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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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에단이 준 선물이거든.”

에단의 이름을 담아내는 그녀의 입술에 미소가 돌았다.

“……에단 브론테가요?”

도로테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브로치, 꽤 오래전부터 봤던 것 같은데…….”

“그러게,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내가 데뷔할 즈음에 선물받았으니까.”

도로테아가 웃으며 빠르게 흐른 시간을 되짚었다.
벌써 몇 년이나 흘렀고, 이제 정령석은 그녀의 몸의 일부가 된 듯 익숙해져 있었다.

‘황녀님의 데뷔……?’

그때, 도로테아가 처음으로 정령을 각성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테온, 정화는 괜찮아?”

마침 도로테아가 정령을 떠올리고는 테온에게 물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그가 오랫동안 힘을 억제하고 있을 때의 분위기가 어떤지 알 수 있다.
정령의 힘을 억제하고 있는 그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리고 모든 행동이 조심스럽고 예민해졌다.
예를 들면 방금 그녀와 손가락을 스치고 황급히 물러선 것처럼.
어둠의 정령 때문에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몸에 밴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황태자 전하를 찾아뵐 예정입니다.”

도로테아의 추측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테온은 벌써 일주일째 레이먼드에게 정화를 부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먼드 대신 도로테아를 보좌하느라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서이기도 했고, 사고 후에 레이먼드에게 정화를 부탁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테온, 나한테 부탁해도 괜찮아.”

“황녀님의 건강도 챙기셔야지요.”

정화는 정령의 힘을 꽤 많이 써야 해서, 정화 후엔 레이먼드도 제법 피곤해했다.
테온이 보기에 도로테아는 최근 과중한 업무로 무리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정화를 부탁하는 건…….

“하하, 나 건강해, 테온. 더는 요양만 하던 황녀가 아니야. 게다가 내가 황태자 전하보다 정령을 더 잘 다루니까.”

도로테아가 웃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혹시 아직도 내가 불편해?”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테온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도와줄게.”

도로테아는 그를 이끌고 응접용 소파로 향했다.
도로테아는 언젠가 테온을 정화해 주고 싶었다.
그녀가 굳이 정화역을 자처하는 건 과거의 일에 대한 속죄의 의미에서였다.
그녀가 죽여버린 그의 삶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서.

그를 정화하는 것은 그녀가 빛의 정령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유의미한 일이었다.

“정화하는 방법은 벌써 예전에 배워뒀는데, 이제야 해보네.”

도로테아는 멋쩍게 웃으며 테온과 마주 앉고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러자 테온의 손끝이 움찔 떠는 게 느껴졌다.

“조금 서툴지도 모르니, 불편하면 말해줘.”

도로테아는 그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빛의 정령을 불러냈다.
메마른 땅에 깨끗한 물이 차오르듯 생명의 힘이 테온을 채웠다.
도로테아의 말대로 그녀가 가진 정령의 힘은 레이먼드의 것보다 훨씬 강했다.
테온은 환한 빛으로 감싸인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만큼 밝게 빛나는 그녀를, 그는 기어코 눈에 담았다.

무겁게 침전해 쌓여가던 죽음의 기운이 서서히 그녀의 힘에 의해 쓸려나간다.
그녀가 그의 삶을 채운다. 천천히, 그리고 가득히.
테온은 마침내 고개를 떨구고 눈부신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감정은 말끔히 정화되지 못했구나.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침잠한 어둠을 걷어내니, 그 밑에 숨어있던 감정이 빛을 받아 또렷이 드러나고 말았다.
레이먼드의 정화를 받을 때와 다르게 그녀와 맞닿은 손이 간질거리고 오감이 저릿하다.
심장이 살아 있음을 일깨우듯 격렬히 두근거렸다.
진정한 생의 감각.
그 감각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다시 그녀에게 정화를 부탁하고 싶어진다.

“테온. 테온……?”

그때 정화를 마친 도로테아가 고개를 떨구고 있는 테온을 불렀다.

“감사합니다, 황녀님.”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오늘 보고는 끝났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테온……!”

그는 자신이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도로테아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녀와 한방에 있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고 말 것 같았다.

그때.

“테온 프리드 님.”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던 그를 부르는 싸늘한 목소리.
테온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걸음을 멈췄다.

“……에단 브론테.”

테온은 그를 응시하는 가느다란 금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마치 그의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를 다 듣고 있는 듯 가만히 그를 노려보는 눈.

“황녀님을 뵙고 가시는 길입니까?”

“그렇습니다.”

테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무언가가 속에서 울컥 치솟았다.

“그러고 보니, 에단 브론테 님은 황녀님을 자주 뵈러 오시는군요.”

저도 모르게 치기 어린 말투가 튀어나왔다.

“보좌관님만 할까요. 저는 일주일 만에 왔는걸요.”

두 사람의 눈싸움에 에단의 뒤에 있던 클라라와 조이가 눈치껏 물러섰다.
테온은 에단을 향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에단은 계단을 가로막고 비켜주지 않는 테온에게 물었다.
테온은 잠시 이를 꽉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황녀님께 선물로 드린 브로치…… 아니. 아닙니다.”

“말을 하려면 끝까지 하셔야죠.”

에단이 미간을 구겼다.
테온 입에서 도로테아가 언급되고 흐지부지 끝나는 게 짜증 났다.

“아니요, 별것 아닙니다. 올라가 보시죠.”

테온은 옆으로 비켜주며 시선을 돌렸다.
* * *
에단은 등 뒤에 선물을 감추고 도로테아가 있는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에 에단은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던 가슴이 나비의 날개처럼 가볍게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바보처럼 방금 테온의 일은 잊어버린 것만 같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에단이 온 것을 모르는 도로테아는 책상 위에 널브러진 활자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 얼굴에 번지는 환한 미소.

“에단……!”

바빠 보이던 도로테아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펜을 내던지다시피 하고 그에게로 달려오더니 와락 안겼다.
도로테아는 에단의 품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가 반가웠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요?”

에단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도로테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보고 싶었어.”

메마른 땅에 샘물이 터지듯 에단을 보자마자 사르르 풀어졌다.

“바쁘신가요?”

“아, 마침 하르크에 관한 보고가 올라왔어.”

“테온 프리드로부터요?”

에단 속에 웅크려 있던 질투가 툭 튀어나왔다.

“아, 테온이랑 마주쳤어?”

“무슨 일 있었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에단은 속에서 끓는 질투심을 삭이며 물었다.

“테온의 정령을 정화해 줬어. 일주일째 정화를 못 받았다고 해서.”

도로테아의 말에 에단이 테온을 떠올렸다.
도로테아가 오랜만에 정령석을 사용하는 게 느껴지더라니, 그를 위한 것이었나?

“……혹시 내가 테온을 정화해 주는 게 싫어?”

도로테아가 그의 손을 꼭 붙잡으며 물었다.

“알아요. 황녀님께 마음의 빚이 있다는 걸. 그리고 저 또한 그에게 죄가 있다는 걸. 하지만 역시 좋다고는 못 하겠어요.”

에단이 도로테아와 이마를 맞대며 속삭였다.
테온을 살리는 건 도로테아의 ‘착하게 살기 버킷리스트’에도 오른 중요 항목이니 하지 말라고 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질투까지 없앨 수는 없다.

“네가 오해할 일 같은 건 없을 거야.”

“저도 황녀님을 믿어요.”

에단이 그녀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도로테아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보다 이걸 봐. 하르크에 대한 보고야. 네레우스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군사력을 보강하는 데 열중이야.”

도로테아는 에단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정말인가요? 분명 제국을 쉽게 치지는 못할 텐데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참 궁금합니다만, 오늘은 그만하고 제게 시간을 내주시면 좋겠는데요.”

에단은 도로테아의 얘기에 홀라당 넘어갈 뻔한 걸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또 같이 신나서 하르크에 대해 토론하며 일할 뻔했다.
그는 오늘의 임무를 다시 상기하며 도로테아를 붙잡았다.
그가 오늘 도로테아를 보러 온 이유는, 그녀를 쉬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선물까지 준비해 온 것이고.
안 그래도 도로테아의 얼굴엔 피곤한 빛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딱 보니 보고는 전부 받으신 것 같은데, 이만 쉬셔도 되겠죠?”

“하지만 에단.”

“요즘 잘 못 주무신다고 들었어요. 지난밤엔 눈을 붙이셨나요?”

에단이 그녀의 충혈된 눈을 보며 물었다.

“아니. 하지만 그저께는 잠깐 잤어.”

“잠깐이면 얼마나요?”

“한…… 서너 시간?”

“두 시간 정도 주무셨으면 다행이겠군요.”

도로테아가 시선을 떨구며 소심하게 대답했고, 날카로운 에단의 눈은 그녀의 변명을 바로 알아챘다.
차라리 일주일 동안 얼마나 주무셨냐고 물어보는 게 나을 뻔했다.

“클라라.”

“준비됐습니다, 도련님.”

“뭘 준비해?”

“오늘은 황녀님을 꼭 재우라는 명을 받아서 말입니다.”

에단이 생긋 웃었고 클라라가 잽싸게 도로테아를 욕실로 끌고 갔다.
클라라는 도로테아의 옷을 편하고 넉넉한 품의 하얀 파자마 드레스로 갈아입히고 따뜻한 물로 가볍게 씻겨 주었다.
그사이 다른 하인들이 꿀을 한 스푼 탄 우유와 무화과를 준비해 주었다.
도로테아가 씻고 나오자 에단이 침실 앞에서 그녀를 맞았다.

“에단,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잠을 잘 자는 것도 해야 할 일이랍니다. 불면은 일의 능률을 떨어뜨려요.”

에단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침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침대 옆 협탁엔 하인들이 준비해 둔 따뜻한 우유와 무화과가 놓여 있었다.
에단은 도로테아를 침대에 눕히고 그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커튼을 치고 촛불 하나만 켜두어 은은한 빛 한 점만 남은 방.
하지만 도로테아는 전혀 잠이 오질 않았다. 누워 있으니 오히려 가슴이 더 크게 뛰면서 불안해졌다.

내가 뭘 잘못 전달하진 않았을까? 내가 한 판단이 틀린 게 아닐까? 그 자료도 미리 봐둬야 하는데. 아, 클라라에게 그것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오늘 레이먼드가 진찰을 받는다고 했는데 괜찮은가? 보러 가봐야 하지 않을까?
어두운 방을 온갖 생각이 채워나갔다.
그때 에단이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생각을 쫓아냈다.

“제가 왔는데 일 생각은 잠깐 내려놓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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