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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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카르넌과 이야기를 마친 의사가 오더니 테온을 불러냈다.
레이먼드가 없는 자리에서, 처방과 주의사항을 알려줄 것이 있는 모양이다.
테온은 잠시 에단을 쳐다보았다.

“걱정 마시죠. 황녀님께 미움받을 짓은 안 하자는 주의라서……. 황태자 전하는 제가 잘 모시고 있겠습니다.”

에단이 생긋 웃자 테온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의사를 따라 나갔다.
그러자 방에는 기묘하게도 레이먼드와 에단,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저기, 에단…… 브론테라고 했나? 나랑은 많이 친했어?”

레이먼드는 에단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에단이 조용히 레이먼드를 내려다보았다.
에단의 금빛 눈동자가 내뿜는 싸한 느낌에 레이먼드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나랑 사이가 나빴어……?”

“글쎄요. 황태자 전하께서는 저와 친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나빴다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전혀 기억이 안 나.”

잠시 기억하려 애쓰는 듯 미간을 구긴 레이먼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러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전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니 꽤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기왕 하려면 조금 더 섬세하고 철저하셔야죠.”

“뭐?”

레이먼드의 되물음에 에단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거짓말은 좀 더 치밀하게 하셔야 한답니다, 전하.”

“무슨 소리야……?”

“도로시.”

에단이 살짝 허리를 숙여 침대에 앉은 레이먼드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나직이 속삭였다.

“도로테아 황녀님을 도로시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어요. ……전하만 빼고.”

바람 같은 에단의 목소리가 레이먼드의 등줄기를 전율시켰다.
레이먼드의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꼭 다시 돌아와서 너와 나의 이야기를 들려줘, 도로시.’

방금 레이먼드가 도로테아에게 했던 말.
하지만 그가 깨어난 후, 그 누구도 도로테아를 도로시라는 애칭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도로테아를 도로시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건 오직 레이먼드뿐이었으니까.
기억을 잃었다면 그에게 도로테아는 초면인 사람이나 마찬가지. 만나자마자 함부로 애칭을 지어 부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습관이란 무섭죠.”

매일 도로시라고 불렀으니, 무심코 익숙한 애칭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테온도 도로테아도 그 애칭이 익숙한 탓에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경황도 없을 테니, 그런 섬세한 것을 집어낼 정신도 없겠지.
하지만 에단은 아니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황녀님께는 예쁘다고 하시고 제게는 잘생겼다고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도 너무 티 났답니다.”

다들 감탄하는 에단의 외모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
에단은 그에 살짝 자존심이 상할 뻔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알았다. 도로테아는 예쁘게 여기면서 에단은 썩 좋아하지 않는 것이 레이먼드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음을.

에단은 천천히 레이먼드가 앉은 침대 주위를 돌며 입을 열었다.

“낙마도 다 계획하신 건가요?”

그는 회귀 전에 없었던 낙마 사고가 갑자기 일어난 데에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다.
도로테아와 에단에 의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승마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어 하는 레이먼드가 갑자기 사냥터에서 낙마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
그러자 레이먼드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너……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과찬이십니다, 전하.”

에단이 연극적으로 인사했다. 마치 레이먼드의 미숙한 연기에 응하는 듯했다.

“그럼 전하의 비밀을 발견해 낸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알려주시겠습니까? 왜 이 과감하고 위험한 연극을 시작하셨는지.”

에단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레이먼드가 입을 열었다.

“황위를 도로테아에게 넘겨줄 거야.”

그의 말에 에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로시에겐 황제가 될 자질이 있어. 나보다 더.”

“……황녀님과는 논의하신 사항입니까?”

“도로시는 모르는 일이야.”

“말을 꺼내면 황녀님께서 거절할 거란 걸 알고 계셨군요.”

“도로시는 늘 자신을 감추려 하지. 분명…… 황위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역사적으로 능력 있는 둘째가 첫째의 승계를 가만히 두고 보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러니 도로테아는 자신의 부당한 처지에 화가 날 법도 했다.
게다가 이제 도로테아의 정령술이 레이먼드의 힘보다 더 강한 상황.
그런데도 도로테아는 늘 조심스러워 보였다.

“도로시는 나와 싸우는 걸 두려워하는 거야. 제국이 혼란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고.”

레이먼드는 지독하게 착한 동생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에 에단이 무엇을 고민하는 듯 입술을 물었다가 질문했다.

“……황녀님께서 원하실까요?”

그것은 에단 본인에게도 묻는 말이었다.
도로테아를 정당한 황제로 만드는 것. 그것은 그가 회귀할 때부터 품었던 원대한 꿈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으로는 레이먼드와 손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도로테아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다. 회귀 전의 기억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그리고 에단은 그녀가 그 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알았다.
도로테아는 이제야 간신히 평화에 몸을 맡기고 행복한 일상을 쌓아가고 있었다.
가끔 대신 회의에서 입을 다물고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것에 답답해하긴 했지만, 그녀 인생에서 지금처럼 안정적인 시기는 없었다.
그런데 다시 황제의 길을 걸으라고 떠밀 수 있는가? 그녀의 고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내가?
에단이 주먹을 꽉 쥐자 그를 지켜보던 레이먼드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알아. 도로시가 제국의 일을 얘기할 때마다 빛내는 눈빛을. 조금씩 나아지는 제국을 보며 미소 짓는 그 얼굴을.”

레이먼드는 그를 찾아와 정치적 담소를 나누던 도로테아를 떠올렸다.
그에겐 제국의 골치 아픈 문제들이 부담스럽고 괴롭기만 한데, 도로테아는 그 일을 해결하려고 고민하는 과정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민으로 제국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걸 볼 때면 미소를 지었다.

레이먼드는 그런 도로테아를 보고 있으면 입안이 소태처럼 썼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옭아매는 사슬이 된 것만 같았다.
무능하고 한심한 나만 없었다면, 도로테아가 저렇게 위축되어 지내진 않았을 텐데…….
저렇게 완벽한 동생이 있는데, 도로테아 대신 내가 황위에 오르는 게 맞는 걸까?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 뒤바뀐 운명의 비극.
그는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래서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도로테아에게 권력이 이양될 방법을 찾았다.
다짜고짜 황태자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레이먼드가 황위를 이을 정당성과 능력을 잃어, 모두가 도로테아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레이먼드는 자신에게 구멍을 뚫었다.
카르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에게 황위를 물려주진 않으리라.

“너도 알지 않나? 도로시에게 정치적 욕망이 있다는 걸.”

레이먼드는 이미 에단의 마음을 안다는 듯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에단의 눈동자에 다시금 파문이 일었다.
에단도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태생적으로 권력과 잘 맞는 사람이다. 그런 일을 좋아하고, 그런 일을 할 때 빛이 나는 사람.
레이먼드가 연극을 벌이고 있음을 알았으면서 모두가 나간 뒤에야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뜻.

“나는 도로시를 믿어.”

만약 도로테아가 황태자의 자리를 원치 않고 진정으로 괴로워한다면, 레이먼드는 기꺼이 그 짐을 다시 자신이 질 준비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로테아는 강하다.
혼란스럽기도 하겠고, 황태자가 짊어져야 하는 무게가 버거울지도 모르겠지만 도로테아는 충분히 그것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고로 레이먼드는 믿었다. 도로테아라면 성군이 될 수 있을 거라고.

“…….”

에단은 흔들림 없는 레이먼드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는 에단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로테아를 진심으로 믿는 맑고 푸른 눈동자 앞에, 에단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찌 반박할 수 있을까?
도로테아를 가장 오랫동안 절실하게 믿은 사람이 바로 에단 브론테인걸. 그녀가 품고 있는 열정과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걸.

“황녀님께서 힘들어하신다면, 저는 바로 황녀님께 이 일을 말씀드릴 겁니다.”

에단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
레이먼드의 설득 앞에 무력하게 굴복해 버린 그의 욕망.
레이먼드는 입을 다문 에단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도로시를 사랑하는구나, 에단 브론테.’

그와 대화하는 내내, 에단은 도로테아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했다.
모든 것을 도로테아를 위하여.
레이먼드는 에단 같은 이가 도로테아의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조금은 고마워졌다.
* * *
카르넌은 깊은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했다. 도로테아 또한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레이먼드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는 의사도 장담하지 못했다.
지금 이 상태로 레이먼드는 황태자의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

“아까 말했던 대로, 당분간 네가 레이먼드의 일을 나눠서 해야겠다.”

“……예, 폐하.”

도로테아의 대답이 무겁게 떨어졌다.
레이먼드의 건강 이상설이 돌 수 있으니 얼굴을 비쳐야 하는 자리에는 레이먼드가 나서겠지만, 그가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기에 그 몫의 일부는 도로테아가 나눠서 져야 한다.

“레이먼드의 상태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인 상황도 고려해야 해. 천천히 너의 입지를 다져라, 도로테아.”

“하지만 만약 황태자 전하가 기억을 되찾으면…….”

“네가 국정에 조금 손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어. 그땐 다시 레이먼드가 그의 일을 하게 될 거다.”

“……예, 폐하.”

도로테아의 고개가 땅을 향했다.
여전히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녀에게 선택권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레이먼드의 대체품으로, 그녀는 황태자의 업무를 처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 잠깐 충격으로 그럴 뿐이야. 레이먼드는 금방 돌아올 거야.’

그가 죽지 않은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만약 레이먼드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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