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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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삶이었다면 당신은 카르넌의 차별에 초연하지 못했을 테고, 나는 조나단의 구박에 속절없이 당하기만 했겠지.
정령을 다루지 못하는 황녀라는 죄목을 달고 사는 법을 몰라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을 테고, 술집 여자의 천한 피를 이었다는 손가락질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었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두 번째 삶이기에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다.

“힘들면 그만하셔도 돼요, 황녀님.”

레이먼드가 기억을 잃었든 아니든, 모든 걸 그에게 떠넘기고 도망가도 된다.
그가 모르는 일이 있으면 가르치고 조언해 줄 사람은 많다. 그러니 과거의 고배를 다시 꺼내어 마실 필요는 없다.

“그냥, 우리끼리 행복하게 사는 것도 충분해요.”

에단은 자신이 레이먼드의 어쭙잖은 계획에 어울려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걸 봤으면서, 몇 년 사이 행복에 취해 또 잊었던가.
레이먼드의 말대로, 도로테아는 강한 사람이니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자신이 힘들어서,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픈 후에야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리고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만, 에단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아프지 않은 편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또다시 도로테아가 이렇게 괴로워하다가…… 회귀 전에 그랬듯 지나치게 무거운 삶의 무게를 던져버리고 홀가분하게 그의 곁을 떠나버릴까 봐.

그렇게 되면 그는 그녀를 다시 살릴 수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게 되어버린다.
그는 평생 저주받은 채 홀로 살아가야 하겠지.
에단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도로테아가 위태로울 때마다 그는 과감해지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다.

“부디 황녀님께서 바라는 대로 하세요.”

* * *

“에단 브론테.”

에단이 도로테아와 헤어지고 나오는데 조이가 그를 불러 세웠다.
에단이 그녀를 돌아보자 조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지?”

황녀님을 빨리 따라가야 할 텐데, 굳이 그를 불러 세워 시비라도 걸 셈인 걸까?
에단이 차갑게 응시하자 그녀가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황녀님이…… 요즘 많이 힘드신 것 같아.”

“뭐?”

“그러니까…… 네가 황녀님께 힘을 좀 주라고.”

조이의 말에 에단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내 말은, 나, 나는 황녀님 위로 같은 거 잘 못 하니까 네가 하란 말이야! 황녀님은 널 좋아하시니까!”

결국 조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에단에게 버럭 호통을 쳤다.
그러자 에단의 눈썹이 우아하게 씰룩였다.

“네가 보기엔 황녀님이 많이 힘드신가?”

“어.”

조이의 말에 에단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평소엔 도로테아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조이이기에 에단은 도로테아가 정말 많이 힘들어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요즘 잠도 거의 못 주무셔. 밤에도 경비를 서고 있으면 황녀님 방엔 불이 켜져 있어.”

“…….”

“클라라 하녀장님도 걱정이 커. 주무시라고 불을 꺼드려도 못 주무시나 봐.”

조이의 말에 에단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로테아는 회귀 전에도 불면증을 앓았다.

수면 대신 부담감, 죄책감, 불안과 외로움. 온갖 감정이 그녀의 밤을 잠식한 탓이었다.
황실의 의사는 그것이 마음의 병이라고 했고, 어떤 약을 써도 고쳐지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뭘 하시는데 저러다 언젠가 쓰러지실까 봐 무섭다고. 레나스코르 궁 사람들도 다들 걱정이 많아.”

그러니 조이는 도로테아가 너무 걱정되어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에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화가 나기는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도로테아를 도울 수 있는 건 오직 에단밖에 없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 한번 황녀님을 따로 찾아뵐 수 있도록 시간을 청하지.”

“되도록이면 빨리 와. 황녀님 쓰러지시기 전에.”

“물론이야.”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에단은 저택으로 돌아와 서랍 안쪽에 있던 낡은 책을 꺼냈다.
고서점에서 구매한 아주 오래된 이 책은, 회귀 전엔 본디 그의 소유가 아니었다.
회귀 전엔 줄리아가 에단보다 먼저 손에 넣은 책.
테온 프리드를 돕기 위해 정령에 관해 샅샅이 연구하던 그녀가 소유했던 이 책은 이번 생엔 그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정령에 대한 연구서로, 그 가운데는 사실인 이야기와 구전으로만 정해지는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에단은 정령과 계약하여 회귀한 후로 정령에 대한 조사를 몰래 해왔다.
빛의 정령을 더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또 그가 모르는 정령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 덕분에 예로부터 밀라네어가 악성 종양으로 죽거나 죽을 위기에 처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밀은 아니지만 밀라네어와 프리드가 약해지며 잊힌 이야기.
밀라네어가 악성 종양으로 많이 죽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빛의 정령이 가진 생명의 힘 때문이었다.
종양은 정령으로부터 비롯된 생명의 기운을 양분 삼아 쉽게 생기고 자라났다.

그리고 몸의 주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하고 심각해진 종양이 결국 그를 죽이고 마는 것이다.
밀라네어들 가운데 절반 가량이 악성 종양 때문에 사망했고, 카르넌의 병 또한 이와 같았다.
생명의 힘이 생명을 좀먹는 아이러니한 운명.
그렇기에 빛과 어둠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

선대의 밀라네어들은 프리드의 힘을 빌려 종양을 억제하고 치유했다.

두 힘의 균형으로 두 가문과 우베라는 더 나은 삶을 영위한 것이다.
하지만 프리드들도 힘을 잃은 지금, 카르넌의 종양은 이렇다 할 치유법이 없었다.

‘테온 프리드가 있긴 하지만…….’

그는 프리드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자기 목숨도 갉아 먹고 있는 자다. 그러니 그에게 황제의 목숨을 맡길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중요한 것.
가시가 되어 그의 양심을 찌르는 한 챕터.

[정령 친화도를 향상시키는 법.]

한 페이지에 불과한 이 챕터에 따르면 훈련을 통해 정령 친화도를 어느 정도 향상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태생적으로 정령 친화도가 낮은 사람이 태생적으로 높은 사람을 따라갈 수는 없어도, 최소한 어느 수준까지는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테온 프리드에 관한 챕터이자 카르넌의 치료와 연관된 내용이기도 했다.

이 훈련으로 테온의 친화도를 높인다면, 테온은 어둠의 정령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고, 어쩌면 카르넌의 종양을 치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단이 지금까지 이 책을 굳이 꺼내지 않은 건 테온과 카르넌을 돕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페이지짜리 훈련 방법만 적힌 검증되지 않은 이 챕터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나 더 문제인 건 [적절한 조치가 없을 경우 훈련 도중에 사망할 수 있음]이라는 문구다.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죽을 수도 있다니.
그래서 에단은 이를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잡서의 한 조각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이걸로 도로테아의 부담을 덜 수 있다면…….
그때였다.

“에단!”

아래층부터 고함치듯 부르는 그의 이름.
고약한 술 냄새가 나는 목소리의 주인은 조나단이었다.

‘또 왜…….’

쾅쾅 들려오는 발소리에 에단은 책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곧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는 문.
저 무례한 버릇은 평생 고치지 못할 모양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에단은 성가신 일을 마주한 기분으로 물었다.
두 사람은 한 저택에 살았지만 서로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간섭하지도 않았다.

싸우는 것조차 질린 사이.
얼굴 안 보고 사는 게 제일임을 깨달은 지 꽤 되었는데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인지.

“너, 황태자 전하가 널 황궁으로 불러들였다는 게 사실이야?”

손에 술병을 든 조나단은 비틀거리는 몸을 문에 기대고 물었다.
아, 그 소식이 귀에 들어갔나?
조나단은 여전히 성곽의 병사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황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직급은 올랐지만 몇 년째 이렇다 할 명예는 못 챙긴 신세.

“보좌관이 바쁘다고 전하께서 저를 잠깐 불러 돕게 하셨습니다.”

“네가? 네가 왜? 혹시 전하랑도 침대에서 굴렀냐?”

술에 취한 조나단이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었다.
그러자 에단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밖에서 저런 말을 했다간 바로 황궁의 병사들에게 잡혀가도 할 말이 없을 텐데.

“그딴 식으로밖에 생각 못 하지.”

에단은 한심한 자의 술주정에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며 그를 무시했다.
그러자 조나단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 너 지금 형한테 뭐라고 했어? 그딴 식? 황태자 전하가 널 예뻐한다고 기고만장하구나!”

조나단이 비틀거리며 다가오더니 에단의 테이블에 있던 촛대와 노트를 바닥으로 쓸어 떨어뜨렸다.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물건이 바닥에 흐트러졌고, 촛농이 카펫에 눌어붙었다.
에단은 환멸을 느꼈다.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수한 교육기관을 졸업한 자이자, 후에 브론테 공작이 될 자다.
놀랍게도 좋은 교육기관을 졸업했다고 해서 그자가 도덕적이거나 반듯한 사회성을 갖춘다는 보장은 없다.

“자, 말해봐, 에단. 대체 황태자 전하를 어떻게 자빠뜨렸는지. 아, 아예 황태자랑 황녀랑 셋이서 뒹굴었나?”

그 순간 에단은 화를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싸움엔 일가견이 없는 에단이지만 술 취해 인사불성이 된 조나단에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눈이 뒤집힌다는 게 이런 걸까?

“날 모욕하는 건 참아도 황녀님을 모욕하는 건 못 참아.”

에단은 조나단에게 완전히 달려들었고, 넘어진 조나단의 얼굴을 몇 대 더 주먹으로 갈겼다.
몇 해 전 사냥터에서 죽을 뻔한 그를 살려준 일이 떠올랐다.
도로테아가 원하는 개과천선을 위해 충동적으로 저지른 선행.
하지만 그때 그냥 죽게 놔뒀으면 어땠을까? 그럼 이딴 개소리를 듣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내가 공작위를 이어서, 도로테아에게 부끄럽지 않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텐데.

“빌어먹을……! 널 살린 게 후회돼.”

에단은 조나단을 내려다보며 노기로 뇌까렸다.
그러나 곧 밑에 깔려 있던 조나단이 에단을 던지듯 밀쳐 넘어뜨리곤 역으로 에단을 내리눌러 머리를 카펫에 박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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