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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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에서 쓰는 바질, 다 여기서 가져간다? 엄청 잘 자라거든.”

“밭에 대한 기억은 그래도 꽤 나나 봐, 레이먼드?”

도로테아는 신이 나서 밭에 대해 이야기하는 레이먼드를 보고 물었다.

“아아……. 그런가? 몸이 기억하는 걸지도 몰라. 내가 우베라어로 말하고 쓰는 법을 까먹지 않은 것처럼.”

레이먼드가 어색하게 웃었다.
도로테아는 레이먼드 뒤편에 서 있는 에단과 눈을 마주쳤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레이먼드. 너는 황태자의 일에 대해 궁금한 거 없어……?”

도로테아는 바질 향기를 폴폴 풍기는 레이먼드에게 물었다.

“어……? 그건 이미 여기 에단이 많이 알려줬어.”

“그게 아니라, 내 말은 황태자로서 일을 해야겠다, 내 자리를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거냐는 뜻이야.”

레이먼드는 기억을 잃고도 단 한 번도 황태자의 일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동이 가능해진 후에도 도로테아가 그의 업무 대부분을 대행해야 했다.
도로테아가 보기엔 그 점이 매우 이상했다.
기억을 잃었으면, 이전에 자신이 하던 일이 뭔지 호기심이 생겨서라도 황태자의 일을 살펴보려 할 텐데.
아무리 바보라도 황태자라는 지위를 듣고 나면 그 특별함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텐데.
도로테아의 눈이 가늘어지자 레이먼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나는 그냥 편하게 지내는 게 너무 좋아서……. 돈도 많고 이렇게 넓은 밭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레이먼드는 다급히 에단을 쳐다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의무보다는 권리를 누리는 데 더 관심이 있으니까요.”

황태자가 짊어진 의무보다는 마음껏 밭을 뛰놀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더 매혹적이리라.
에단의 말에 도로테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레이먼드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 들었어. 도로테아, 네가 일을 엄청 잘하고 있다고.”

레이먼드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실속 없는 칭찬이 아니었다. 도로테아는 실로 레이먼드의 대리역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어, 귀족들 사이에서도 인정을 받을 정도였다.
몇몇 이는 레이먼드에서 도로테아로의 인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일의 진행에는 거의 차질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황태자의 성별만 바뀌었을 뿐’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곤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예전부터 도로테아와 레이먼드가 정치적인 논의를 자주 함께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회의나 중요 안건에 대해서는 모두 파악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문제였다.
도로테아는 자신이 지나치게 빠르게 황태자의 역할에 적응하는 것이 좀 무서워졌다.

무섭고 적대적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귀족들은 생각보다 호의적이었다.
빛의 정령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카르넌의 허락을 받은 ‘정당한’ 수행자라서?
예전처럼 악다구니를 쓰거나 당장 드잡이질을 할 듯 굴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도로테아는 자신이 레이먼드의 일을 대신하는 데 순탄한 게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태자로서의 일을 무성의하게 대충 처리할 수도 없었다.
우베라를 또다시 자신의 손으로 망칠 순 없기 때문이다.
카르넌이나 귀족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보니까 이런 나보다는 네가 훨씬 더 황태자 자리에 잘 어울리는 것 같던걸?”

레이먼드가 바질을 돌보며 말했다.
그러자 도로테아가 약간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레이먼드를 보았다.

“황태자 전하.”

사석에서는 레이먼드가 좋아하는 대로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그녀가, 그에게 예를 갖춰 불렀다.

“저는 그저 전하의 대리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론 내가 언제 황태자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배우고 익히시면 돼요. 지금까지 잘하셨으니 분명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도로시, 하지만 우베라엔 너처럼 유능한 군주가 필요할 거야.”

“저는 유능하지 않아요, 전하.”

“제발, 전하라고 부르지 마, 도로시. 너까지 날 전하라고 부르면 대체 내 이름은 누가 불러준단 말이야?”

어릴 때는 다들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르던 존재들이 하나둘씩 그를 ‘전하’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그들과의 관계도 점점 변해갔다.
테온도 그의 보좌관이 된 후, 점점 레이라고 부르는 횟수가 드물어져서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면 그를 ‘전하’라고만 불렀다.

줄리아는 이제 전하라는 호칭이 입에 정착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이름에서 레이라는 이름이 불린지 몇 년은 된 것 같으니.
레이로 불리는 것과 전하로 불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전하로 불리는 순간, 레이먼드와 상대방 사이에는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가 생겨난다.

레이먼드는 늘 그 거리가 불편했다.
살갑게 웃으며 장난도 치고 쓸데없는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 그런 일상이 점점 사라져갔다.
오직 도로테아만이 레이먼드의 이름을 지금까지 불러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마저도 전하라고 부르며 선을 그으려고 하는 것이다.
레이먼드가 도로테아에게 애원하자 그녀는 레이먼드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입술을 떼었다.

“전하의 이름은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죠.”

황태자이자 황제가 되는 자의 이름은 죽은 뒤, 역사서에 기록될 때 쓰일 것이다.
살아생전 불릴 이름의 횟수보다 더 많은 횟수가 그가 죽은 뒤에 불릴 것이다.
그러니 굳이 이름에 집착하지 않아도…….

“난 다정하게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관계를 원하는 거야, 도로시. 얼굴도 모르면서 나의 죽은 이름을 이러저러한 잣대로 평가할 사람들이 아니라.”

그에 도로테아의 눈이 흔들렸다.
레이먼드의 바람이 무엇인지 안다.
그가 앉은 자리는 친한 친구와 가벼운 식사마저 정치적인 편애로 읽힐까 조심해야 하며, 사적인 인사가 꼬투리 잡힐 수도 있는 자리다.
그리고 자유분방함을 사랑하는 그는 그러한 것들을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늘 원하는 걸 가지며 살 수는 없어요, 전하.”

도로테아는 그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이곳은 어린애 같은 투정을 들어줄 만큼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그러자 레이먼드의 눈이 상처받은 듯 떨렸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 수는 있는 거잖아.”

레이먼드는 태어날 때부터 황태자로 정해져서, 다른 것을 선택할 기회도 주지 않는 삶이 싫은 것이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참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배가 부르면 다른 것을 욕망하게 설계된 동물이다.

“그럼에도 갖지 못하는 것들이 있죠. 성 밖의 가난한 자들이 황태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것처럼요.”

농부의 자식은 농부가 되고, 사냥꾼의 자식은 사냥꾼이 되고, 영주의 자식은 영주가 되는 대물림의 삶이 당연한 세상.
농부의 자식이 황태자가 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황태자 또한 농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너는 황녀로만 남으려는 거야, 도로시?”

레이먼드의 푸른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질문에 도로테아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녀가 나의 자리라고.

“……황녀로 남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전하. 황태자가 황태자일 수밖에 없듯이.”

남으려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자 레이먼드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럼 황태자가 될 수 있으면 할 거야?”

“전하……. 제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도로테아는 고개를 저으며 등을 돌렸다.

“이만 가볼게요.”

도로테아는 성큼성큼 바질밭을 빠져나와 다시 궁전 안으로 향했다.
에단이 도로테아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시선을 돌려 레이먼드와 눈을 맞췄다.

“전하.”

에단의 부름에 레이먼드는 죄인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단은 도로테아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 * *

“황녀님! 도로테아 황녀님……!”

에단은 도로테아를 따라잡아 그녀를 붙잡았다.
그를 돌아본 도로테아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걸 참고 있었다.

“에단.”

“괜찮으십니까……?”

“에단, 강도에게 또다시 집을 맡길 수는 없는 거야. 그렇지?”

도로테아가 그가 붙잡은 손을 꽉 쥐며 물었다.

“강도라니요…….”

당신도 그 집안사람이잖아. 그런데도 당신은 그곳에 자리를 얻을 수가 없었잖아.
에단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그 말도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강도와 친족 살인 중에 뭐가 더 낫느냐고, 다시 질문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강도가 뉘우쳤다고 해도 어떻게 그에게 집을 맡기겠어. 아니, 애초에 강도가 또다시 집을 차지하려 한다면 뉘우친 게 아닌 거잖아. 그렇잖아?”

“황녀님.”

“레이먼드는 내가 강도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어.”

결국 도로테아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지고 말았다.
바닥으로 낙하는 눈물방울에 에단의 심장 또한 추락했다.
그는 도로테아를 끌어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두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고, 도로테아는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어느 때보다 왜소하게 느껴지는 도로테아를 안고 에단은 이를 꽉 깨물었다.

“에단, 차라리 이게 우리의 첫 번째 삶이었다면…….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하게 살아왔다면 이렇게 갈등할 필요도 없었겠지.”

기꺼이 레이먼드의 유혹에 넘어갔겠지.
정당한 황태자의 자리를 넘보기도 했을 테고, 어쩌면 레이먼드도 제게 맞지 않는 왕관을 내려놓았으리라.
하지만 지울 수 없는 역사가 그녀의 기억과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녀의 양심에 새겨진 죄.
아무리 이것을 두 번째 기회라고 생각하려 해도 족쇄를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에단은 그런 도로테아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또한 지난 생을 후회했고, 잘못된 선택에 괴로워했기 때문에.
그의 독단과 질투와 자만이 도로테아를 죽음으로 이끌었고, 지금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조차도 다 그의 탓이기에.

“하지만 두 번째라서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있는 거겠죠.”

에단이 도로테아를 꼭 끌어안고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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