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7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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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선 괜찮으십니까?”

도로테아가 먼저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테온이 물었다.

“……아니, 황태자 전하께서 폐하의 직무를 대신할 거야. 그러니 테온, 너는 이제부터 전하를 도와야 해.”

“황제 폐하의 병환은…….”

“종양. 의사의 말론 치료가 불가능하대.”

“…….”

“이 일이 하르크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 네레우스도 이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 할 거야.”

도로테아는 서둘러 세리티안으로 기사와 병력을 보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도로테아가 방안을 짜면 레이먼드가 허락해 줄 것이다.

“황녀님.”

그때, 테온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도로테아가 돌아보자 테온은 잠시 망설이던 입술을 떼었다.

“황제 폐하의 병환에 제가 조금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프리드의 힘이요.”

테온이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그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프리드의 힘으로 종양을 치료하는 건 어둠의 정령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정령사여야만…….”

그때 테온의 손끝에서 검은 덩어리가 피어올랐다.
어둠의 정령이었다. 눈이 멀 것처럼 끝없이 새카만 덩어리.
도로테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정령을…… 이제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

도로테아의 말에 테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도로테아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에단 브론테, 그자가 황녀님께 정령의 힘을 드렸더군요.”

테온의 고백에 도로테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에단 브론테가 람파스를 떠나며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에단이……?”

도로테아는 그의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도로테아는 테온이 근래 정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걸 떠올렸다.
그저 레이먼드가 그의 정화를 잘 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비록 미약한 힘이지만 병환의 진행을 늦출 순 있을 것 같습니다.”

테온은 자신의 힘으로 카르넌의 병을 완치할 수는 없음을 안다.
그에게 인간의 삶을 뒤바꿀 만큼 큰 힘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레이먼드가 황위를 이을 준비가 될 때까지, 그리고 하르크와의 전쟁 위협에 대비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의 힘이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고요와 안식’의 성격을 가진 어둠의 정령은 카르넌의 고통도 조금은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레이먼드도 알고 있어?”

“아니요, 아직이요.”

“……네가 괜찮다면, 부탁할게. 레이먼드와도 이야기해 봐.”

그에 테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로테아는 테온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금은 화두를 벗어난, 그러나 참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에단은…… 어때 보였어?”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가려 했는데 그의 이름을 듣고 나니 그의 소식을 듣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매일 밤, 그가 선물해 준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며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는 그를 향한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으니까.
도로테아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테온은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뗐다.

“……황녀님을 많이 위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의 가슴 한구석엔 여전히 도로테아를 향한 감정이 잔잔하게 고여 있었지만, 이제는 안다.
자신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틈이 없다는 걸.

“그는 금방 돌아올 겁니다.”

테온의 위안에 도로테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나도 그렇게 믿어.”

* * *

“슈테판 경.”

황태자의 부름에 슈테판은 절도있게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이름을 대신한 황태자의 명령.

“병력을 이끌고 세리티안의 국경을 살피게.”

슈테판은 열 명 남짓한 기사와 병사들로 정예 별동대를 꾸려 하르크와 인접한 세리티안의 국경을 살피고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황제가 위독해진 이 시기에 많은 병력을 람파스 밖으로 내보낼 순 없는 탓이었다.
다만 테온이 프리디아에 병력 지원을 요청해 국경 수비를 보강할 수 있도록 했다.
레이먼드의 명령을 받은 슈테판은 곧장 세리티안으로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때.

“슈테판.”

조용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도로테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실의 변고로 내내 심각하게 가라앉아 있던 슈테판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도로테아에게 다가갔다.

“조심해서 다녀와.”

도로테아는 슈테판에게 조심스레 작별 인사를 건넸다.
사실 슈테판과 소수 인원만 세리티안으로 내려보내는 게 영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다.
일단 하르크가 마음먹고 침략해 오면 저 인원으로 버티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도로테아의 걱정 어린 낯빛에 슈테판은 그의 검은 눈동자로 도로테아를 안심시키며 허리춤에 있는 세터칼립스를 탁탁 두드렸다.
도로테아는 그의 든든한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거, 가져가.”

도로테아는 한 통의 편지를 건넸다.

“세리티안에 도착하면 열어봐.”

도로테아의 수수께끼 같은 편지에 슈테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치지 말고.”

도로테아의 인사에 슈테판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한 뒤 준비를 위해 자리를 떴다.
도로테아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슈테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저들로 괜찮을까?”

언제 왔는지 레이먼드가 그녀의 뒤에서 슈테판과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지는 못해도 버틸 순 있을 거야.”

도로테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소수이기는 해도 세리티안의 병력도 있고, 성을 지키며 공성전으로만 유도해도 충분하리라.
게다가 어차피 하르크는 성을 함락시키기보다는 산을 넘는 동안 시선을 분산하기 위한 전투를 할 것이다.
지루하고 성과가 미비한 공성전보다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수군을 침투시켜 바로 람파스까지 올라오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 * *

“카르넌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네레우스는 우베라로부터 들어온 보고를 접했다.

“그간 피곤과 과로를 핑계로 숨기고 있었는데, 최근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쓰러진 모양입니다.”

“병명은?”

“종양인 것 같습니다. 밀라네어에겐 흔한 병이지요.”

“……호오.”

네레우스는 머리를 굴리며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넌은 병증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 레이먼드는 기억상실증이라?

그렇다면 우베라의 황실은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로테아 밀라네어가 조금 똑똑하다고 해도 하르크의 기습 공격에는 대처하기 힘들 테지.’

지금까지 병권을 잡아본 적도 없으니 기사와 병사들도 잘 따라주지 않으리라.

“계획을 조금 앞당겨야겠다.”

네레우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훈련장으로 가자.”

“예, 전하!”

걸음을 옮기던 네레우스가 멈추더니 뒤를 따르던 하인을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네레우스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 * *
슈테판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세리티안의 공기를 맡았다.

“슈테판 경! 다시 세리티안으로 오셨군요.”

브론테 공작가의 장남 조나단 브론테가 람파스에서 내려온 그들을 맞이했다.
슈테판은 브론테 공작 부부의 부재에 주위를 살폈다.

“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황제 폐하가 위독하시단 소식을 듣고 급히 람파스로 올라가셨습니다. 내려오시는 길에 엇갈렸나 보군요.”

그 탓에 세리티안과 브론테 가문은 조나단이 이끌고 있었다.
조나단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음에 무척 흥분하고 있었다.
브론테 부부의 부재로 드디어 그는 ‘공작’이라는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세리티안의 국경 경비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전달받지 못하셨습니까?”

슈테판을 따르던 기사 파울이 물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오신 거 아닙니까?”

조나단은 슈테판 일행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에 슈테판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온 열댓 명의 병사가 인상을 구겼다.

“저희만으로 병력 보강을 끝내려고 하셨습니까?”

국경 경비를 대신해 주려고 이 먼 길을 온 게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국경에 경비를 서는 이들을 독려하고 훈련을 지도하고 미흡한 부분을 점검하려고 온 것이다.
그 도중에 필요하다면 함께 경비를 서며 세리티안의 국경 상황을 파악하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황실의 기사와 병사들을 경비대로 쓰겠다고?

“세리티안엔 병사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넓은 땅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도 모자라거든요.”

“국경의 성주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참다못한 슈테판의 입이 열렸다.
국경을 지켜야 하는데, 병사가 그리 많지 않다니.
세리티안은 아름다운 모래 해변과 인접하여 귀족들의 휴양지로 많이 쓰인다.
그 때문에 브론테 가문은 병력을 증진하는 것보다는 세리티안을 방문하는 여러 귀족과 어울리는 데 더 집중해 온 것이다.
도로테아가 어린 시절, 이곳 별궁에 머물 때도 그런 분위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건 짐작했지만…….

“저희는 하르크와 군사적인 적대 관계보다는 외교를 이용한 친교 관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조나단의 말에 슈테판의 뒤에 있던 어느 병사의 입에서 ‘돌겠군!’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조나단 또한 미간을 구기며 슈테판의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말해도 세리티안 병사의 수는 다른 성들에 비해 두 배는 많습니다.”

조나단은 자존심이 상한 듯 불평했다.

“병사들을 유지하는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아십니까?”

브론테 가문의 영지에서 나오는 세수는 무척 높은 편에 속했지만, 군을 유지하느라 빠지는 지출 때문에 브론테가는 그만큼의 부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병역자 대상 훈련은 얼마나 자주하고 있습니까?”

“일 년에…… 두 번 정도?”

조나단의 목소리가 모호했다.
슈테판은 보통 저런 목소리로 대답할 경우, 그 대답의 수치의 절반 이하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일 년에 딱 한 번 정도 훈련을 할까 말까 하다는 것이다.
농민들을 불러 모아 훈련을 시키는 건 돈도 들고 농민들도 귀찮아하며, 병사들에게도 번거로운 일.
오랜 평화가 만든 안일함에 슈테판은 이를 꽉 깨물었다.

“흠흠, 일단 먼 길을 오셨으니 오늘은 여독을 푸시고 내일 국경의 성곽을 둘러…….”

“오늘.”

슈테판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당장 확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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