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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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레우스와 하르크 군은 불길과 적으로 둘러싸였다.

“후퇴! 후퇴하라!”

네레우스는 허겁지겁 병사들 틈으로 몸을 숨기며 불타는 하르크의 진지로 돌아갔다.
물의 정령을 다루는 그는 적어도 자신이 지나갈 만큼의 불은 진화할 수 있었다.
하르크 왕이 줄행랑을 치자 우베라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네레우스는 등이 뜨거울 정도로 열렬한 함성을 뒤로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달음박질쳤다.
도로테아가 그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빌어먹을 에단 브론테……!”

네레우스는 검을 꽉 쥐며 이를 갈았다.
에단 브론테가 하르크로 넘어온 후, 그는 에단에게 많은 것을 제공했다.
그를 하르크에 충성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풍족한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백 명의 하인이 있는 커다란 저택엔 언제든 악기를 연습할 수 있는 연습실이 세 개나 딸려 있었고, 아름다운 수상 정원도 있었다.

먹고, 입고, 자는 것만이 아니라 장인이 만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아낌없이 사주기까지 했다.
그를 내쫓은 우베라의 황제보다 훨씬 더 큰 은혜를 베풀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배신해?
그때 그는 멀리서 백마를 타고 달리는 에단 브론테를 발견했다.
그의 뛰어난 외모는 피아가 뒤섞여 뒹구는 전장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다.

에단은 하르크의 진지에서 나와 우베라 군이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로테아도 하르크 진영에서 빠져나오는 에단을 발견했다.
에단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황녀님, 하고 그녀를 부르는 듯한 순간.
푹, 고삐를 잡고 있던 그의 팔에 화살이 꽂혔다.

“에단!”

도로테아가 비명을 지르듯 그를 불렀고, 고삐를 놓친 그는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네레우스는 진지로 가던 방향을 틀어 에단이 떨어진 쪽으로 달려갔다.

“네레우스……!”

도로테아는 다시 검을 뽑아 들고 네레우스의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항복해, 도로테아.”

네레우스의 그녀보다 한 발 더 빨랐다.
네레우스의 칼날이 에단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에단은 팔에 화살이 꽂힌 채 고통스러워하며 네레우스에게 붙들렸다.
그러자 네레우스를 향하던 도로테아의 검이 멈췄다.
그 모습을 본 네레우스는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진짜로 이 반반한 서자 새끼를 사랑했어?

“우베라 군에 명해라. 항복한다고.”

네레우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도로테아에게 말했다.

“황녀님…….”

에단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하얀 목덜미에서 붉은 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여기서 항복하면 겨우 역전한 전세가 다시 뒤집힌다.
후일을 노리기도 어렵다.
수적으로 우세한 하르크가 이 기회를 틈타 총공을 가하면 지금의 우베라군은 버틸 힘이 없다.
도로테아는 검 자루를 꽉 쥐며 네레우스를 노려보았다.

“궁지에 몰린 생쥐의 협박이 먹혀들 것 같아?”

“일단 대단하신 황녀님께서 검을 내리셨는걸? 혹시 내가 이놈 얼굴과 재능이 아까워서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네레우스가 이죽거리며 에단에 목에 검을 더 바짝 가져다 댔다.
하르크의 진지에 불을 지른 배신자의 목은 언제든지 딸 수 있다.
네레우스는 흔들리는 도로테아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리고 에단도 도로테아의 흔들림을 보았다.
기쁘면서도 슬픈 일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그를 생각해 준다는 건.

그리고 그가 이토록 무력하다는 건.
그녀는 다른 타개책을 열심히 궁구했지만, 당장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에단은 자신이 해야 할 선택이 무엇인지 알았다.
어쩌면 오랫동안 그가 생각했던 끝.
결심이 어린 에단의 눈동자를 본 순간, 도로테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에단의 시선은 그녀의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정령왕과의 계약 매개가 되는 정령석을.
그 순간 도로테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직감했다.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에단은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듯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눈을 감았다.

“안 돼……!”

도로테아의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칼날이 에단의 목을 그었다.
붉은 피가 흐르고 에단의 몸이 그대로 기울었다.
그 모든 과정이 시간을 느리게 되돌린 것처럼 천천히 이루어졌다.
아름다운 사내의 몸은 진창이 되어버린 전장의 흙바닥 위로 떨어졌다.
네레우스에겐 더 이상 인질이 없었고, 도로테아는 더 이상 착하게 사는 법을 고민하지 않았다.

* * *
그는 꿈을 꾸었다.

언젠가 그와 그녀가 함께 침대에 누워 편지를 읽던 날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이불은 포근했고, 향초가 은은하게 타고 있었고, 잠이 오는 무화과와 따뜻한 우유가 놓여 있었다.
어디선가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이 들려왔고, 도로테아는 팔베개를 한 채 그의 품에 기대어 편지를 읽었다.

그녀의 입가엔 편안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깨달음과 동시에 그는 격통을 느꼈다.
온몸을 비틀 듯 조여오는 통증.
그 사이로 흐릿한 음성이 들려왔다.

“……단, 에단…….”

그를 깊은 무의식에서 끌어 올리는 목소리.

“에단……!”

그 목소리를 너무나 듣고 싶어서 귀를 기울이는 순간, 그는 손끝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감촉을 느꼈다.
그 감촉에 그는 무거운 눈을 떴다.

“에단!”

분명 시야는 흐릿하고, 초점조차 어지럽게 흔들리는데, 어째서인지 그녀의 얼굴만은 또렷했다.

“……황녀님.”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통증을 잊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의 품에 따뜻한 그녀가 한껏 안겼다.
에단은 잠시 이것이 꿈의 연장선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어깨를 적시는 뜨거운 눈물이 생경했다.

“분명 다시 만나자고 했으면서……! 정말 죽는 줄 알았잖아……!”

도로테아가 원망을 내뱉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에단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도로테아는…….

“황녀님은, 괜찮으세요……?”

그는 끊기는 숨 사이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전쟁이었다. 네레우스가 그녀와 대치하고 있었다.
도로테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다친 곳은 없는지, 아프진 않은지.
그러자 도로테아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눈물에 젖은 눈가가 붉었지만,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그를 노려보더니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하나도 안 괜찮아.”

그가 붙잡은 도로테아의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다친 곳은 없었다. 승리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에단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그를 왜 원망하는지도.

“죄송해요, 황녀님…….”

그래서 그는 미안하단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만일 그가 레이먼드나 슈테판처럼 무예에 재능이 있었다면 적어도 도로테아에게 짐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자 도로테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기다린 게 아니야, 에단.”

내가 듣고 싶은 다른 말을 해줘.
도로테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 에단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은 아마도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리라.

“보고 싶었어요, 황녀님.”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고백에 눈물에 젖었던 도로테아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나도.”

짧은 대답과 함께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 위로 겹쳐졌다.
* * *
다행히 칼은 그의 중요한 혈관과 신경을 빗겨 갔다.
목덜미에 깊은 상처가 남았지만, 생명은 건진 것이다.
어쩌면, 칼을 쓰는 데는 재능이 없었던 에단이라 죽는 것에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 참 다행히도.
그리고 도로테아는 한편으로, 정령이 그를 보호해 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생명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빛의 정령이니 계약자가 쉽게 죽도록 두진 않을지도.

“황녀님이 네레우스를 단칼에 끝내버리셨지.”

조이는 침대에 기대어 있는 에단에게 그날의 일을 열심히 설명했다.
도로테아가 네레우스를 완전히 제압했고, 하르크 진영에서는 일제히 항복을 알리는 하얀 깃발이 올라왔다.

“그런데 너 때문에 승리를 만끽하지도 못했다니까!”

한참 신나게 도로테아의 영웅담을 이야기하던 조이가 화를 냈다.
에단의 위독함 때문에 도로테아는 승전에도 패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 때문에 조이는 이기고도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다른 병사들은 신나서 노래 부르고 술 퍼마시고 하는데 황녀님은 식사도 안 하시고.”

투덜거리는 조이에 에단은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그때, 잠시 이야기를 나누러 나갔던 도로테아가 다시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요, 황녀님?”

“내일 람파스로 올라갈 거야.”

“그럼……!”

조이가 고개를 홱 돌려 에단을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에단 브론테의 공을 인정하여 람파스 출입 금지령을 풀어주겠다고 하셨어.”

그렇게 말하는 도로테아는 기뻐서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함께 람파스로 돌아갈 수 있다.

“같이 돌아가자, 에단.”

* * *

“도합 오만의 병사로 오십만의 하르크군을 물리쳤대!”

승전보가 전해지자 람파스의 분위기도 한껏 달아올랐다.
세리티안의 병사 이만, 프리디아의 원군 일만, 제국군의 선봉대 일만.

“게다가 도로테아 황녀님이 빛의 정령을 부려 사방으로 흩어진 전군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셨대.”

“그 모습을 보고 하르크 병사들이 오줌을 지렸다나?”

레이먼드는 창밖에서 조잘조잘 들려오는 하인들의 대화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하르크에의 승전은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세간의 화제였다.
바가지 하나 들고 구걸하러 다니는 거지들도 도로테아의 이름을 알 정도였으니까.
이 전투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할 것이다.
레이먼드의 걱정이 무색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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