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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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저물어가는 눈을 간신히 붙들며 도로테아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눈이 흐려 정확히 보이진 않지만, 그의 딸이란 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임종 때 도로테아가 곁에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보러 오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로테아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마음이 놓이는 건, 조금이라도 기대했다는 뜻이겠지.
카르넌은 도로테아에게 조금 더 곁에 오라고 눈짓했다.
그의 눈짓이 큰 것도 아니었는데, 도로테아는 그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곁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비쩍 마른 몸은 기형적으로 부어 있었고, 눈은 이미 죽은 자의 것처럼 빛을 잃었으며, 붉은 생기가 돌던 흰 피부도 거무죽죽했다.
그의 내쉬는 거친 숨결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났다.
도로테아는 병상에 누워 있는 카르넌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그가 죽도록 미웠는데 왜 이러는 걸까?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일까?
아니면, 내가 한때는 당신의 사랑을 간절히 구걸했기 때문일까?
함락 불가능한 성벽처럼 느껴지던 당신이 무너진 게 허무한 걸까?
정확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도로테아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슬픔 속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카르넌은 그런 도로테아의 눈과 코와 입을 눈에 차례로 담았다.
카르넌은 자신의 딸을 이렇게 가까이서 유심히 바라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아름답고 현명하게 자랐구나.”

그는 앨리스를 닮은 딸의 얼굴을 눈에 새기며 말했다.
눈이 맑을 때 더 보아둘걸.
카르넌은 후회했다.
병으로 눈이 흐려지고 머리가 둔해진 후에야, 어렴풋한 그녀의 윤곽을 눈에 담는다.
더 유심히 바라보고 싶고, 기억하고 싶다.
기억할 시간조차 남지 않았는데.

“네겐…… 나의 빈자리가 보이지 않아. 그래서…… 다행이다.”

가래가 끓는 거친 숨 사이로 그가 안도의 숨을 뱉었다.
그에 도로테아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의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무책임했다.
그녀는 평생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발버둥 쳤다.
그가 한 번이라도 웃어주길 바라며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었다.
카르넌 밀라네어한테…… 인정받고 싶었다.
그가 남긴 공허한 구멍은 평생 채울 수가 없는데, 빈자리가 없다니.
그 비겁한 태도가 너무 억울해서 도로테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카르넌이 힘겹게 손을 뻗어 도로테아의 손을 감싸 잡았다.
단단하고 컸던 그의 손은 이제 힘을 잃어 떨고 있었다.
그녀를 잡는 힘은 아기보다 더 약하게만 느껴졌다.

“……미안하다, 도로테아.”

희미하게 말을 내뱉는 카르넌의 입가에 자조 어린 쓴웃음이 걸렸다.
죽음을 앞두고 온 감각이 둔해지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기억들은 선명해졌다.

그리고 선명해지는 기억을 따라 후회도 깊어졌다.
병상에 누워 홀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 그는 외로움을 느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사람들을 곁에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죽음 앞에 지독히 쓸쓸했다.
황제임에도, 온 세상이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 같은 고독감.
그는 그제야 자신이 도로테아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는 약하고 어린 딸아이를 아주 오랫동안 방치했다.

그 속에서 그의 딸이 느꼈을 외로움과 소외감이 얼마나 깊었을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실로 나쁜 아버지였다.
그는 자식들에게 밀라네어의 피를 물려준 것만으로도 아비로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착각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가 본 적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의 하루가 어땠는지 다정하게 묻거나, 고민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는 도로테아를 물건 다루듯, 필요할 때만 불러 쓰고 필요하지 않으면 내버려 두었다.
저승에 가서 앨리스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녀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선물을 얼마나 냉대했는지 알면 얼마나 원망할까?

“……정말 미안해.”

카르넌의 후회에 도로테아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인제 와서 미안하다고?’

끝까지 이기적이다.
이런 손으로 붙잡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해버리면 대체 어떻게 원망하란 말인가.
도로테아는 평생 그를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회귀하고 많은 이와 새로이 관계를 쌓았지만, 카르넌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서야 미안하다니.

화내고 소리치고 원망하고 용서할 시간도 주지 않고 도망가다니.
결국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카르넌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카르넌은 쓰디쓴 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딸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을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져 있었다.
한때 황제라고 불렸던 그는 이제 죽어가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저 딸의 원망 앞에 미안하다, 미안하다 되뇌는 것밖에 할 수 없는 한낱 인간.
권위도 명예도 모두 스러진 그에게 남는 건 그의 인색한 삶을 증명하는 도로테아의 눈물뿐이었다.
한심한 카르넌 밀라네어. 대단한 척 으스대며 살더니 죽음을 앞두고서야 그걸 깨닫나.

“……너는…… 훌륭한…… 딸이자, 황녀였다.”

카르넌은 자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리고 도로테아를 잡았던 그의 손은 힘을 잃고 묵직하게 흘러내렸다.

“폐하!”

레이먼드가 카르넌을 붙잡으며 불렀다.
카르넌은 퀭했던 눈은 이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감겨 있었다.
도로테아는 입을 꾹 다문 채 그 곁을 지켰다.
테온이 불러내었던 어둠의 정령들은 이내 자신들이 할 일이 더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나며 사라졌다.
의사가 카르넌의 상태를 확인했고, 고개를 저었다.

곧, 거칠고 가쁘게 들리던 카르넌의 숨소리는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 * *
황궁과 람파스의 거리엔 검은 깃발이 걸렸다.
황제의 장례식에 군대를 이끌고 올라오는 황녀는 없었다.
다만 황녀는 황제의 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었다.

레이먼드는 꽤 오랫동안 울었다.

황태자가 체통을 지켜야 한다는 로버트의 만류에도 그는 그랬다.
어쩌면 레이먼드는 진정으로 카르넌을 사랑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도로테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침묵을 지켰을 뿐이다.
도로테아는 여전히 카르넌을 미워하고 원망했다.
하지만 예전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 * *
황제의 장례를 알리는 검은 깃발이 내려간 날.
카르넌 밀라네어의 유언장 공개일이자 새 황제의 즉위일.

“나 황태자 레이먼드 밀라네어는 선황 폐하의 유언에 따라 황태자로서의 계승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며, 황녀 도로테아 밀라네어를 정당한 황위 계승자로 인정한다.”

황태자 레이먼드 밀라네어는 선언했다.
거대한 홀에 모여 있던 우베라의 인사들이 술렁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를 외치는 이는 없었다.
카르넌의 유언이 그러했으며, 또한 당사자인 레이먼드 밀라네어가 그에 순순히 따랐기 때문에.

“앞으로는 유일하고 정당한 우베라의 황제, 도로테아 밀라네어를 섬길 것이며, 그 앞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

그의 당당하고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레이먼드는 지금까지 보여왔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가장 황태자다운 당당함을 갖추고 있었다.
레이먼드는 자신의 앞에 선 도로테아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국 만물의 생명수, 태초의 계약자, 정령의 이행자. 우베라의 어머니이자 모든 어둠을 걷어내는 빛. 도로테아 밀라네어 황제 폐하께 무궁한 광명을.”

레이먼드가 이마 높이로 들어 올린 두 손.
그의 손 위엔 황제의 왕관과 셉터가 놓여 있었다.
도로테아는 잠시 멈칫하며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그녀를 근엄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은 아직 그녀의 즉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눈빛들이 조금 두려워질 찰나, 그 가운데 서 있는 에단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에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곳에 자리를 지키고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군중 가운데 홀로 빛나고 있는 그는 존재만으로도 그녀에게 힘이 되었다.
도로테아는 용기를 내어 레이먼드의 손에 들린 셉터를 집어 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엔 황제의 왕관이 씌워졌다.

“새 황제 폐하께 무궁한 광명을!”

거대한 홀을 채우는 찬사와 함께 빛의 정령이 홀을 밝혔다.
어느새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눈부신 광경 속에 시큰거리는 눈가를 감추려고 주먹에 힘을 꽉 쥐었다.
그녀의 생, 두 번째 황제 즉위.
하지만 이번엔 왕관을 처음으로 머리에 썼을 때의 절망감은 없었다.

대신 왕관은 그녀에게 황제가 짊어질 책임의 무게를 속삭였다.
핏물 가득한 방을 채운 어둠도 없었다.

이 거대한 홀은 빛으로 가득했다.
멀리서 죽음을 알려오는 비명이 들려오지도 않았다.
다만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박수와 환호가 울려 퍼졌다.
그녀를 원망하는 테온의 눈빛도 없었다.

오직 그녀를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에단이 있었다.
그리하여 도로테아는 생각했다.
이번 생에는 폭군이 아닌 성군이라 불리고 싶다고.
* * *
황제의 죽음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던 우베라는 곧 새 황제의 즉위로 빛이 들었다.
황제의 장례 동안 금지되었던 음악 연주와 파티, 술과 사치품 거래가 허락되었다.

사람들은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며 노래를 불렀고 축제를 벌였다.
즉위식이 끝난 뒤, 도로테아는 황제의 방으로 향했다.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가 차례로 걸려 있었다.
그 끝에, 카르넌 밀라네어의 초상화도 걸려 있었다.
그녀는 카르넌으로부터 역대 황제의 초상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초대 밀라네어의 초상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한 진열대를 마주했다.
즉위식에 사용했던 왕관과 셉터는 원래 보관하던 진열장에 들어가 있었다.
도로테아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방이었다.
그녀가 레이먼드를 죽이고 황제가 되어, 왕관과 셉터를 찬탈한 장소가.
하지만 지금의 이곳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밖에서는 전쟁의 함성 대신 즐거운 축제의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부드러운 노을이 내려앉아 그녀를 비췄다.

“폐하.”

그녀를 깨우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분명 회귀 전에 숱하게 들었는데 어째서인지 이젠 그 호칭이 새롭게 느껴진다.
도로테아는 낯선 호칭에 다소 어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에단이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에단.”

도로테아의 입가에도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왕관과 셉터에서 등을 돌려 에단에게 달려가 안겼다.
길고 하얀 황제의 예복이 기분 좋게 바스락거렸다.

“옷이 구겨지겠어요.”

“괜찮아.”

도로테아가 배시시 웃자 에단은 결국 힘을 주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전부 네 덕분이야, 에단.”

“폐하께서 일군 결과예요.”

에단이 달콤하게 속삭이자 도로테아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날 사랑해 주지 않았다면 난 처형대에서 폭군으로 죽었을 거야.”

그때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반성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이런 행복이 있는지도 모르고.
꿈을 꿀 줄도 몰랐겠지.

“널 실망시키지 않을래.”

네가 준 기회가 헛되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볼래.
도로테아의 결연한 눈빛에 에단은 미소를 띠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저야말로 감사해요.”

저의 사랑이 잘못되지 않게 해주셔서.
당신께 내가 힘이 될 수 있게 허락해 주셔서.
에단이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고, 도로테아는 참지 못하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파고드는 그녀의 온기에 에단은 기꺼이 자신의 온기 또한 나눠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생각했다.
당신을 위해서라도 나는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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