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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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방으로 옮겨라.”

카르넌의 명령에 하인들이 소란을 떨지 않고 레이먼드를 방으로 올려 침대에 눕혔다.
카르넌은 의사로부터 레이먼드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보고받았고, 테온과 다른 기사들로부터 사고 정황을 확인했다.
누구의 탓이라고 할 것도 없는 낙마 사고였기에, 기사들은 황태자의 중상에도 불구하고 몇 주의 근신으로 끝날 수 있었다.

“테온, 넌 상시 레이먼드를 지키고 매일 내게 상세히 보고해라. 깨어나면 바로 내게 최우선으로 달려와 알려야 한다.”

“예, 폐하.”

카르넌은 일을 정리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레이먼드가 깨어나지 못하면…….’

“도로테아는 어디 있지?”

“황녀님께서는 황태자 전하 대신 남은 사냥대회를 마무리하고 올라오신다고 하셨습니다.”

테온이 답했다.
그에 카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로테아가 올라오는 즉시 자신을 찾아오도록 황명을 전달해 두었다.
* * *
도로테아는 사냥대회를 조용히 마무리하고 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황녀님, 괜찮으십니까?”

에단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녀의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고 긴장한 상태나 마찬가지.

“레이먼드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하지, 에단?”

도로테아의 질문에 에단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가정은 그와 그녀가 쌓아온 지금까지의 삶을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었으니까.
황제가 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레이먼드를 다시 받아들이고, 체념하려고 애써온 모든 순간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니까.

“분명…… 전하께선 깨어나실 겁니다.”

“곁에 있어줘, 에단.”

도로테아는 에단의 손을 꽉 붙잡았다. 흔들리는 마음을 기댈 곳이 필요했다.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알아주는 그가.
에단은 그리하겠다는 듯 그녀의 손을 꽉 맞잡았다.
* * *
두 사람은 곧 황궁에 당도했다.
황궁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클라라가 바로 도로테아를 맞이했다.

“황녀님, 황제 폐하께서 곧장 드시라고 명하셨습니다.”

“……알았어. 근데 레이먼드는, 아직이야?”

“예,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

도로테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곤 바로 카르넌을 알현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카르넌은 기다렸다는 듯이 도로테아를 그의 방으로 들였다.

“부르셨습니까?”

“당분간 네가 레이먼드의 일을 대신해야겠다, 도로테아.”

도로테아가 들어오자마자 그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

“대답.”

“예, 폐하…….”

거절의 경우의 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업무 외에는 모두 분배하거나 미뤄두었다. 그리고 만약 레이먼드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카르넌의 가정에 도로테아는 속이 울렁거렸다.

“네가 레이먼드의 뒤를 잇게 될 거다.”

그의 선언에 도로테아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황제가 되고 싶은 욕망이 여전히 가슴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이 눈앞에 가까워지자 도로테아는 도망치고 싶어졌다.
나는 좋은 황제가 될 수 없어. 또다시 손가락질받고, 나쁜 길로 빠지면 어떡해? 황제의 자리는 너무 무서워.

그녀는 자신에게 손가락질하고 비웃고 욕설을 내뱉고 오물과 돌을 던지던 군중의 외침을 기억하고 있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떠오르자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로테아.”

“…….”

“정신 똑바로 차려라. 넌 밀라네어야.”

밀라네어, 그 울림이 도로테아의 가슴을 꽉 조여왔다.
카르넌은 알까? 그가 믿는 도로테아 밀라네어가 사실은 정령 하나 부를 줄 몰라 다른 이에게 기대어 있다는 걸? 그가 바라는 밀라네어가 아니라는 걸?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걸?
도로테아는 숨이 막혀왔다.
그때였다.

“폐하! 폐하!”

로버트가 다급히 카르넌을 찾으며 달려 들어왔다.
도로테아는 혹시 레이먼드의 죽음을 알리는 보고일까 두려워 심장이 꽉 옥죄는 듯했다.
그리고.

“레이먼드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로버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 * *
카르넌과 도로테아는 모든 걸 제쳐두고 레이먼드에게로 달려갔다.

“레이먼드!”

카르넌과 도로테아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레이먼드가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그 곁을 의사와 테온이 지키고 있었다.
레이먼드의 푸른 눈동자가 두 사람을 향함과 동시에, 도로테아는 가슴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져 내리는 듯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폐하.”

테온과 의사가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카르넌은 성큼성큼 레이먼드의 침대 가로 걸어갔다.

“레이먼드의 몸은, 괜찮은가?”

카르넌은 레이먼드를 보며 의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의사가 테온의 눈치를 보았다.

“저 그게…….”

“폐하……?”

레이먼드의 맑은 눈동자가 테온과 의사를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워했다.

카르넌은 그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레이먼드.”

“…….”

레이먼드의 시선이 도와달라는 듯 의사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의사는 떨리는 몸을 깊이 숙이며 카르넌에게 고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기억이 없으십니다.”

* * *

“레이……?”

카르넌이 급히 의사와 의논하러 나간 뒤, 도로테아는 조심스럽게 레이먼드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빛은 늘 마주했던 것과 같이 맑고 깨끗했다. 금방이라도 ‘도로시!’라고 하며 말갛게 미소라도 지어줄 것 같았다.

“누구……?”

하지만 도로테아의 기대와 달리 그는 눈치를 보며 도로테아에게 물었다.

“정말 기억이 안 나?”

도로테아는 그가 장난치는 것이길 바랐다.
언제나처럼 짓궂게 사람을 놀리다가 멍청하게 ‘짠!’ 하고 웃어버리는 것이기를.
하지만 레이먼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헛웃음이 터졌다.

“본인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셔서, 깨어나신 후 꽤 오랫동안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옆에 있던 테온이 덧붙였다.
지금의 레이먼드가 아는 것이라곤 자신의 이름과 신분 정도가 다라고 한다.
바보 레이가 정말 바보가 되어버린 것이다.

“저기, ……너는 누구야?”

다시 묻는 레이먼드의 순수한 질문. 그는 텅 비어버린 머릿속을 어떻게든 채워보려 애쓰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도로테아. 도로테아 밀라네어.”

도로테아는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그러자 레이먼드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네어. 내 가족이구나.”

“……그래. 네 여동생이야, 멍청아.”

아무것도 모르는 레이먼드에 화가 나서 도로테아는 울컥 그에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레이먼드가 바보처럼 웃었다.

“내 여동생, 되게 예쁘다.”

“뭐……?”

“예뻐.”

레이먼드가 도로테아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이상한 소리나 지껄이는 레이먼드였다.
정말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는 걸까?
그때 마침 에단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에단을 발견한 테온이 미간을 구겼다.

“에단, 네가 들어올 자리가 아니다.”

레이먼드의 상태는 외부에 알리기엔 민감한 문제다. 그런데 황실과 아무 관계 없는 그가 들어오다니……?

“미안, 테온. 내가 불렀어.”

“하지만 도로테아 황녀님…….”

“테온, 내겐 그의 도움이 필요해. 믿을 만한 사람이야.”

그녀는 에단 없이는 초조하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직 이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에단은 그녀의 안정제이자, 그녀가 과거의 그림자에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는 유일한 지지대였다.

레이먼드의 사고로 인해 혼란스러운 그녀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에 테온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에단에게 이 일이 알려지는 걸 여전히 경계하고 있었다.

“이미 밖에서 대기하며 들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기억을 잃으셨다고.”

“다들 입이 가볍군.”

“제 귀가 좀 밝았죠.”

에단은 도로테아 곁에 서며 말했다.
그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침대에 앉아 있는 레이먼드와 눈을 맞췄다.
누구냐고 묻는 듯한 레이먼드의 눈빛에 에단은 정중히 인사했다.

“브론테 공작 가문의 에단 브론테라고 합니다.”

“에단 브론테……?”

“여기 계신 도로테아 밀라네어 황녀님의 음악 레슨을 맡고 있지요.”

“아아…….”

나랑은 어떤 관곈데? 레이먼드는 그렇게 묻고 싶은 듯했다.

“황태자 전하와는 종종 인사를 나누던 사이입니다. 황녀님과 자주 뵀으니까요.”

“그렇구나……. 전혀 기억이 안 나.”

레이먼드가 머리를 짚었다.
에단은 그런 레이먼드를 바라보다가 도로테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녀님은 괜찮으십니까?”

에단이 조용히 물었다. 여전히 굳어 있는 도로테아의 표정 때문이었다.
도로테아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지 않아.

“내가…… 모두를 난처하게 하고 있나 봐.”

레이먼드가 무릎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테온이 그의 곁에 무릎을 꿇어앉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전하, 전하께서는 일단 회복에 전념하십시오.”

“하지만…….”

“테온의 말이 맞아요. 황태자 전하의 기억을 되찾는 게 최우선이에요.”

도로테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먼드를 위축되게 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가 기억을 되찾는 것.
그러자 레이먼드가 도로테아를 보고 물었다.

“혹시 황태자와 황녀라면…… 나와 사이가 나빴어?”

“……나쁘진 않았어요.”

그러자 레이먼드의 얼굴이 조금 편하게 풀어졌다.

“다행이다. 혹시라도 나랑 사이가 나쁘면 어쩌나 했거든.”

“제가 목숨이라도 위협할까 봐요?”

“아니, 이렇게 예쁜 여동생이랑 사이가 나쁘면 내가 정말 나쁜 녀석이었을 것 같아서.”

“…….”

배시시 웃는 레이먼드에 도로테아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다면 그건 분명 도로테아 탓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레이먼드는 여전히 해맑고도 착했다.
기억을 잃어도 본성은 어디 가지 않는 걸까?
그때였다.

“도로테아 황녀님.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카르넌의 호출.
도로테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는 이미 안다.

“다녀올게.”

“꼭 다시 돌아와서 너와 나의 이야기를 들려줘, 도로시. 기억을 되찾으려면 그편이 도움이 될 것 같거든.”

“…….”

도로테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버트를 따라 카르넌을 만나러 밖으로 나갔다.
곧 에단의 금빛 눈동자를 품은 눈매가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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