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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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이라고요? 그럼 바람 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갈까요?”

에단이 내 몸이 안 좋은 것을 걱정하는 듯 말했다.
이게 이 녀석의 무기다. 잘생긴 외모에 다정함까지 가장하는 것.
누가 감히 이런 에단 브론테를 싫어할 수 있을까?

“아니야. 오히려 너무 안에만 있었더니 답답했거든.”

“많이 마르셨어요.”

그는 내 가느다란 손목을 보고 말했다.
유괴 사건 이후로 여러 가지가 겹쳐 살과 근육이 쭉 빠진 탓에 내 손등엔 뼈와 핏줄이 보였다.
에단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 늘 그랬듯이.

“이젠 괜찮아져서 요즘은 다시 살찌고 있어. 이곳 생활이 마음에 들거든.”

“그렇군요, 비록 작은 정원이지만 이곳도 황녀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황녀님이 좀 더 빨리 건강해지실 수 있도록.”

에단이 생긋이 웃으며 다정하게 나를 챙겼다.
에단을 오래 봐왔는데도 그가 진심으로 다정하게 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마음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벌써부터 그렇게 간사하게 굴겠어? 저렇게 순수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에단이 지금까지 저질렀던 짓을 돌이켜 보면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나는 에단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에단이 고개를 갸웃하며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아, 알겠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응.”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어디에요?”

에단이 놀라며 아직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동그란 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가식을 떨며 거짓말을 할 때 나오는 에단의 무의식적인 습관.
가만히 바라보면서 몰아세우면 눈썹을 한 번 움찔하는 것.
보통은 잘생긴 에단의 눈을 똑바로 오랫동안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데다 움찔거림은 아주 미묘해 그 습관을 알아챈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 또한 그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 후 그를 관찰하다가 파악한 것이므로 그 습관을 아는 건 나밖에 없을 것이다.

‘나중에는 그 습관까지도 고치는 바람에 이놈이 내게 좋은 말을 해도 가식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질 않았었지.’

다행히도 지금의 어린 에단은 거짓말에 덜 능숙한지 반응이 더 뚜렷했다.
하지만 내가 그걸 알고 있다고 말할 순 없는 법.

“잘생김이 묻었네.”

나는 조금은 시큰둥하고 상투적인 농담으로 얼버무렸다.

그 순간 에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어? 예? 아니요. 그게…….”

에단의 시선이 나로부터 허공으로 흩어지며 말을 더듬었다.

‘어라? 자기가 잘생긴 건 이미 잘 아는 거 아니었어?’

그냥 툭 던진 말에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이야.
내가 아는 에단은 딱 네 가지 상황에서만 얼굴이 빨개졌다.
붉은 조명 아래 섰을 때,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 열이 날 때, 그리고 얼굴을 붉혀야만 자신에게 유리할 때.
예전의 에단 같았으면 잘생겼다는 말에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뻔뻔하게 ‘과찬이십니다. 폐하의 아름다움에 비할 바가 되겠습니까?’ 하며 넘어갔으리라.
그런 그가 수줍음이라니.
나는 빨개진 에단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럴수록 에단은 눈을 둘 곳을 모르며 방황했다.

‘어린 에단은 이런 느낌이었구나.’

나는 에단을 조금 더 놀리고 싶어졌다.

“잘생겼다거나 귀엽다는 말 많이 듣지 않았어?”

“아니요, 전혀…….”

에단이 터질 것같이 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매일 아침 ‘오늘도 잘생긴 아침!’ 하고 인사할 것 같은 얼굴이면서.

“황녀님이야말로 제가 만난 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우신걸요.”

“아…….”

역시, 에단 브론테다.
달콤한 말을 속삭여 사람을 꾀어내는 뱀.

‘진심…… 일까?’

아름답다는 말은 회귀 전에 사람들로부터 질리도록 들었다.
테온이 내 옆으로 와주지 않았으므로, 내 옆엔 재상 에단이 서 있는 일이 잦았고, 사람들은 우리를 두고 온갖 외모 찬양을 해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녀라고.
나와 에단이 얼굴로 세상을 제패하고 황제와 재상 자리에 오른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나아가 몇몇 사람은 나와 에단이 하늘이 내린 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그 말을 한 사람의 목은 내가 베어버렸지만.
그러나 이제 와서는 그 칭찬들이 진짜였는지, 날 눈멀게 하려는 간신의 속삭임이었는지 헷갈렸다.

“고마워. 칭찬해 줘서.”

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흘려들으면 그만인 말이었다.
에단처럼 어리숙하게 얼굴 붉히는 일은 없다.
에단은 나의 미소를 바라보다가 나를 따라 미소했다.

바람이 부는 정원은 그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살랑살랑 흔들리게 했다.

“웃으니까 더 예쁘세요……. 아, 잠시만요.”

에단은 나를 보다가 내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나의 뺨을 쓸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눈을 감자 에단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이 붙어 있어서요.”

살그머니 눈을 뜨자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 정말 너무 예쁘다, 에단.
내가 멍하니 그를 감상하자 에단이 먼저 눈을 돌리며 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사실 황녀님이 와주셔서 기뻐요. 저는 친구가 없거든요.”

“왜?”

“형님이 제가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하셔서요.”

형님이라면 아까 에피스테메에 갔다던 조나단을 말하는 것이리라.
조나단 입장에선 아마 밖에서 굴러온 돌이 아니꼽게 보이겠지.
게다가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이 얼굴도 반반해서 사람들이 좋아해 줄 테니.
어렴풋이 조나단이 에단을 대놓고 싫어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설령 나간다고 해도 좋은 얘기 듣지도 못하고…… 아차!”

그는 잘못 말이 나온 듯 제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좋지 않은 얘기라면 그의 출신에 대한 것일 터.
나는 못 들은 척 눈을 돌렸다. 그의 좋지 않은 상황은 모르는 척해주는 게 제일이었다.
바다에서 울던 일도 있고…… 방금의 말실수라면 에단의 고의적인 실수일 확률도 있으니까.

그는 이따금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전시해서 사람들의 동정 어린 호감을 사곤 했다.
지난번 엉엉 울던 에단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를 완전히 신뢰하기엔 지금까지 내가 알아온 에단이 있었다.

“아, 아무튼 그래서 황녀님이 절 찾아와 주셔서 기뻐요.”

에단이 수줍게 말을 마치곤 배시시 웃었다.
해사하고 말간 웃음이 진심 같아서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여우 같은 놈. 이래서 위험한 건데. 예전에도 이런 사탕발림에 홀딱 넘어갔더랬지.

“……나중에 시간 되면 아나스타스궁으로 놀러 와.”

나는 넌지시 말을 흘렸다.
또래 아이들의 방문을 한사코 거절해 온 나였지만, 에단은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친구가 되어주면 에단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삶을 살지 않을까?

“정말 그래도 될까요?”

“그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단이 진심으로 기쁜 듯 활짝 웃더니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뽀뽀라니?
에단에게 뽀뽀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지난 생엔 에단을 만났을 때 이미 난 테온과 약혼한 사이였고 클 만큼 커서 이런 걸 할 나이는 아니었으니까.

더구나 에단은 이렇게 입술을 함부로 놀릴 만큼 헤픈 놈이 아니었다.
그는 제 입술의 고귀함과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멍한 눈을 끔뻑이며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싱글거렸다.

“고마워요, 황녀님.”

에단의 말에 나는 버킷 리스트에 적었던 ‘일주일에 세 번 고맙다는 말 듣기’를 떠올렸다.

‘오늘 에단한테만 고맙다는 말을 계속 들은 것 같은데 이것도 쳐야 하나……?’

에단의 고맙다는 말은 진심이 아닐 확률이 있으므로 나는 에단의 말을 버킷리스트 실천에 치지 않았다.
* * *

“슈테판 기사님!”

별궁 생활이 제법 흐른 어느 날, 클라라는 용기를 내어 슈테판을 불렀다.
그러자 커다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천장에 닿을 듯 큰 키에 광활해 보이는 어깨와 등, 옷 아래로도 비치는 근육은 언제 보아도 위압적이었다.
더욱이 슈테판은 말수도 별로 없으니 말을 걸 때마다 긴장이 되었다.
클라라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입을 떼었다.

“어, 얼마 후면 황녀님 생신인데 저희라도 뭘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

평소처럼 대답이 없자 클라라는 괜히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슈테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실 거란 거죠?”

클라라가 활짝 웃으며 재확인하자 슈테판이 다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사실 황녀님 선물로 뭘 준비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거든요. 황녀님이 워낙 뭘 드려도 반응이 없으셔서.”

“…….”

“기사님도 황녀님이랑 지내보셨잖아요. 혹시 황녀님이 좋아하실 만한 선물이 뭐 없을까요?”

“…….”

클라라는 한참 동안 슈테판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의 입술은 풀을 바른 것처럼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선물은 지금까지 뭘 드려도 좋아하지 않았고 그나마 책 읽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긴 한데…….”

클라라의 말에 슈테판이 고개를 다시 끄덕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황녀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책이 있어요. 사자 용사가 나오는 이야기책인데……!”

클라라는 도로시가 자주 보는 책을 떠올렸다.
모든 동물에게 무시당하는 사자 용사가 고난과 역경을 넘어 가장 용감하고 존경받는 사자 왕이 된다는 내용의 이야기책이었다.
사실 그것은 도로시가 천문학이나 고대 수사학 등 어려운 책을 읽을 때마다 어린이 수준을 연기하려고 가짜 커버를 씌운 것이었지만 클라라는 그걸 알지 못했다.

“그럼 선물 말고 깜짝 이벤트를 해드리는 건 어떨까요?”

“……?”

“그러니까…….”

클라라가 슈테판에게 손을 까딱이며 손짓했다.
슈테판이 눈만 끔뻑이며 서 있자 클라라가 그의 옷을 잡아당겨 허리를 숙이게 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올린 원대한 계획을 귓가에 속삭였다.

“어때요?”

계획 공유를 끝낸 클라라가 흥분한 눈으로 슈테판을 보았다.

“…….”

슈테판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아니라는 듯이.

“황녀님…… 아홉 살이고……”

“레이먼드 황태자 전하는 열 살 때도 그런 걸 무척 좋아하셨대요! 황녀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언제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법이었고, 슈테판의 목소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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