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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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에단이 저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 봐.’

나의 오른팔이라 불릴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그였다.
그는 나와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저토록 처절하게 운 적이 없었다.
늘 당당하고, 미소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농락하고, 온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에단 브론테가 저렇게 무너질 수 있었던가?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울고 있는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전생의 에단 브론테와 달리 모래사장에서 울고 있는 에단은 작았다.
드넓은 바다 앞에 웅크린 그는 그 무엇보다도 미약해 보였다.
내가 알던 에단 같지가 않았다.
저기 있는 것은 간사하고 능청스럽던 황금 눈의 뱀이 아니라 너무 일찍 슬픔을 알아버린 아이였다.

‘태어날 때부터 에단이 나빴던 것은 아닐 테니까.’

엄마 배 속에서부터 사람을 이용하고 버리고, 배신하고, 농락하며 우습게 여긴 것은 아닐 거잖아.
그래, 처음부터 나쁘게 태어나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를 위해서라도.

‘저렇게 우는 이유라면 아마…….’

지난 레이의 책봉식 때 석류 주스로 부딪쳤던 것이 브론테 공작이었다.
즉, 에단의 친아버지 되는 사람.
에단 정도라면 브론테 공작을 따라 제도로 올라올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저렇게 잘생기고 재능 있는 자식이 있다면 사교계에 내보이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
그런데 그는 제도에 올라오지 않았다.
에단의 오랜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서자였지.’

말이 서자지 에단은 공작이 밖에서 낳아서 데리고 들어온 아들이었다.
때문에 그는 에피스테메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제도에서 행해지는 온갖 사교 행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가 제도의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서자, 비(非) 에피스테메 출신, 뒤늦은 데뷔.

그럼에도 이슈와 가십을 좋아하는 사교계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천사의 강림’은 엄청난 이목을 끌었고 에단은 그것을 아주 잘 이용하여 금방 사교계에 정착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동병상련 비슷한 것을 느꼈다.
나 또한 에피스테메에 들어가지 못했고, 늘 레이의 그림자 뒤에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 했으니까.
에단의 화려한 가면 뒤에 숨은 뒤틀린 본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내가 그와 동족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저렇게까지 울기도 했나……?’

서자라는 이유로 집안에서 늘 숨기려 했다면 그럴 만도 하지.

‘나도 그랬으니까.’

회귀하기 전엔 나를 알아주지 않는 카르넌 때문에, 나와 달리 모든 걸 가진 레이 때문에 숱하게 울기도 했으니까.
홀로 웅크린 채 눈물을 쏟아내는 에단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지끈거렸다.
옛날 나의 모습이 겹친다.

‘에단은 멀리해야 하는데…….’

나를 폭군의 길로 이끌고 또한 그 폭군의 목을 친 장본인.
그와 엮여서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아는데도 나는 모래에 발을 묻어놓고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우는 에단으로부터 등 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에단이 악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면. 나와 마찬가지로 착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나의 회귀는 에단에게도 새로운 삶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바닷바람과 함께 그의 눈물이 그치길 기다렸다.
에단은 탈진할 때까지 눈물을 뽑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는지 붉어진 눈으로 바다를 보았다.
나는 한참 모래에 박혀 있던 발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의 슬픈 아름다움은 또렷해졌다.

“안녕.”

안녕, 에단 브론테.
용기 내어 건넨 나의 인사에 그의 금빛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붉게 충혈된 눈, 눈물에 젖은 두 뺨과 소매가 또렷이 보였다.
그는 내가 다가오는 줄도 몰랐는지 너무 놀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 아…….”

안녕…… 이란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에단은 인사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내가 다음 한 마디를 건네기도 전에 모래가 묻은 옷을 털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다.

마치 요정의 마법이 풀리기 전에 무도회장을 빠져나가는 어느 공주님처럼 에단은 이내 먼 바위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아…….”

괜히 말을 걸었구나. 혼자 울게 놔둘걸.
나는 무슨 착한 척이라도 하려고 했던 걸까?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슈테판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까만 눈이 ‘잡아 올까요?’ 하고 묻는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 * *
제도의 황녀가 내려왔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근처 귀부인들의 연락이 별궁으로 몰아닥쳤다.

그들은 황녀와 안면을 트기 위해 인사를 핑계로 방문 편지를 몇 번이고 보내왔다.
나 따위와 가까워져서 어디에 쓰겠느냐만, 지방의 귀족들에게 황녀와의 인연은 꽤 내세울 만한 인맥이 되는 것이다.
조용히 지내고 싶은 일상에 몰아닥치는 폭풍우.

‘그래, 한번 인사 받아주고 끝내고 말지.’

착한 사람의 마음을 장착하며 나는 귀부인들을 별궁으로 초대했다.
하지만 이내 착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금 실감했다.

“어머, 귀여우셔라!”

누구야. 또 누가 귀엽다 소리를 내었어?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내 주위를 둘러싼 귀부인들을 쭉 둘러보았지만 그들은 별궁에서의 특별한 시간에 고양되어 나의 눈빛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어쩜, 인형 같으셔요!”

“몸이 아프시다더니 너무 말랐네. 여기 맛있는 것 좀 더 드세요.”

귀부인들이 나를 보며 콧소리를 냈다.
다들 나를 제 조카쯤으로 생각하는지 만져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곱슬거리는 금발에 동그랗고 푸른 눈. 나이에 비해 조금 작은 체구.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나를 보면서 그들은 무척 즐거워했다.
그들이 덜어주는 온갖 음식이 내 접시에 수북하게 쌓였다.

“이것도 좀 드세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지만, 제가 혼자 먹을 수 있답니다.”

부인들의 지나친 배려에 나는 몇 번이고 거절해야만 했다.
제발 음식 좀 그만 달라는 의미로 직접 포크를 들고 양송이버섯을 찍어 보란 듯이 오물오물 씹어 먹었다.

“이렇게나 똑 부러지시니! 편식도 하지 않으시고……. 과연 황실에서 잘 배우셨네요.”

“어쩜, 우리 황녀님 참하신 것 좀 보세요. 꼭꼭 씹어서 잘 드시네요.”

양송이버섯 하나 먹은 게 뭐가 대단하다고 귀부인들은 까르르 웃었다.
아, 피곤해.
마치 레이 백 명에게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이렇게 어린 황녀님께서 이 먼 곳에 홀로 오시다니.”

“황녀님을 저희 집에 한번 모시고 싶은데요. 비록 누추하지만 외롭진 않으실 거예요.”

아니, 나는 외로움을 즐기러 이곳에 왔어.

“정말, 황녀님. 저희 집에 와서 며칠 지내는 건 어떠세요?”

그들은 내 엄마 노릇이라도 해주려는 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날 때부터 어머니를 잃은 나의 배경이 그들의 동정심까지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어린 여자애가 넓은 궁전에서 혼자 지낸다는 것은 그들에게 충분한 동정거리가 되겠지. 씹고 뜯기 좋은 가십도 될 테고.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부인. 폐를 끼쳐선 안 되죠.”

“어머, 폐라니요! 황녀님이 와주시는 건 폐가 아니라 영광인걸요!”

아니, 내 말은 당신들이 폐라는 말씀이랍니다? 내가 폐를 끼치는 게 아니라.
나는 착한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며 웃어 보였다.

“별궁에서 혼자 지내면 외롭고 심심하시죠?”

“아니요, 괜찮아요.”

“어쩜, 철이 이렇게 빨리 드셔서……. 의젓하시기도 하지.”

아니, 진짜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줘요. 제발.

“친구랑 한창 뛰어놀 나이인데.”

아니요, 전 그 나이 훌쩍 지나고도 훌훌쩍쩍 지났답니다.

“저희 아이가 황녀님 또래인데 한번 인사드리러 데리고 와야겠어요.”

뭐라고?
내가 고개를 번쩍 들고 그 이야기를 꺼낸 부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다른 부인들은 좋은 생각이라며 자신의 어린아이들도 데려와 황녀님과 놀게 해야겠다고 떠들어댔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나는 별궁에 열 살 내외의 애들이 뛰어놀며 내게 들러붙을 것을 상상했다.
아직 이차 성징도 겪지 않은, 체력만 좋고 철없는 아이들이 득시글대는 정원이 눈에 훤했다.
끔찍해!
나의 평화로운 궁전은 난장판이 될 것이고, 난 아이 돌보미로 전락하고 말겠지!
레이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그런 애들이 여럿?

“지금은 제가 요양 중이라 함께 뛰어놀기는 어렵고, 몸이 괜찮아지면 나중에 따로 초대하겠어요.”

나는 꽉 쥔 주먹을 숨기고 착한 미소와 함께 정중히 거절했다.
별궁은 반드시 평화를 사수해야 했다.

“이 나이에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시고 어쩐다……! 몸에 좋은 약이라도 선물해 드려야겠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에요.”

나는 손을 내저었다.
제발 그런 것도 보내지 마. 내 병은 혼자 내버려 두면 완치될 수 있는 병이야.

“호호, 황녀님도 의젓하시지만 역시 어리긴 한가 봐요. 약을 싫어하시네.”

“원래 아이들은 쓴 약을 먹지 않으려고 온갖 꾀를 부리니까요.”

부인들이 또 저들끼리 까르르 웃었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오해가 쌓여갔다.
나는 슈테판과 클라라에게 시선을 돌리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무언의 구조 요청을 보냈지만 클라라는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고 있었고 슈테판은 늘 그렇듯 말없이 목석처럼 서 있었다.
오히려 클라라는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물론 귀부인들의 몰아치는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말들이었으나-나를 보며 활기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는 듯 두 손을 꼭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아무도 내 편이 없군!’

그래. 인생은 원래 외로운 것.
세상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 고독한 길이었다.

“황녀님.”

그때 한쪽에 고아하게 앉아 있던 귀부인이 나를 불렀다.

‘브론테 공작 부인.’

“언젠가 저희 집에도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쓴 약은 절대 대접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리지요.”

공작 부인은 기품이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브론테 공작가, 에단 브론테.
지난번 울던 에단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해 주신다면 감사하지요.”

난 착하게 살기 버킷 리스트의 항목에 ‘에단의 개과천선’을 추가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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