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님은 착하게 살고 싶어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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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펜을 들고 만지작거리다가 클라라와 슈테판이 내 버킷 리스트를 보지 못하게 멀리 쫓아놓곤 잉크를 찍었다.

[첫째, 하루 한 번 친절한 미소.]

이것은 나에게 대단한 결심이었다.

‘후…….’

첫발을 떼고 나니 두 번째 발걸음은 좀 더 쉬웠다.

[둘째, 남의 것을 탐하지 않기.]

꽤 그럴듯한 착함이었다.
나는 그 밑에 작게 적어 넣었다.

[황위는 레이의 것. 테온은 줄리아의 것.]

짧은 문구를 적는 펜촉이 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가듯 쓰렸다.
황위도 테온도 모두 나의 것이 아니다.
가슴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 넣고 나서야 나는 무의식중에 참고 있던 숨을 터뜨렸다.
두 번째 다짐으로부터 빨리 넘어가고 싶어서 나는 세 번째를 재빠르게 써넣었다.

[셋째, 사람 백만 명 살리기.]

사람을 살리는 건 착한 일이겠지.
세 번째 다짐은 지난 생에 지은 죄를 속죄하는 의미에서였다.
지난 생에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일까?
내가 직접 칼을 들어 죽인 사람뿐만 아니라 내가 벌인 전쟁, 내가 시킨 노역, 내가 미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재난과 질병, 기아.

그로 인해 죽은 사람은 족히 50만 명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레이가 황제가 되었다면 살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죽었다.
그러니까 그 속죄의 의미로 이번 생엔 그 두 배인 백만 명을 살려보는 거야.
그 외에도 나는 착한 일과 연관되는 내용을 몇 개 더 써넣었다.
일주일에 고맙다는 말 세 번 듣기, 매달 백만 블랑 이상 기부하기.

‘일단 이 정도만…….’

이것들만 해도 충분히 성공한 삶이잖아.
나는 개운해진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보았다.
하얀 모래사장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내 가벼운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주듯 파도가 치고 있었다.

“나 바닷가에 가볼래.”

요양 온 보람은 저 풍경에 있다.
* * *
나는 슈테판만 데리고 바다로 나갔다.
슈테판은 우수한 기사였다. 나는 그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따금 나는 그가 내 곁을 따라오고 있다는 걸 잊었다.

뒤를 돌아서서 모래사장에 나란히 찍혀 있는 발자국을 확인한 다음에야, 나는 그가 아까부터 날 따라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의 일에 개입하지 않았고, 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내 곁에 있었다.
그 덕에 나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 거품이 잘게 터지는 소리, 바람 소리가 만드는 고요를 만끽할 수 있었다.
해변엔 오직 나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멀리 인영이 보였다.

햇살이 반짝이는 모래사장의 끝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모래 위에 무릎을 접은 채 앉아 있었다.
멀리 바다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손바닥에 파묻기도 했다.
웅크린 크기가 작은, 딱 내 또래의 아이였다.

‘누구지?’

슈테판은 나보다 먼저 그 아이를 인지한 듯했으나 나서지는 않았다.
위협이 되어 보이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의 실루엣을 분간할 수 있게 된 나는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그 아이는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햇살에 무지갯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며 휘날리는 은빛 머리카락, 속이 비칠 것만 같은 투명한 피부, 깎아지른 콧대와 턱선.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그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자면 마치 바다가 그를 붙잡으려고 파도를 열심히 모래사장으로 뻗어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햇살은 오직 그에게만 비추고, 모래알이 그를 위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심지어 하늘을 날던 갈매기들이 날갯짓을 잊고 옹기종기 바위에 모여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으니.

“아…….”

슈테판 또한 그의 얼굴을 보고 탄식을 내뱉었다.
슈테판이 말을 하게 하는 얼굴.
누가 보아도 완벽한 외모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에단 브론테.’

나는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도로테아 밀라네어가 폭군으로 불릴 때 그 가장 가까이 있던 측근.
사교계의 ‘금빛 눈의 천사’.
누가 지었는지 모를 ‘금빛 눈의 천사’라는 별명은 창피할 법도 했지만, 그만큼 에단 브론테에게 잘 어울리는 별명도 없었다.
테온을 사랑하는 내가 봐도, 에단의 외모는 가히 제국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긴 다리로 무도회장을 가로질러 들어오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고, 그러면 에단은 곱상한 얼굴로 싱긋이 웃으며 사람들과 눈을 맞추곤 했다.

곧이어 무도회장을 메우는 황홀한 찬탄.
세상의 빛을 모두 담아 넣은 듯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로 상대를 응시하고, 제삼의 악기라고 불릴 법한 부드럽고 그윽한 목소리로 한마디 인사를 건네면 누구나 그에게 홀리곤 했다.

외모뿐만 아니라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악기면 악기. 사교계에서 내세울 만한 것이라면 못 하는 것이 없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그와 한마디 나눠보는 것이 로망이 될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
하지만 역시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주지는 않았다.
레이가 황태자 자리를 가졌으나 착하기만 한 바보였던 것처럼, 에단 브론테에게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그의 아름다운 외면 안에 감춰진 새카만 내면.
에단은 결코 착하고 바른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도 그에겐 축복일지 몰랐다.
간악하기가 너무 간악해서, 아무도 그의 검은 내면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으니.

‘제가 시키면 다들 합니다, 폐하. 제 발가락을 핥지 못해 애원하는 자가 제도에 한 가득이죠.’

에단은 자기가 잘났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그의 외모는 무기이자 방패였고 그 위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놈은 친절하고 상냥한 가면으로 사람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다.

‘네 말대로 리버사우스의 성주가 죽었다더군. 대체 넌 그걸 어떻게 알았지?’

영 마음에 들지 않던 성주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었을 때, 나는 에단이 며칠 전 성주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예견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주는 자신의 오랜 하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안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든 겁니다. 저의 폐하를 위해.’

에단이 웃으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와 생각건대, 그의 가면 속을 알고 있던 나조차도 그에게 이용당했다.
그가 나를 위해 성주를 죽여줬을 때 나는 기뻐서 그에게 상을 내렸고, 에단은 그런 나를 위해 더욱 많은 것을 해주었다.
그는 내가 싫어하는 놈을 처리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져다 바치고 레이를 죽일 수 있도록 나를 도왔다.

나의 바람대로 테온의 사랑인 줄리아를 죽여준 것도 그였다.
그만큼 나는 그에게 부를, 권력을, 명예를 모두 주었고 그는 이른 나이에 재상 자리에 올랐다.
나는 그때 내가 그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충직한 신하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나를 사랑해 주지 않던 가족과 나를 외면하던 테온 사이에서, 오직 나를 위해 움직여 주는 사람.

나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한 사람.
그러므로 난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고마웠으니까. 그에게만큼은 내가 인정받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모든 걸 가진 에단은 종국에 나의 옆자리를 노리기까지 했다.

‘폐하, 어째서 저 오만불손한 자를 곁에 두십니까?’

어느 날 그는 내가 내민 손을 무시하고 혼자 계단을 오르는 테온을 보고 말했다.

‘제가 폐하와 혼인하였다면 극진히 모셨을 텐데요.’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빛났다.
욕망으로 가득 찬 그 눈빛에 나는 불쾌해졌다.
테온을 모욕하고, 내 옆자리를 노리는 탐욕이 빤히 보여서.

‘에단.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가려서 하는 게 네 재주라고 생각했는데.’

‘……죄송합니다, 폐하.’

에단은 영리한 사람이었으므로 그 후 다시는 내 앞에서 테온을 욕하거나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 끝에서 나는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폭군으로 몰려 처형대에 오를 때, 재상이던 그는 만인에게 무죄를 판결받았다.
‘폭군 아래에서 어떻게든 나라를 지켜보려던 재상’.

그의 면죄부 내용은 그랬다.
심지어, 그는 나의 죽음 뒤 차기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천사 같은 외모와 가식적인 친절함은 모든 죄를 사면받는 특권이었고, 그렇게 나는 그의 죄까지 모두 끌어안고 처형대에 올랐다.
그는 나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다.

그런 그를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카르넌과 레이로부터 겨우 도망친 나를 다시 묶어놓으려는 운명의 장난처럼.
그제야 나는 이곳 세리티안이 브론테 공작 가문의 영지에 속했다는 것을 상기했다.

‘브론테라…….’

브론테 가문의 이름을 들었을 때 에단을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브론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그였다.
하지만 이렇게 만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별궁은 성주의 성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있었고, 노력만 한다면 평생을 그와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피해야 돼.’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며 나는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나는 보고 말았다. 에단 브론테의 눈가에 투명하게 빛나는 영롱한 보석을, 아니, 눈물을.
입술을 물고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무엇 하나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그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크게 소리 내지 못하고 파도에게 속삭이듯이 흐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에단 브론테, 모든 귀족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미남.
그의 눈물을 무시한다는 건 허기진 고양이가 생선을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에단이 우는데 모른 척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장담컨대 없을 것이다.
슈테판마저 그가 우는 모습을 보고 자리를 뜨지 못할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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