요? 방금까지는 안 아프다고 하셨잖아요?”

도로시는 에단에게 말려든 기분이 들었다.
에단은 순수함을 가장한 얼굴로 도로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 나쁜 놈이야, 넌.

“이제 공작가로 돌아가.”

도로시는 에단을 밀어냈다.
그의 장난질에 놀아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자 에단이 도로시의 흐트러진 옆머리를 정리해 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낫게 해줄까요? 그 병?”

교활해 보일 정도로 예쁜 눈웃음이 도로시에게 흘러들어 왔다.
간사한 뱀이 시간의 열매를 삼킨 것처럼, 순간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 황녀님 좋아해요.”

에단이 바람처럼 작게 속삭였다.
그 말이 위선인지 아닌지 눈을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도로시는 도저히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아니, 눈을 맞추지 않아도 알아. 이건 거짓말이란 걸.

“장난은 그만둬. 난 이런 장난 싫어해.”

도로시는 에단을 다시 꾸욱 밀어냈다.

“……그래요? 웃으실 줄 알았는데 재미없었나요?”

에단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하나도 재미없어.”

“이런 장난에도 웃지 않다니 많이 아프신가 봐요, 정말.”

에단의 말이 짓궂게 느껴져서 도로시는 그를 찌릿 노려보았다.

“안 아프면 이만 나가.”

“황녀님은요?”

“난 여기 좀 더 있을 거야.”

“안 아프시다면서.”

“나가.”

도로시가 두 손에 무게를 실어 에단을 밀어 의무실 밖으로 내쫓았다.

“공작가에 가고 싶으면 클라라한테 얘기해. 마차 준비해 줄 거야.”

도로시는 에단을 완전히 복도로 내쫓은 뒤 문까지 쾅 닫았다.
에단은 자기 앞에 냉정하게 닫힌 문을 보았다. 방금까지 은근한 장난기가 비치던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상해.”

에단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때 그의 시선을 부르듯 인영이 스쳤다.
복도 끝에 서 있는 붉은 눈의 소년.

‘아, 저 애.’

에단은 그를 발견하곤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중하고도 다정한 웃음을 띤 인사였지만 테온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넌 누구지?”

“저는 브론테 공작가의 에단 브론테라고 해요. 브론테는 이 일대 영지를 다스리는 가문이죠.”

에단은 순진한 얼굴로 밝게 인사했다.

“약…… 발랐어?”

“그럼요. 도로테아 황녀님이 직접 발라주셔서 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그런데…… 저만 제 소개를 하는 거였나요? 저는 도련님이 누군지 모르는데.”

에단의 말은 부드러우면서도 뼈가 있어서 테온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테온 프리드.”

테온이 짧게 답했다.

‘그래, 대단한 프리드 대공가의 자제님.’

에단은 냉소적으로 그의 출신을 되뇌었다.
황실과 쌍벽을 이루는 대공가. 전설에 등장하는 밀라네어와 프리드.
먼 조상부터 밀라네어와 가까워 미칠 지경이군.
새카만 머리카락이 어쩐지 어둠의 정령을 다룬다는 프리드가와 지독하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우와, 프리드 대공가라니 정말 대단하네요.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영광이에요.”

에단은 가식적으로 손뼉을 두어 번 치며 말했다.
하지만 테온은 에단을 무시하고 도로시가 있을 의무실로 다가갔다.
테온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노크하려 하자 에단이 그의 손을 가볍게 붙잡으며 막았다.

“황녀님이 오늘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혼자서 조용히 쉬고 싶다고 하시네요.”

에단이 빙그레 자신의 상처를 가리켜 보이며 ‘보시다시피 아픈 저도 의무실에서 쫓겨났고’라고 덧붙였다.
그에 테온이 굳은 표정으로 에단을 보았다.
에단은 적개심 어린 테온의 반응에 미소를 던질 뿐이었다.

‘테온 프리드, 아까랑 분위기가 너무 다르잖아.’

도로시한테는 꼬리 만 강아지처럼 자기 잘못을 알려달라고 묻더니 지금은…… 짜증 나.

“오늘 검술 연습도 열심히 하고, 저랑 마을도 돌아다니고…… 피곤하실 만하죠?”

에단이 생긋 웃자 테온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도로시 황녀님과 많이 친한가?”

다물렸던 테온의 입술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열렸다.
에단은 테온의 입술에서 편하게 흘러나오는 도로시의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요. 도로테아 황녀님과 저는 별로 안 친하죠. 보시다시피 다치면 약 발라주는 정도의 사이인걸요.”

에단이 겸손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자 테온의 표정이 움찔했다.

“저는 도련님처럼 ‘도로시’라는 애칭으로 불러드리지도 못하거든요. 그저 가까이 사는 데다 서로 친구도 없으니 가끔 만나는 사이일 뿐이에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도로시를 몇 년 만에 만난 테온의 앞에서, 에단이 머쓱한 미소와 함께 괜히 뺨을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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