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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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 드러난 얼굴에 모두가 동시에 그를 알아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레이!”

“화, 황태자 전하!”

레이먼드는 자신의 깜짝 등장에 놀란 사람들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뒤쪽에서 보좌관 테온과 레이먼드의 기사들이 따라 나왔다.
사람들은 뒤늦게 그를 향해 예를 갖췄다.

“레이, 어떻게 네가 여기에……?”

“나의 제빵 스승님이신 포 선생님이 가게를 차렸다길래 몰래 나와봤지. 요란하게 행차하기는 싫어서.”

“제, 제빵 스승님이라니요……!”

포의 얼굴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주근깨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딸기 같아 보이기도 했다.

“도로테아. 그 파이, 나랑 나눠 먹지 않을래?”

“제, 제가 새 파이로 드릴 수 있어요!”

“어차피 저 파이 한 판을 도로테아 혼자 다 먹는 건 무리일 거야.”

클라라는 안톤과 먹을 파이를 따로 챙겼고, 조이와 슈테판은 어차피 포와 가족이다.
도로테아에게 건넨 파이는 결국 그녀의 몫인데, 커다란 파이 한 판을 혼자서 다 먹기엔 역부족이었다.

“저, 그럼 전하를 모시는 분들도 파이 받아 가세요!”

포는 후다닥 파이를 둔 테이블로 달려가더니 양손 가득 파이를 들고 와 테온과 레이먼드의 기사, 따르는 하인들에게 나눠주었다.
대체 얼마나 많이 만든 것인지, 그렇게 나눠주고도 파이가 한가득이었다.
이 정도면 아마 온종일 오븐이 쉴 틈이 없었을 것이다.

“파이를 정말 많이 구웠구나!”

레이먼드가 가득 쌓인 파이를 보고 말했다.

“일부러 넉넉하게 만든 거예요. 세상에 파이를 나눠줄 사람은 많으니까요.”

포가 흐뭇하게 웃자 레이먼드는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네가 하고 있구나.”

“예?”

“고마워, 포.”

레이먼드가 포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 * *
매년 여름이 되면 우베라의 귀족들은 사냥을 즐긴다. 숲은 여름의 열기를 벗어날 수 있는 휴양지고, 활기 넘치는 짐승들은 좋은 사냥감이 된다.
황실에서도 사냥대회를 열었고, 그들이 사냥으로 잡아들인 짐승의 고기를 포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올해 황제 폐하께선 몸이 좋지 않아 불참하셨으니, 긴장되네.”

숲과 연결되는 황실 별장.
사냥대회 시작을 앞두고 준비하던 레이먼드가 말했다. 카르넌의 불참은 이례적이었다.
그는 매년 사냥대회에 나와 귀족들과의 관계를 다지고 직접 사냥대회의 순위를 정하여 상을 내리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건강상의 문제로 참석하지 못했다.

‘……올해니까.’

도로테아는 괜히 마른 입술을 감쳐물었다.
카르넌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
아직 카르넌은 자신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 많아졌다고만 생각하지만, 그의 죽음의 징조는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카르넌의 죽음에 감흥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게 드러날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가 죽을 걸 알면서 비밀로 숨기는, 죄인이 된 기분. 아비가 죽어가는데도 그 비극을 손 놓고 구경만 하는 방관자.
그때 레이먼드가 깊은 상념에 젖은 그녀를 깨웠다.

“도로시, 올해는 상 한 번 타야지!”

긴장을 풀려는 듯 레이먼드가 허리띠를 단단하게 당겨 매며 말했다.
하지만 도로테아의 반응은 무상했다. 사냥대회에서 꽤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실력인데도, 도로테아는 매년 수수한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난 그냥 바람 쐬러 나온 거야.”

도로테아는 사냥대회를 산림욕 즈음으로 생각했다.
사냥감을 몰기 위해 사슴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것도, 더 좋은 사냥감을 차지하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산을 들쑤시는 것도 내키지 않은 탓이다.
물론 돌아다니다가 눈에 띄는 사냥감은 사냥하지만, 눈에 불을 켜고 곰이나 늑대를 찾아다니며 사냥하는 이들에 비하면 소소한 수확이었다.

“또 에단 브론테랑 산책이나 하려고?”

레이먼드가 장갑을 끼며 웃었다.
에단은 매년 사냥대회에 참가하여 당당히 꼴찌 자리를 차지해 왔다.
다들 안다. 그가 도로테아랑 어울리려고 사냥대회에 온다는 걸.
카르넌은 사냥할 생각도 없으면서 사냥대회에 오는 에단을 못마땅해하며 도로테아를 곁에 두거나, 사람을 붙이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카르넌이 없으니 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

“아무튼 숲은 위험한 게 많으니 조심해, 도로시.”

“내가 애도 아니고.”

“애가 아니어도! 사냥대회에서는 짐승도 사람도 조심해야 한다고.”

레이먼드는 매년 도로테아를 걱정하며 당부했다.
숲은 고르지 못한 땅과 계곡의 가파른 경사, 울퉁불퉁한 바위 등 위험한 지형이 많다.
게다가 살생을 하는 사냥터이니 언제 어디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는 일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올해도 제가 곁에서 황녀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뒤에서 잔뜩 기합이 든 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로테아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하자 레이먼드가 웃었다.

“믿음직스럽네, 조이 경.”

레이먼드는 조이를 향해 엄지를 추켜세워 보였다.
* * *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깃발이 펄럭였다.

두 발로 말을 타고, 사냥개를 끌고, 하인들을 몰고. 대회의 참가한 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숲으로 흩어졌다.
도로테아는 모두가 흩어지길 기다렸다. 사냥할 사람들이 떠나 공터가 한산해지자 도로테아는 조이와 함께 천천히 에단과 약속한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숲의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황녀님, 저기 사람들이 뒤따라와요.”

그때, 조이가 도로테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흘끔 뒤를 돌아보니 한 무리의 여인이 도로테아를 따라오다가 나무와 덤불 뒤로 숨었다.
도로테아가 에단을 만나러 가는 것을 알고 있으니, 에단을 보기 위해 그녀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이래서 에단이랑 공터에서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건데.

“따돌리셔야죠?”

따라오지 말라고 말로 해봤자, 저들은 사냥하러 가는 길이었다는 핑계를 대며 몰래 따라올 것이다.
그렇다고 ‘착한’ 도로테아가 따라오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할 수도 없고.

“그래야겠지?”

다행히 도로테아는 사냥을 위해 편한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황실의 사냥터. 회귀 전후로 여러 번 왔던 곳으로 지리는 머리에 확실히 그려져 있다.
조이와 도로테아는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짓 한 번에 두 사람은 동시에 오솔길에서 꺾어져 숲으로 달려갔다.

눈빛만으로도 통할 수 있는 건 다 슈테판이 두 사람을 훈련해 둔 덕분이다.
두 사람이 갑자기 달리자 뒤따라오던 여인들이 허겁지겁 그들의 뒤를 쫓아 달렸다.
나뭇가지와 바위들이 휙휙 시야 옆으로 지나가 사라졌다.
함께 검술 연습을 하곤 했던 두 사람은 달리는 발걸음마저도 합이 잘 맞았다.

“내리막길 조심하세요, 황녀님!”

“걱정 마!”

도로테아는 마치 다람쥐처럼 지난가을의 묵은 낙엽이 축축하게 쌓인 내리막을 한달음에 달려 내려갔다.
조이도 도로테아를 바짝 따르며 뒤에 오는 여인들을 확인했다.

이미 대부분이 포기하거나 미끄러져 넘어져 시야에서 사라지고 한두 명만이 아등바등 따라오고 있었다.

‘사냥하러 온 게 아니라 사냥감이 되려고 온 것 같네.’

도망치던 도로테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조이!”

도로테아가 조이를 보며 눈을 맞췄다.
조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동시에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다.

“꺅!”

뒤따라오던 여인들이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두 사람은 마법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한참을 주위를 맴돌며 도로테아를 찾던 그들은 곧 멀리 떠나갔다.

“매년 이런 짓도 피곤하지 않으세요?”

너럭바위 밑에 웅크리고 있던 조이가 일어서며 물었다.

“조금 재밌는 것 같기도 해.”

“어쩐지 황실 운운하며 호통을 치지 않으시더라니, 즐기고 계셨어.”

조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에 붙은 낙엽을 털어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응.”

조이가 앉아 있던 도로테아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럼 이만 가시죠.”

* * *
어느 정도 더 걷자, 나무 그루터기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보였다.
후드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도로테아는 실루엣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도 멀리서 걸어오는 도로테아의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황녀님!”

에단이 놀라며 도로테아에게 달려왔다.

“또 쫓기셨어요?”

“인기가 너무 많아, 에단.”

에단은 도로테아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누가 보면 벌써 사슴 한 마리는 잡은 줄 알겠어요.”

에단의 농담에 도로테아가 웃었다.
에단은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부드럽게 정리해 주더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넌 따라오는 사람 없었어?”

“조나단 형님 덕분에 없었죠.”

에단이 말했다.
조나단 브론테는 같은 브론테로 공터에 함께 있었는데, 에단에게 기웃대는 사람들만 보면 화를 내며 내쫓아주었다.
자신보다 관심을 많이 받는 에단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겠지만, 덕분에 에단은 꽤 편하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조나단 브론테가 좋을 때도 있네.”

“제가 살려주었는데, 이런 거라도 해야지요.”

에단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조나단 브론테는 몇 년 전, 사냥하던 중에 사망해야 했다.
에단은 조나단의 죽음을 두고 꽤 많은 고민을 했다.
그가 죽으면 브론테 가문의 후계자는 에단이 되고, 그럼 최소한 지금보다는 그의 입지가 나아질 터였다.
도로테아와 함께 어울리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카르넌도 그가 브론테 공작가를 정식으로 잇게 되면 인정해 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에게는 개과천선이라는 도로테아의 특별 임무가 있었다.
조나단이 죽을 걸 빤히 아는데도 그걸 내버려 두는 건 비양심적인 것.
그래서 몇 해 전, 조나단이 사냥을 가지 못하도록 미리 활을 끊어버렸고, 조나단은 그 일로 에단에게 매우 화를 냈지만 목숨은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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