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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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은 절 미워하시는걸요. 저는 바깥 자식이니까요.”

그렇구나. 저 얼굴로도 극복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게 있나 보구나.
아버지가 밖에서 데려온 동생이 이렇게나 예쁘고 아름답다면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데 질투할 수도 있겠다.

“저, 괜찮으시다면 조나단 도련님의 화가 풀리기 전까지만 황녀님과 함께 있어도 될까요?”

에단이 도로시의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꼬집었다.
그렁그렁 처연한 빛을 띤 그 눈빛에 도로시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저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데리고 나왔는데 바로 보내는 것도 조금 그렇고…….

“그래, 에단.”

도로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에피스테메 방학으로 조나단이 내려온 걸 보고도 왜 예측하지 못했을까.

“도로도로시!”

찬란하게 빛나는 곱슬거리는 금발, 해사한 미소, 보석보다도 맑게 반짝이는 푸른 눈.

“레이……?”

레이먼드 밀라네어. 그 또한 방학이었다.

“보고 싶었어, 도로시!”

레이는 어느새 훌쩍 커진 키로 도로시에게 달려오더니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뱅글뱅글 돌았다.
도로시의 발이 허공에 붕 떠서 꽃잎처럼 치맛자락을 날렸다.

“도로시는 오빠 안 보고 싶었어?”

“놔.”

보고 싶기는 개뿔.
도로시는 자신을 안은 레이를 환불하고 싶었다. 누가 이 녀석을 데려갈 수는 없는 걸까?

“나는 도로시 너무 보고 싶었는데. 에피스테메에서 탈출해서 도로시 보러 달려오고 싶었단 말이야.”

레이가 뺨에 뽀뽀를 하려고 입술을 내밀자 도로시가 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로막았다.
어디서 더러운 주둥이를 들이밀어.
그때,

“도로시 황녀님.”

도로시를 때리듯 강렬하게 파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도로시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레이가 도로시를 놓았고, 도로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에요.”

레이의 뒤로 그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루비 같은 눈동자는 그녀를 향해 있었다.

“테온……?”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그는 그새 눈에 띄게 키가 컸고 골격도 잡혀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사랑하던 모습과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다행이에요. 절 기억하시는군요.”

테온이 빙그레 웃었고, 도로시의 가슴은 속절없이 떨렸다.
어떻게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 평생 너를 잊은 적이 없는데.

심장이 테온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서, 도로시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심장을 쥐어 뜯어내고 싶었다.
말을 듣지 않고 욱신거리는 가슴을 차라리 없애 버리면 나을 것 같았다.

“……테온이 왜 여기 있어?”

“내가 같이 오자고 했어. 에피스테메 방학했으니까 놀러 가자고.”

레이는 자신의 행동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신이 나서 말했다.
그에 도로시의 입이 앙다물리더니 레이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 별궁으로 들어갔다.

“어어, 도로시 잠깐만!”

레이가 발이 꼬여 깽깽이걸음으로 따라오는데도 도로시는 멈추지 않고 자신의 방까지 성큼성큼 올라갔다.
도로시는 제 방에 던지듯 레이를 집어넣었다.

“도로시.”

레이는 도로시의 거친 행동에 놀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대체 왜 왔어!”

“보고 싶어서.”

“뭐가? 촌구석에 처박혀 사는 내 꼴이?”

“도로시…….”

“테온은 왜 데려왔는데?”

대체 왜?
그냥 잊고 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은데, 흔들리고 싶지 않은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나를 유혹하는 거야?
이러면 내가 도망친 이유가 없잖아!

“테온도 널 알고 있으니까 별궁에 같이 놀러 갔으면 해서. 테온도 좋다고 했고 프리드 대공도 괜찮다고 다녀오라고 했어.”

“나는?”

도로시가 살벌하게 물었다.

“내 의사는? 내 허락은? 내 마음은?”

이곳에서 지내고 있는 도로시의 의사는 없었다.
도로시와 상관없이 레이와 테온과 프리드 대공의 결정이 모든 걸 좌우한다. 이곳에서 지내고 있는 건 그녀인데, 정작 이 공간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아니,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이 아나스타스궁은 황실의 것이니, 도로시가 지내고 있더라도 황태자인 레이가 가고 싶다면 언제든 찾아올 수 있었다.
도로테아 밀라네어의 의사는 전혀 고려할 필요도 없이.

“너도 분명 좋아할 거라고…….”

좋아하다니. 나도 잘 모르겠는 마음을 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알 수 있지?
왜 남의 마음을 자기 좋을 대로 상상하고 단정 짓지?

“넌 왜 늘 마음대로야? 내 입장을 생각도 안 해? 너만 즐겁고 행복하면 다야?”

“나는 그저 도로시를 재밌게 해주고 싶어서 깜짝 선물로…….”

“이건 깜짝 선물이 아니라 재앙이야!”

도로시가 소리치자 레이가 놀라서 굳었다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냥…… 도로시가 별궁에서 혼자 지내니까 외로울까 봐…….”

툭 떨어진 레이의 고개 아래로 눈물방울 하나가 바닥을 적셨다.
울어? 지금 누가 울고 싶은데.
대체 뭘 잘했다고 우는 거야?
레이는 또 이렇게 도로시를 사람 울리는 악인으로 만들고 만다.
다른 사람들 눈엔 분명 도로시가 나쁘게 보이겠지.
대단한 황태자께서 바쁜 시간을 내어 이 먼 별궁까지 행차해 주셨는데 대접하는 게 이 꼬라지니.

“그만 울어.”

“미안해, 도로시…….”

뭐가 미안한 줄은 알고 하는 말일까?
도로시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사과가 어째서 곱게 들리지 않을까? 그의 눈물이 왜 나는 짜증 나기만 하는 걸까?
이젠 심지어 코를 훌쩍이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만 울라고.”

도로시는 그를 위로해 줄 생각은 없었다. 위로해 줄 수도 없었고.

‘빌어먹을.’

도로시는 레이와 더 마주하고 있다간 정말 화를 내고 말 것 같았다.
도로시는 레이를 내버려 두고 돌아서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황녀님.”

“……!”

방을 나오던 도로시는 문 앞에 서 있던 테온과 딱 마주쳤다.
테온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설마 다 들은 걸까?’

도로시의 가슴이 또 철렁 내려앉았다.
어차피 멀어질 사이, 들으면 어떠냐 하고 넘기면 좋을 텐데 그게 되질 않는다.
테온이 내가 화내는 걸 듣지 않았기를.
내가 그를 싫어한다고 오해하지 않기를.
나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지 않기를.
또 헛된 기대를 품고, 그에게 사랑받지 못할까 봐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에게 미움받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미움받을 짓을 하고서도 욕심을 부리는 자신이 싫어져서 도로시는 테온으로부터 도망쳐 후원으로 달려 나갔다.

“도로시 황녀님, 잠깐만요!”

후원에 다다랐을 때 뒤따라온 테온이 그녀를 붙잡았다.
도로시는 테온의 손이 닿은 부분이 불에 덴 듯 뜨겁게 느껴져 화들짝 놀랐다.
그가 잡은 손목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잠깐만 제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테온의 목소리가 가슴속에 뜨겁게 차올랐다.
어린아이 티를 벗은 테온은 소년에서 청년의 성숙함을 향해 가고 있었다.
조금 숨을 쉬기 힘들어서, 도로시는 깊이 숨을 들이켜고 내쉬어야 했다.
원래 이렇게 떨렸나?
나, 이렇게까지 사랑했었나?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의 깊이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깊었다.
분명 괜찮고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별궁에서 지내며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우선, 갑자기 찾아온 건 정말 죄송해요. 미리 사람이라도 보내두었어야 했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테온의 목소리가 종을 울리듯 몸을 전율시켰다.
도로시는 테온이 잡은 손을 빼지도 못한 채 그를 등지고 서 있었다.
손을 빼지 못하는 건, 그가 잡아준 손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손을 잡아주기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바라왔기 때문에.
그러나 마주 보지 못하는 건 사랑받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전하께서 편지로 미리 방학 때 찾아가겠다고 전해두었는데, 날짜를 정확히 밝히지 못한 건 제도에서의 일정이 딱 정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편지. 도로시는 읽지 않은 레이의 편지들을 떠올렸다.
레이는 매우 착하게도 편지에 소식을 전했고, 모든 건 또 편지를 읽지 않은 도로시의 탓이었다.

“물론 갑작스럽게 저까지 함께 와서 기분이 상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황가 사람도 아닌데…….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테온은 정중하고 다정하기도 했다.
그가 사과할 일은 아닌데. 그저 내가 나빠서 이러는 건데.
그 말이 도로시의 입술 끝을 괴롭혔으나 차마 내뱉지 못했다.
테온과 마주친 순간부터 몸과 머리가 따로 놀며 통제를 벗어나 말을 듣지 않는다.

“여기 온 건…… 황녀님을 다시 뵙고 싶어서였어요.”

믿을 수 없는 테온의 말이 도로시의 가슴으로 박혀왔다.
보고 싶었다니? 단 한 번도 도로테아에게 눈길을 주지 않던 그가 어째서?
회귀 전 테온은 도로시와 결혼한 후에도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해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보기 싫다는 듯 도로시를 피했고, 한자리에 서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다.

도로시가 고개를 돌려 테온을 보자 진솔한 눈빛으로 도로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 하나에 도로시는 자신의 가슴을 꾸욱 내리눌렀다.
야속했다. 그땐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 그토록 마주 보고 싶던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를 포기하고 나니 이렇게 쉽게 마주할 수 있다니.
왜 너는 이제야 날 봐주는 걸까?

“많이 걱정됐거든요.”

테온의 붉은 눈동자가 사뭇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걱정이라니……?”

도로시의 물음에 테온이 멋쩍은 쓴웃음을 지었다.

“석류 주스나…… 그 일이요.”

테온은 유괴 사건을 직접 말하는 것이 혹시 도로시를 상처 입힐까 두려워서 돌려 말했다.
한없이 낯설고 다정한, 그의 관심.
아름다운 궁전과 귀한 새와 꽃과 보석으로도 안 되던 게, 평생 애원해도 안 되던 게 동정과 연민으로는 가능한 모양이었다. 비참하게도.

“그래서 제가 전하께 함께 가고 싶다고 먼저 말씀드렸던 거예요.”

“…….”

“혹시 제가 불편하신가요?”

테온이 조심스레 물었다. 도로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불편하지만 불편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양가적인 감정이 도로시의 목을 막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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