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7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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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티안의 밤은 불길로 밝았다.
밤을 맞아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지만 세리티안을 지키는 병사들의 신음은 깊었다.

“슈테판 경,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야간 경비를 서는 도중, 부상자를 확인하던 파울이 물었다.
하르크 군의 수는 그들의 십수 배로 압도적이었다.
사전에 전쟁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그들의 무기는 우베라의 병사들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지금 우베라가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슈테판이 조금이나마 준비 태세를 갖췄다는 점, 그리고 공성전의 수비를 맡고 있기에 버티기에 유리하다는 점이 다였다.

성 밖에 있는 마을에서 치솟는 불길은 슈테판에게 분노와 자괴감을 느끼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악착같이 세리티안의 성을 지켰다.
이곳이 함락되면 우베라의 전선은 크게 후퇴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려올 때 하나라도 더 데리고 내려오는 거였는데……!”

람파스에서 이곳으로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전쟁이 이렇게 가까울 거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슈테판은 한탄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으려 애썼다.

“다들 잘하고 있어. 훌륭해.”

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도, 지금만큼은 자신이 평생 할 말을 다 끌어모아 병사들의 힘이 되어주어야 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버티고 있으니, 잘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불안했던 것과 달리 병사들은 끈기 있게 잘 버텨주었다.
아마 자신들의 마을을,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겠지.

“조나단 브론테 공은 어딨지……?”

슈테판은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지나치며 파울에게 물었다.

“아까 성내의 식량 배분 계획을 봐야겠다며 공작가로 가던데요.”

파울의 보고에 슈테판은 말에 올라 세리티안 중앙에 있는 브론테 공작가로 향했다.
성 밖에 있던 백성들도 모두 성안으로 피신한 상황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건 성내에 식량과 식수, 땔나무, 화살 등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건 전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다.

“조나단 공은 어딨지?”

브론테 공작가에 다다른 슈테판은 급히 조나단을 찾았다.
집사는 응접실에서 조나단과 근방의 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며 그를 안내했다.

공작가의 널따란 응접실, 긴 테이블엔 던컨 백작을 비롯한 근방의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슈테판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흥분된 목소리가 테이블 위를 난무하고 있었다.

“금광이 함락되게 생겼다고요! 그 가치가 얼마나 되는데……!”

“지금 저 밖에 있는 건 선봉에 불과합니다. 보고에 의하면 뒤이어 올 하르크 군의 수가 무려 오십만이랍니다. 그런데 저희는 농부들에게 갈퀴를 쥐여줘도 고작 이만에 불과한 수인데……. 제국군이 내려오려면 한참이고…….”

“일단 챙길 수 있는 대로 챙겨봅시다. 광산이든, 저택이든 살고 봐야지요.”

슈테판은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귀를 비트는 듯한 소리에 미간을 구겼다.
자원 확보와 배분을 논하려고 모인 게 아니었나? 저기 밖에서 싸우는 병사들과 두려움에 떨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우는 백성들은?

“이미 여긴 끝이에요. 일단 포기하고 후퇴해야 합니다. 우리론 저 수를 이길 수 없어요.”

“……차라리 항복은 어떨까요? 그게 평화적이고 안정적이지 않겠습니까? 광산도 그럼 그대로 지킬 수가 있고…….”

그들은 슈테판이 온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목덜미를 지키기 바빴다.
쾅!
결국 슈테판이 검집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저택이 무너지는 듯 거대한 소리가 나며 하얀 대리석이 얼음장 깨지듯 갈라졌다.
놀란 귀족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항복도, 후퇴도 없습니다.”

슈테판의 낮은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렸다.
수적 열세에도 잘 버티고 있는데 벌써부터 도망갈 생각을 하는 그들을 보니 속이 끓었다.
전략을 구상하고 최대한 국경을 수비해 낼 궁리를 해도 모자랄 판에, 항복과 후퇴라니.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을 생각하면 절대로 저런 생각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래전, 선대의 브론테는 전쟁 영웅으로 이 영지를 얻어 오랜 명예와 긍지를 지켜왔지만, 이제는 그 피가 흐려진 모양이다.

“슈테판 경,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게. 오십만과 이만이야.”

“우리에겐 성이 있고 지원군도 도착할 겁니다.”

“지원군! 프리디아에서? 보내줘 봤자 얼마나 보내겠나!”

전쟁이 일어날 줄 모르고 대충 보내주는 보강 인력이다. 백 명만 보내줘도 감지덕지하겠지만, 그래봤자 뭐가 바뀌겠는가!
백 명의 희생자가 더 늘어나는 꼴밖에 더 될까!
뒤늦게 증원하여 보내더라도 그 증원군이 오는 동안 이미 이곳은 함락되고 말 것이다.

“하르크에서 공성 무기를 가지고 오고 있네. 며칠 내로 도착할 테고, 관문이 뚫리면 어차피 다 죽게 되어 있어. 열어주느냐, 뚫리느냐의 문제일세.”

“……항복이나 후퇴를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귀족들에 말에 슈테판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도로테아가 다른 귀족들의 반대에도 그를 여기로 보낸 건 국경을 반드시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적당한 열세라면 당연히 항전했을 거네. 끝까지 이 악물고 버텼을 거야. 이 땅을 잃으면 누가 가장 큰 손해겠나? 우리가 아닌가! 우리라고 멍청해서 이러는 줄 아나!”

던컨 백작이 슈테판의 고집에 화를 내며 말했다.
자신들도 이 땅을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며, 이곳에 그들의 어마어마한 재산과 기반, 명예, 권력이 전부 있다.
이 땅이 하르크에게 넘어가면 가장 잃을 게 많은 건 그들이다.
그러니 가능성만 있다면 그들도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버틸 것이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지 않은가?”

그들은 숫자 놀음에 기가 막히게 밝은 ‘배운 자’들이었다.
그들은 이만 명의 군대가 오십만의 군대를 이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물론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어마어마한 승전 기록들도 있긴 있지. 하지만 그건 환경과 요소와 때가 잘 맞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승전 기록 한두 개 때문에, 패배한 수백 수천의 가르침을 잊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저들의 공격은 아직 소극적입니다.”

공성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벽을 타고 오를 사다리를 대거나, 나무 탑을 쌓지도 않았다.
척후병의 보고로는 땅굴을 파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압도적인 병력을 자랑하며 항복하라고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흰 깃발을 꽂을 수는 없다.

“게다가 하르크의 육군은 우베라에 비해 강하지 않습니다. 저들 대부분이 수군이었을 겁니다.”

“네레우스는 즉위 후에 육군을 키우기 위한 훈련을 꾸준히 해왔네. 예전의 하르크 군이라고 방심해선 안 돼.”

“도로테아 황녀님의 편지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무의미한 희생을 줄이는 게 우리가 선택해야 할 답이라네, 슈테판 경. 결사 항쟁은 무식한 단어야.”

무식? 그럼 저기 성벽 위에서 가슴 졸이며 적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는 병사들은? 다쳐가며 싸우고 버틴 병사들은 무식해서 저곳에 나가 있나?
슈테판은 칼자루도 부러뜨릴 듯한 힘으로 주먹을 쥐었다.

“지금 항복하면, 이다음 성도 버티지 못합니다.”

“그건 그들을 할 일이네. 준비할 시간이 있으니 그래도 우리보단 낫겠지.”

“그럼 다들 도망가십시오. 제가 병사들과 이곳을 지킬 테니.”

슈테판은 화를 참지 못하고 거칠게 문을 닫으며 응접실을 나섰다.
그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건 처음이라 모두가 입을 떡 벌린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 * *

“슈테판 그린월이 세리티안에 있을 거란 게 사실이군.”

네레우스는 횃불 아래 지도를 비춰 보며 말했다.
슈테판과 이야기해 본 적은 없지만, 네레우스는 그에 대한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광휘의 기사단의 부단장인 그는 단장과 견줄 만한 실력자다.
게다가 기사단 내에서 신뢰와 지지를 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한 덕분에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 상당히 많아졌다고도 했다.

그가 왜 이 타이밍에 변경에 와 있는진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네레우스는 그의 존재에 당황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이곳은 전하가 진짜 노리는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 네레우스의 곁에서 부드러운 미성이 들려왔다.
그에 네레우스의 시선이 옮겨갔다.
그의 눈이 닿은 곳은, 아름다운 사내의 금빛 눈동자.

“그래, 네 말이 맞지.”

네레우스는 에단 브론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약 두 달 전, 람파스에서 쫓겨난 에단이 향한 곳은 리버사우스였다.
세리티안이 하르크와 육로로 인접해 있다면, 리버사우스는 좁은 해협을 두고 하르크와 닿아 있다.
리버사우스는 군사적으로는 하르크와 경계를 맞대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하르크와 교역이 잦아 친하르크적인 성향을 띤다.

리버사우스의 항구에는 저택보다도 커다란 배가 정박해 있었고, 굵은 밧줄과 그물이 쌓여 있었으며, 짐꾼들은 이국의 물건들을 싣고 내리느라 바빴다.
선술집에는 낮부터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에단이 썩 좋아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그가 이곳에 온 데엔 이유가 있다.

그는 항구에 정박한 배 중 거대한 한 척의 선박을 주시했다. 옆면에 하르크 왕실의 문장을 새긴 배였다.
그는 가느다란 눈으로 날짜를 셈해 보다가 고개를 들어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새하얀 저택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영주인 드미트리 후작의 저택이었다.
얼마 전 람파스에서 영지로 돌아간다고 했으니, 분명 이곳에 머무르고 있으리라.
그는 후작의 저택으로 마차를 돌렸다.
* * *

“에단 브론테?”

후작은 집사로부터 예상치 못한 손님의 이름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듣자 하니 황명으로 람파스에서 쫓겨났답니다.”

집사가 드미트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호라…….’

황녀 옆에 찰싹 붙어 있더니, 결국엔 버림받고 말았군.
드미트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드미트리의 눈동자가 맞은편에 앉은 손님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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