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6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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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테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이 일을 도와줬다고?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구원을, 대가도 바라지 않고?
테온의 웃음에 에단의 관자놀이가 씰룩였다.

“어둠의 정령 문제가 네 인생 전부를 건 것이었던 만큼, 내겐 황녀님이 그런 존재시니까.”

에단은 테온의 웃음을 가차 없이 잘라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 대답에 테온은 또 한 번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에단 브론테. 어지간히 미친놈’
그는 생각했다.
그가 가진 도로테아를 향한 마음이 단순한 ‘호감’ 따위로 치부될 만큼 에단 브론테는 도로테아에게 미쳐 있었다.
테온은 자신이 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 또한 도로테아의 반려 자리를 꿈꿨으나, 저자에 비하면 그의 사랑은 소꿉놀이에 불과했다.
테온의 수긍을 읽었는지, 에단은 그를 한번 훑어보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테온은 람파스 출입이 금지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단은 뒷모습만 보인 채 답했다.

“폐하께서 내리신 돈을 쓰러 갈까 한다.”

* * *

“하르크가 전쟁을 벌일 거라고요?”

대신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도로테아의 발언에 눈살을 찌푸렸다.
도로테아는 대신들 앞에서 하르크의 동태와 선박 구매에 관해 설명했다.
하르크가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으며 국경에 병력 배치가 두 배로 늘었고 배와 전쟁에 필요한 사슬, 말 따위를 사들였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에 동의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르크와 우베라의 관계는 돈독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을 벌일 리 없잖습니까?”

그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며 혀를 찼다.

“하르크에 호의적인 몇몇 귀족과 돈독한 것이겠지요. 최근 직?간접적으로 불만을 표하고 몇 해 전부터는 매년 보내오던 공물도 보내지 않잖습니까?”

“그야, 저희 쪽 식량 생산량이 몇 년 새 늘어, 하르크와 밀 거래가 뜸해지니 생긴 불만 아닙니까? 게다가 관세도 올렸고요.”

“드미트리 후작께선 하르크의 편을 드시는군요.”

도로테아는 드미트리를 응시했다.
그는 하르크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줄곧 하르크의 대변인이 되어 말하고 있었다.

“하르크를 편드는 게 아니라…….”

“하르크에 대량의 선박을 판매하셨다고요.”

“결코 군용은 아닙니다. 작은 돛에 의존하는 데다 노를 저어 움직여야 하니까요. 크기도 크지 않고요. 늘 있던 거래였습니다.”

“배의 측면이 높고 밖을 볼 수 있는 구멍이 있는 모양이라더군요.”

도로테아가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일반적인 배의 모양과 확실히 달랐다.

“바람을 막고 싶다고 하르크 측에서 그렇게 주문했습니다.”

“바람만이 아니라 적군의 침입과 공격도 막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얼토당토않은 트집을 잡으시는군요!”

드미트리는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 도로테아에게 한마디 했다.
그러자 카르넌이 도로테아를 보며 그만두라는 듯 눈짓했다.

그에 도로테아는 입을 다물었다.

“하르크는 레이먼드 황태자 전하께서 낙마 사고를 겪으셨을 때도 위로의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몇 가지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요.”

대신들은 수비적이었다.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손해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곧 병력과 군량을 위해 그들이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
또한 지금까지 이어오던 좋은 거래나 일상이 불편하게 전환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가진 안정적인 환경을 두고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몇 가지 징조가 보임에도 배부른 대신들의 무사안일주의는 그들의 판단력을 흐렸다.
그 덕분에, 회귀 전의 도로테아가 좀 더 쉽게 반역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거겠지.

“게다가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건강도 좋지 않은 때에, 전쟁이라니……. 황녀님께서야 말로 전쟁을 원하시는 거 아닙니까?”

“뭐라고요……?”

“이제 막 황녀님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시지 않았습니까? 전쟁을 치르면 그 힘이 완전히 황녀님 손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드미트리가 도로테아의 속셈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레이먼드가 나섰다.

“드미트리 후작. 말조심하세요.”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최근 황녀님께서 황태자 전하의 일을 처리하는 등 월권을 계속하고 계시는 듯하여…….”

“월권이 아니라 내 몸이 좋지 않아 직접 부탁한 일입니다.”

표정이 차갑게 굳은 레이먼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이제 거동도 가능하신데 왜 아직도 황녀님께서 전하의 일을 돌보고 계시는지 의문입니다.”

“그건…….”

기억상실증 때문에, 일을 처리하기엔 능력이 부족해서.
하지만 카르넌은 그 사실을 비밀로 하도록 했다.

“드미트리 후작, 무의미한 논의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게.”

그제야 인상을 구긴 채 이마를 괴고 있던 카르넌이 입을 열어 대화를 정리했다.
* * *
회의가 끝난 후, 바쁜 몸인 대신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황녀님.”

“괜찮아, 이럴 거라고 예상했어…….”

도로테아와 함께 모든 자료를 검토한 테온은 그녀의 주장이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위험성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지출을 감수하고서라도 대비할 필요가 있음에도 동의했다.
말을 잃고 나서 마구간 문을 잠그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도로시!”

그때 회의장을 나서려는 도로테아를 레이먼드가 붙잡았다.

“그러니까 네가 걱정하는 일 말이야, 하르크. 네가 조사한 게 맞았다면 황실의 기사단 일부를 세리티안 쪽으로 보내 경계를 강화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기사단을?”

“전부는 안 되겠지만 소수 정예로는 보낼 수 있을 거야. 믿을 만한 사람으로.”

“프리디아에서도 지원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먼드가 낙담한 도로테아의 등을 두들겼고, 테온도 프리드 가문의 후계자로서 하르크에의 대비를 도울 것을 약속했다.
도로테아는 자신을 신뢰해 주는 두 사람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문득 회귀 전에 마주했던 그들의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난 너희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걸까? 이렇게나 좋은 사람인 너희에게.

“고마워. 정말이야…….”

도로테아는 주먹을 꼭 말아쥔 채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그녀의 주장을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무시하지도, 정치적 속셈이 있는지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의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뭐가 고마워! 우베라를 위한 일인데 당연한 결정이야.”

레이먼드가 웃으며 별것을 다 고마워한다고 웃었다.
그때.

“폐하!”

멀리 복도 끝에서 큰 소리가 메아리쳤다.
세 사람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카르넌을 따르던 로버트와 다른 시종들이 쓰러진 카르넌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서 의사를 불러오게!”

로버트의 명령에 뒤따르던 하인이 재빨리 달려 나갔다.
도로테아는 쓰러진 카르넌을 보았다.
의학적 지식이 깊진 않은 그녀의 눈에도 그의 얼굴 위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비단 그녀만이 아니라 레이먼드와 테온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레이먼드의 푸른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카르넌의 건강 상태는 지금까지 레이먼드에게도 도로테아에게도 정확히 알려진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먼드는 지나가는 감기나 치료 가능한 수준의 병이라고만 생각했다.
다만, 도로테아는 회귀 전의 기억으로 알고 있었을 뿐.
하인들이 급히 카르넌을 업어 침실로 올라갔고, 그들 또한 그 뒤를 따랐다.
* * *

“당분간 폐하께서 직무에 임하기 어려우시니, 황태자 전하께서 대신하셔야 합니다.”

로버트는 카르넌이 의사의 진료를 받는 사이 레이먼드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그러자 레이먼드는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위독한 그의 아버지와 지나치게 빨리 눈앞으로 다가온 자신의 미래를.

‘폐하께서 언제부터 이렇게 편찮으셨지?’

일찍 알았더라면 이런 식으로 지내진 않았을 텐데.
레이의 입술이 초조하게 떨렸다.

“전하, 마음을 단단히 먹으셔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머지않아 황제가 되실 테니까요.”

로버트는 혼란스러워하는 레이먼드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 레이의 손끝이 움찔했다.

“저, 저는 기억이 없어요.”

레이먼드는 로버트가 붙잡은 손을 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레이먼드는 카르넌이 언젠가 자신에게 공부를 독촉하던 때의 강인한 모습으로 일어설 거라고 믿었다.
그래야만 한다.
그는 아직 자신의 아버지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카르넌은 엄격하고 무섭고, 여전히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일생을 함께한 아버지다.

카르넌과 도로테아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며,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자,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레이먼드는 카르넌의 존재에 늘 기대어 살아왔다.
자신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카르넌이 있으니 그 뒤에 숨을 수 있었고, 그가 실수를 하든 잘못을 하든 우베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도 카르넌이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했으며, 한편으로는 그의 자리를 물려받을 용기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유능한 신하들이 전하를 도울 겁니다. 차근차근 배워가시면 됩니다.”

“폐하께서 쾌차하실 거예요. 분명…….”

“전하…….”

“도로시, 네가 해.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레이먼드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도로테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도로테아가 단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먼드 전하.”

“제발, 도로시. 전하라고 부르지 마.”

“회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전하는 우베라의 황태자이십니다.”

레이먼드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가 되어라. 명령을 하라. 우베라를 이끌어라.
레이먼드는 그 시선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리고 그를 가장 단호하게 바라보고 있는 푸른 시선.
도로테아 밀라네어.
그녀는 알까? 자신이 그녀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어떤 짓을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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