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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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합리화하려 애썼다.
프리드가의 도련님이니 테온에게는 저 손수건 말고도 수많은 손수건이 있을 것이다.
특별하게 좋은 천을 쓴 것도 아니고 공들여 수놓은 손수건도 아니니까 테온은 없어졌는지조차 모를지도.

“몸이 아직도 안 좋으시긴 한가 봐요. 머리맡에 저렇게 고이 손수건을 두고 주무시는 걸 보면.”

“어? 으응. 밤에 기침할 때가 있어서.”

아, 또 거짓말이 추가됐다.
착하게 사는 건 정말 어렵구나.

“이런……. 어서 나으셔야 할 텐데.”

에단은 눈꼬리를 내리며 나를 걱정했다.

“그럼 제가 다음번엔 손수건을 선물해 드릴게요. 저, 황녀님께 손수건은 선물할 수 있는 사이가 될까요?”

에단이 허락을 구하는 눈을 반짝였다.

“응……. 그래.”

아까 펜던트를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 * *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올라오는데 오늘따라 별궁 사람들이 다소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황녀님, 황궁으로 올라가시면 어떨까요?”

“뭐? 벌써?”

이제 이 생활에 익숙해져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데 또 그 황궁으로 올라가라고?
나는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은 요양 생활을 청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곳 아나스타스궁에 내려올 때부터 나는 최소 몇 년은 이곳에서, 길게는 평생을 살 생각으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클라라를 비롯한 하인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 근처에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돌고 있다네요.”

“전염병?”

“독감인데 무척 심각한가 봐요. 성 밖에는 더러운 사람이 많이 다니니까 금세 병이 퍼진 모양이에요. 폐렴까지 가서 죽는 사람들도 벌써 많대요.”

“못 고친대?”

“고칠 순 있지만 전염병이니까요.”

고칠 수 있는 병이라고 해도 전염병은 쉽게 잡기 어려웠다.
가난하고 더러운 사람들을 일일이 관리할 수도 없고, 그 사람들이 비싼 약을 사서 치료를 받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위험한 동네 근처에 황녀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일부러 건강을 위해 요양까지 왔는데 전염병을 얻는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별궁 사람들은 나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고 싶은 모양이었다.
클라라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별궁을 떠나고 싶지 않은데.
그럼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고치면 되잖아.”

“예?”

“전염병을 고치자고. 치료법은 있다며.”

“하지만 병에 걸린 사람 대부분은 치료할 돈을 갖고 있지 않아요.”

클라라는 내 말이 어린아이의 단순한 결론이라고 생각했는지 차근차근 그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돈은 내가 있잖아.”

“네?”

“약이랑 치료할 인력에 대한 거 내가 대주면 되잖아.”

“그, 그치만.”

클라라는 물론이고 옆에 서 있던 슈테판도 입을 벌렸다.
할 말이 있어 보이지만 말은 하지 않는 그 얼굴.

“나 황녀인데 그 정도 돈도 못 쓰는 거야?”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딱히 어디에 돈을 쓰거나 하지 않는 탓에 매년, 매달 나를 위해 배정된 예산이 남아돌고 있다는 사실을.

쓸데도 없는데 이 김에 시원하게 돈 좀 뿌려보지, 뭐.
나의 버킷 리스트 세 번째 항목을 떠올렸다.

[셋째, 사람 백만 명 살리기.]

백만 명은 몹시 많은 수였으므로 버킷 리스트의 실천을 위해선 이런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없다.
이 외에도 앞으로 벌어지는 전쟁이라든가 자연재해에서 활약하지 않으면 내 버킷 리스트 실천은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착한 마음은 좀 모자라도 돈은 많으니까.’

돈이 많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었다.
선량 지수를 이렇게 간편하게 채울 수 있으니까.
* * *
돈의 힘은 생각보다 더 위대했다.
전염병은 보름도 채 되지 않아서 싹이 마르듯 사라졌다.
중간에 약을 만들 허브가 부족해서 멀리서 가져와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황녀의 이름과 돈은 그걸 다 해결해 주었다.

“황녀님 덕분이에요!”

클라라는 나의 선행을 아낌없이 칭찬했다.
하지만 나는 선행을 하고도 딱히 기쁘지 않았다.
안 쓰고 남아도는 돈, 없어져도 내 삶에 지장 하나 없는 금액이 지출되었을 뿐.

‘이게 착한 일인지 모르겠어.’

그냥 남아도는 돈 쓰면 착한 건가?
게다가 나는 전염병이 잡혔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내 돈으로 살아난 사람의 얼굴을 보거나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딱히 실감이 나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아이 씨X, 나는 봐야겠다니까!”

“못 들어간다고!”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 가운데에는 무척 천박한 단어들이 섞여 들렸다.

“아악! 안 놔, 이 새끼야?”

“이 새끼? 이게 어디서 욕을 씨부려!”

그 소리가 귓구멍에 콱콱 틀어박히는 탓에 나는 창밖을 내다볼 수밖에 없었다.
별궁 정원 입구 쪽에서 별궁의 하인과 꾀죄죄한 꼬마 하나가 싸우고 있었다.
꼬마는 하인에게 들린 채 밖에 내쫓겼지만 이내 물소처럼 돌진하여 다시 별궁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저게 무슨 소란이람!”

클라라는 평화로운 별궁에서 벌어지는 망측하고 천박한 일에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 봐.”

내 말에 클라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와중에도 상스러운 된소리가 귀에 쿡쿡 박혀 들어왔다.
슈테판이 나를 보고 조용히 창문을 가리켰다.

“아니야, 창문 닫아도 들릴 소리인걸.”

나는 흥미롭게 밖을 내다보았다.
입구에 도착한 클라라가 뭐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꼬마가 두 사람 사이를 뚫고 별궁 정원으로 달려 들어왔다.

‘근성 하나는 끝내주네.’

하지만 모든 일이 근성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꼬마는 다시금 다른 하인들에게 붙들렸다.
결국 하인 하나가 주체되지 않는 난동을 부리는 꼬마를 때리고 말았다.
퍽, 하고 작은 몸뚱어리가 나동그라졌다.

“이런…….”

그러나 꼬마는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소리쳤다.

“나는 황녀님을 봐야겠다니까!”

듬성듬성 들렸던 입구에서의 말소리와 달리 정원 한가운데서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또렷이 내게 전해져 왔다.

‘나를 찾아온 거였나?’

대체 왜?
아무리 보아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나는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놔, 이 자식들아! 놓으라니까!?”

“놔줘요.”

“화, 황녀님!”

내 말에 꼬마를 거칠게 다루던 하인들이 멈추었다.
나는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정원으로 나아갔다.

“자, 진짜 황녀님?”

꼬마는 나를 보고 놀라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 꼬마는 행색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말이 거칠고 예의도 없는 게 분명 길거리에서 굴러먹던 녀석인 것 같은데.

“그래. 내가 황녀야.”

내 대답에 꼬마는 멍하게 나를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얼마나 정신을 팔아먹은 건지 나를 보며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무슨 용건이지?”

나는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에게 물었다.
그러자 꼬마가 번뜩 정신을 차렸는지 몸을 비틀어 내 명령에 멈춰 있는 하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고, 내게 그대로 돌진했다.
풀썩!

“…….”

나에게 직진하던 꼬마는 내 앞을 막아낸 슈테판의 다리에 퍽 맞고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슈테판은 무뚝뚝한 얼굴로 꼬마를 내려다보았다.
슈테판이 늘 내 뒤에 묵묵히 서 있어서 깜빡했는데, 그는 뛰어난 기사였고 이런 가벼운 위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꼬마는 커다란 슈테판을 보고 겁에 질렸다.
슈테판이 그렇게 순한 인상은 아니긴 하지.

“비, 비켜, 이 거대한 곰탱아!”

“…….”

나는 꼬마의 반응에 놀랐다.
슈테판을 보고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니, 겁을 모르는 녀석인가?

‘저런 바보는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나는 한숨을 한 번 푹 쉬고 입을 열었다.

“거기서 말해도 다 들려.”

“썩을, 난 황녀님한테 이걸 주려고 왔다고!”

거친 추임새와 함께 꼬마는 등에 메고 있던 작은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게 뭐지?”

“내가 뼈 빠지게 일해서 받은 감자야!”

“…….”

나는 순간 할 말이 없어서 슈테판에 빙의한 것처럼 입을 다문 채 꼬마를 쳐다보기만 했다.

감자? 그게 뭐 어쩌라고?

“젠장, 황녀님이 약을 보내준 거 아니야?”

고상한 귀족의 언어를 배운 적 없는지, 꼬마의 말은 하나하나 거칠고 무례했다.
황녀에게 저렇게 천박한 말투라니. 황실 모독죄 무서운 줄 모르나?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았다.

“큼큼.”

나는 귀에 계속 거슬리는 그 욕설에 경고하듯 나직이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내 기대가 너무 컸다.
이런 예의 바른 경고를 꼬마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이거 받아!”

꼬마는 황녀 앞에서 어떻게 예의를 갖춰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꼬마의 무례와 방종을 꼬치꼬치 집어내기엔 너무 유치하고 피곤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게 뭔데?”

“약, 약값이야!”

나의 시큰둥한 반문에 꼬마가 당황한 듯 답했다.
약값…… 이라.
내가 슈테판을 올려다보자 슈테판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꼬마가 내려놓은 자루를 열어보았다.
자루 안에는 씨알이 무척 작은 감자 스무 개 정도가 들어 있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상하거나 싹이 나 있었다.

옆에 있던 하인들은 먹지도 못할 감자의 상태를 보고 혀를 찼다.
정상적인 감자를 찾아보기 힘든 자루.
얼핏 보면 날 골탕 먹이려고 준비한 게 아닌가 싶었다.

“황녀님께 이걸 먹으라고 가져온 거냐?”

하인들은 화를 냈다.

“그럼 감자를 먹지! 입을래?”

나이도 어린 게 제 부모뻘 되는 사람들한테 거침이 없다.
하인들은 당장 꼬마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걸 내 앞이라 꾹 참고 있었다.
다들 주먹 펴. 저런 멍청함에는 화내면 지는 거야.
배우지 못해서 저러는 사람한테 흥분해 봤자 통하지도 않을 거.
나는 화를 내는 대신 슈테판과 눈을 맞췄다.
슈테판은 이 엉망인 감자를 어떻게 할 건지 묻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도로 가져가.”

상태 나쁜 감자를 쓸데도 없거니와 저런 꾀죄죄한 애의 물건까지 뜯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꼬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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